[ envirOnment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4월 8일 일요일 오전 04시 31분 38초 제 목(Title): 조우석/서평.. 게으른 농사꾼, 이영문 출처: 월간중앙 농약을 버리고 깨달은 자유주의적 삶의 방식 조우석의 독서일기-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 이야기 조우석 이영문 지음 / 양문출판사 / 7,800원 책의 내용에 대한 검증 대신 저자의 이름값이나 명성을 잣대로 책을 소개하는 국내 일간지들의 관행 때문에 내용의 함량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평가를 얻지 못한 책이 이 신간이다.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윤리학자 중 한명인 리처드 로티가 “이 책은 일류이다”라며 아연 높이 평가한 번역 신간을 최근 관심있게 읽어볼 수 있었다. 서평을 담당하는 기자, 즉 ‘신간 감별사’에 다름아닌 필자 입장에서 보자면 일차적인 정보로는 썩 괜찮은 것이 로티의 말이라고 판단했다. 뒤적여 보았더니 원제는 “The Malaise of Modernity”이고, 우리말 제목은 “불안한 현대사회”(이학사)였다. 현재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대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가르치는 저자의 사상적 지향점이 다름아닌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자’라며 근사하게 소개돼 일별하고 싶다는 입맛이 돌았다. 꽤 공들여 통독하고 나서야 생각한 것보다 다소 범용한 내용에 실망했지만, 소득은 전혀 없지 않았다. 소득이란, 말하자면 자기네들 서구사회의 점증하는 높은 피로도 속에서 서구의 지식인들이 이제는 문제의 핵심인 모더니티 문제에 정색한 채 분석하기 시작했다는 재확인이다. 특히 저자에 따르면 근대 200∼300년의 최고 업적이라고 찬양해왔고, 바로 그 때문에 근대적 자유를 쟁취했다고 말해져온 ‘개인주의’ 바로 그것이야말로 현대사회 불안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주범이다. 막스 베버의 핵심용어를 빌리자면, 근대사회는 탈(脫)주술화(呪術化) 물결 속에서 인간사회에 초월해 있는 ‘가상적인 신성한 질서’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존재의 거대한 연결고리’인 도덕적 지평마저 잃어버린 채 ‘나홀로 개인’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다는 얘기다. 책에서는 탈주술화의 물결 속에서 철학동네의 용어로는 항용 ‘도구적 이성’의 지배라고 부르는 합리성의 극대화라는 것 자체가 현대사회 불안의 또 다른 주범으로 지목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 내자는 ‘효율성이라는 금척(金尺)’만이 전부인양 통용되고, 그 결과 삶의 목표는 소멸하고 말았으며, 이제 개인은 ‘자신의 마음 속에 갇혀 있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이들은 이제는 공허할 수밖에 없는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와 개인생활의 만족을 즐기기만을 선호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번역한 송영배(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책의 뒤쪽에 마련한 글을 통해 이런 현대사회 불안의 대안으로 동아시아의 유교 윤리관을 막바로 들고나오는 바람에 필자는 속으로 ‘그 교수 저으기 나이브하구먼?’하며 혼자 웃고 말았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에 현대사회 불안의 진정한 치유는 다른 데 있다. 즉 현대사회는 오히려 인간이 교호하는 지평인 자연 혹은 생태적 지평과의 연결고리 복원이 보다 근본적이고 구체적이다. 이런 판단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필자는 1996년 국내에 소개된 스웨덴 언어학자 헬레나 노리베리 호지의 매력 넘치는 책 “오래된 미래”(녹색평론)의 증언을 꼽으려 한다. 요령부득의 번역에도 불구하고 내용 자체가 뛰어나게 좋기 때문에 입소문을 타고 돌려 읽힌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원제부터 얼마나 위력적인가? 즉 “Anc-ient Future”가 말해 주듯, 호지 여사는 인류의 앞날은 서구 근대의 모더니티가 가르쳐 왔던 ‘불가피하며, 의심할 수 없는 진보’에 있지 않다고 언명한다. 대신 이를테면 티베트의 라다크 지방에서 고대 이래로 영위해온 삶의 방식에 있다고 선언한다. 호지는 그것을 ‘인간지구 사이의 공동진화에 기초한 생존양식’이라고 말한다. “티베트 고원의 ‘원시적 문화’가 우리 산업사회에 가르쳐 줄 것이 있다는 것은 얼핏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보일지 모른다. 라다크에서 나는 이른바 진보로 인하여 사람이 땅에서, 인간들의 사이에서 그리고 결국 자신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보아왔다. 서구문화는 보다 넓고 장기적인 관점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전문화되고 당장 눈앞의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경제는 갈수록 전문화와 중앙집중화 그리고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 생활양식으로 세계를 빠르게 이끌어가고 있다. 우리는 긴급히 지속가능한 균형-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형-을 향해 방향을 돌려야 한다. 이러한 보다 넓은 시각은 우리 자신과 지구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필수적이라고 나는 믿는다.”(10~11쪽) 서론이 길었다. 이달에 소개하려는 책은 다름아닌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 이야기’(양문출판사)이다. 책의 내용에 대한 검증 대신 저자의 이름값이나 명성을 잣대로 책을 소개하는 국내 일간지들의 관행 때문에 내용의 함량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평가를 얻지 못한 책이 이 신간이다. 단 지난달 “중앙일보” 지면에 나는 이 책을 일차 소개하면서 거의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좋다.(앞의 설명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이 책과 관련해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부박한 시대, 자기 생각 없이 짜깁기한 과장된 언어의 홍수에 지쳤을 것이 분명한 당신을 위무해 줄 신뢰할 만한 목소리’, 그것이 이영문의 신간이다.”(중앙일보 2월25일자 ‘행복한 책읽기’) 실은 2년전 같은 출판사에서 저자인 이영문이 펴낸 첫 책 “모든 것은 흙 속에 있다”를 훑어볼 수 있었던 필자는 당시에도 자연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외경(畏敬)의 마음으로 가득찬, 과연 흔치않은 진실의 목소리라고 판단했는데 이 판단에 필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번 두번째 책은 내용에서 다소 중복된다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도회지 삶에 지치고 허덕이는 우리에게 놀라울 만큼 설득력 있는 그리고 2년전 단행본보다 훨씬 더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태평농법이라는 이름으로 현행 농법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지 벌써 28년이 흘렀다. 논을 갈지도 종자를 소독하지도 않으며 비료와 농약은 한톨, 한방울도 쓰지 않고 농사를 지은 세월이었다. 그 사이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으며, 순간순간 내 길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스스로 의심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확신한다. 그동안 나는 비록 대다수 인간의 지식에 등을 돌려 왔지만 결국 그 길은 자연과 한발 한발 가까워지는 과정이었다는 사실 말이다.”(17쪽) 이미 감지했겠지만 당초 이 땅 위의 보통 농사꾼이면서 태평농법이라고 하는 무농약 무경운 농법을 실험하고자 했던 이영문의 시선은 인간과 자연이 교호하는 삶에 대한 포괄적 성찰로 이어진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그의 성찰은 앞서 언급했던 바다 건너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던져 주는 설득력에 못지 않고,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언급했던 ‘인간지구 사이의 공동진화에 기초한 생존양식’의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 주는 작업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문의 다음 목소리를 들어보자. “화학농법으로 피폐해진 땅을 살리고, 그 땅을 볍씨·거미·미꾸라지 그리고 진드기와 벼멸구까지 함께 어울려 사는 곳으로 가꾸는 동안 나의 시야는 어느새 농사라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차츰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단지 농사에 머무르던 내 눈길은 인간과 경제구조를 향해 조금씩 넓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자연이라는 커다란 화두가 온 마음으로 들어선 것이다. 현대사회 불안의 원인은 단 하나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오만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알게 됐다. 살아 숨쉬는 흙, 여러 종류의 벌레, 날짐승·들짐승과 함께 농사지으면서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하찮고도 하찮은 자연의 말초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18~19쪽) 자 구미가 당기시는지. 이쯤에서 구체적으로 이 흥미진진한 신간의 내용을 살펴볼 차례다. 첫장 ‘게으른 농부, 부지런한 자연’을 살펴보면 저자 이영문의 농사짓는 일상과 벼멸구에서 개구리까지 뛰어노는 논바닥에 기꺼이 코를 박은 채 싱싱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간취된다. 엔간한 문학 에세이들에서 받았던 밋밋해진 감동 이상의 위력도 바로 그 때문이다. 보자. 아침 일찍 이영문은 논바닥으로 나간다. 작물이 잘 자라는지를 확인하려 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농약 덕분에 ‘생태계의 비무장지대’에 다름아닌 자기 논의 부지런한 농사꾼들을 구경하는 재미 때문이다. 그 재미라는 것은 ‘천하태평의 재미’다. 천하태평의 재미란 벼멸구같은 해충에게까지 그토록 너그럽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시선 때문이다.(혼자 보기 아까워 부분발췌해 보자.) “사람들은 내 논에만 온갖 해충들이 피난와 피해가 이만저만 아닐 거라고 걱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벼멸구니 뭐니 하는 것들이 들어와서 볏잎을 갉아먹는 일도 있다. 그런데 그만큼이라도 상처를 내줘야 벼라는 녀석도 경각심도 갖는다. ‘아차, 이러다간 다 죽겠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하고 스스로 체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정도의 자극도 없다면 한없이 게을러지고 그야말로 태평해져서 생명력이 약해질 것이다. 그런데 다른 논에서 못살고 피난오는 벌레는 해충만이 아니다. 온갖 익충도 내 논에 저희들이 좋아하는 먹이가 많다는 소문을 들고 구름같이 몰려온다. 따가운 햇살에 벼가 타글타글 익을 무렵이면 논바닥 식구들의 삶도 절정에 이른다. 우선 이른 아침 논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밤새 새하얗게 논을 덮고 있는 거미줄로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거미이다. 그걸 보노라면 곤충들 사이에 퍼져 나가는 소문 하나를 듣고 있는 것 같다. ‘저기 이씨네 논 있지? 거긴 함부로 발 들이면 안돼.’ 농약을 안친다지만 무턱대고 내 논으로 해충이 몰려들 거라는 걱정은 절로 잦아드는 것이다.” 어떠신지. 과연 훌륭하지 않은가! 논에서 벌레들 사이의 세력관계를 묘사하는 이영문의 다음 묘사도 놀랍다. 이를테면 초가을 찾아오는 손님인 무당벌레, 그 녀석은 진딧물을 맛나게 먹으려고 그의 논으로 찾아든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개미군단. 껍질이 딱딱한 무당벌레라지만 그 녀석은 개미라면 뒷걸음을 친다. 어쨌든 월동하는 동안 보리와 밀의 진딧물을 잡아먹는 정말 부지런한 농사꾼이라는 것이 이영문의 말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논에는 청둥오리와 들쥐, 미꾸라지 등이 둥지를 틀었지만 그 녀석도 벼포기를 위해 뭔가 역할을 하겠지 싶기도 하고, 또 함께 땀흘리며 농사를 지었으니 소출을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마음에 그냥 놔두고 있다. 여기까지는 흐뭇하다. 생태계의 미물에까지 마음을 여는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생태계 비무장지대’와 영판 다른, 우리 한반도 전체의 다른 논들은 과연 어떠한가. 그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 땅은 익히 짐작하다시피 중증의 말기암 환자에 다름아니다. 과학농업을 지향한다며 인산과 요소 성분이 많이 들어간 복합비료, 바로 그것은 화산재 토양의 일본 땅에서와 달리 한국의 토양을 망치는 주범이다. 방법은 무엇일까. “인간과 땅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원인으로 인해 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인간, 특히 우리 국민이 화학조미료를 먹기 시작하고 온갖 영양제와 항생제에 의지할 때부터 토양도 비료와 농약의 포로가 됐다. 따라서 치유 방법도 비슷하리라는 것이 태평농법 실험 끝에 얻은 나의 확신이다. 치료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산소를 많이 공급해 주는 것이다. 무산소 상태에서 증식하던 암세포에 산소를 공급해 주면 너무 증식 조건이 좋다 보니 급격한 노화현상을 보일 수도 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방법으로 나는 논을 살렸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전혀 주지 않고 기계로 논을 갈지도 않은 태평한 농법을 썼더니 없어졌던 산소가 풍부하게 돌아왔다. 남해안 가까운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논이지만, 이웃 논의 벼가 가랑비에도 쓰러지는 데 반해 우리 벼는 태풍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이만하면 암을 완전히 치료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109쪽)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중퇴가 전부지만 무공해 작물 생산법인 ‘태평농법’의 보급자로 가장 유명한 농부가 된 이씨의 책들은 환경 에세이집이나 대중적 농법서로 추천할 만한 훌륭한 읽을거리라는 판단을 거듭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과학적 통찰이 담긴 철학서’로도 손색없다. 경남 하동의 촌부가 쓴 그 글들에서 뜻밖에도 도가의 무위(無爲)사상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자연주의 철학까지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나무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해 인체의 생리구조와 인간·자연 간의 관계론으로까지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대목은 저자의 내공을 가늠케 해서 거듭 놀라게 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문명을 거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기계공이었던 그는 땅도 살리고 기계도 살리고자 한다. 그래서 현재 저자가 개발하는 것이 ‘우리 들에 맞는’ 튼튼한 파종기다. 에너지 소비와 공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자동차 역시 그의 연구 대상이다. 또 “이 땅에서 자생할 수 있고 그 씨앗을 받아 다시 심었을 때 여전히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토종이라면서 현재 아열대성으로 바뀌는 우리나라의 기후에 맞춰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아열대·열대 작물들을 실험재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