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cs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econom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30일 금요일 오전 11시 21분 35초
제 목(Title): 뉴스+/제3의길 요술방망이 아니다 


제3의 길’ 요술방망이 아니다 
시민운동 현장에서 본 실체와 대안  
    

몇년전 독도문제가 터지자 보기 드물게 사회운동의 온건-급진, 좌-우가 함께 모여 
항의 집회를 가졌다. 어떤 협의도 필요치 않았다. 이런 폭넓은 ‘연대’ 행동은 
다른 경우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안적인 비전 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민족주의 
정서를 제외하곤 사회운동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큰 비전이 없다고 많은 이들은 
말한다. 
또다른 사례. 올해 IMF 체제를 맞아 우리 시민사회가 보인 반응은 혼란에 
가까웠다. 애국적인 허리띠 졸라매기식 근검절약 운동이 6개월만에 ‘적절한 
소비가 미덕’이라는 읍소 앞에 소리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증발해버린 것은 IMF정책에 대한 제3세계 사회운동의 경고를 무시해온 대다수 
사회운동의 자기반성 능력이다. 중산층의 온건성에 의존하는, 또다른 의미에서 
‘정서주의적’인 시민운동은 IMF정책의 시장숭배론에 비판을 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은 것은 사회운동의 비전 부재, ‘길눈이’ 역할을 상실한 ‘상황 
따라가기’ 모습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 이런 혼란을 겪으면서 국가-시민사회-사회운동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는 분위기가 활성화되고 있다. 사회운동 일선에서도 점차 논의가 달아오르고 
있다. 중산층의 퇴보와 시민운동의 위기, 고용구조의 변화와 노동조합의 위기, 
세계권력의 변화와 국가의 위기, 빈부격차의 확대와 사회정의의 위기, 기업권력의 
확대와 개인의 위기가 대표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위기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불완전한 교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새로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회학의 관심과 사회운동의 관심은 크게 구별된다.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사회학의 관심이 ‘길’에 있다면 사회운동의 관심은 ‘행위자’, 즉 
주체를 규명하고 모으는 일에 있다. 앤서니 기든스가 ‘손상된 연대’를 회복하고 
‘보다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을 강조할 때, 사회운동은 연대성을 
회복하고 급진적 민주주의를 이행하며 그 길을 걸어갈 주체를 먼저 찾는다. 실제로 
시민운동이 좌절하는 것은 바로 이 ‘행위 주체’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의 
일이다. 

행위 주체는 때로는 정서적 더듬이로 찾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IMF체제를 
통해 세계화의 가혹한 진면목을 경험하고 있는 사회운동은 세계화된 현실 속에서 
새롭게 전망과 행위자를 찾기 시작하고 있다. 금융자본, 초국적기업, 
경제선진국들의 횡포와 절대 다수의 피해자들을 보면서 ‘시장’과 ‘기업 
권력’의 확대가 정의의 위기, 민주주의 위기와 직결돼 있다는 인식이 그 기초가 
되고 있다. 극단적인 지구적 빈부격차 구조에서 곤경에 처한 대다수 개도국 서민의 
현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회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회운동의 전망 모색은 서구식 ‘풍요의 조절’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인류 20%만의 풍요가 80%의 인류에 미친 결과에서 출발한다. 비판적 지성들의 
메시지와 함께 ‘성장의 지구적-근본적 한계’에 주목하면서, 과연 지금 이대로 
생산과 소비를 추구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그리고 ‘가능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대략, 20세기의 극단적 ‘성장’과 ‘번영’을 보는 
시각에 전면적인 전환이 없다면 새로운 길은 없다는 점, 저소비-저성장 
사회시스템이 대안이라는 점, 그리고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경제 선진국들의 
독점과 과소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최근 가톨릭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종교계의 반발 역시 
이러한 대안 모색과 연결된다. 

‘새로운 길’로 표현되는 각국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다양한 모색은 지구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공통된 동기를 지닌다. 세계화되는 상황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지도력을 위한 경쟁으로 나타난다.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정치와 사회운동은 항상 ‘뒤따라가기’만 할 것이 분명하다. 
최근 유행하는 ‘제3의 길’도 사실 오래된 앵글로색슨 세계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사회운동은 본래 한 사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만들어내기 힘들다. 그러나 세계화된 시장과 기업 권력의 등장으로 사회운동은 
보편적 주체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을 맞고 있다. 세계화가 가져온 가장 
급진적인 조건이다. 

여기서 보편적 주체의 언어(예컨대 인권)와 삶의 기준(생태주의), 권한(강화된 
민주주의) 등을 제시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길눈이 역할에 해당할 것이다. 이렇게 
‘평민적’ 비전을 취하는 사회운동과 보편국가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이 연대하게 
되면 현실적인 모델로서의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대훈/ 참여연대 협동처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