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conomics ] in KIDS 글 쓴 이(By): virt ( TЯIV) 날 짜 (Date): 1997년12월11일(목) 04시14분51초 ROK 제 목(Title): [한겨레21] 재벌시대 무너지고 있다. 재벌시대 무너지고 있다 (사진/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단 간담회. '위기타개를 위한 경영계 추진방안'을 마련하는 등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지금 재벌의 시계는 중생대 말기를 가리키고 있다. 중생대 1억6천만년 동 안 지구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공룡은 지금으로부터 6천5백만년 전인 중생 대 말-신생대 초기에 지구에서 사라졌다. 공룡같은 덩치로 한국경제를 지배해 온 재벌들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 다. 정권에 의해 키워졌으면서도 이제 어느 정권도 제대로 손대지 못했던 재벌에 국제통화기금이 무서운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구제금융 협상에서 국제통화기금은 재벌이 한국경제를 위기로 몰고왔다며 재벌 구조조정을 우리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재벌에 손대고 싶었지만 번번이 재벌의 반 발에 좌절을 느껴야 했던 정부도 마다할 리 없다. 급격한 방법을 쓰느냐, 점진적 방법을 쓰느냐는 완급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제금융협상에서 국제 통화기금쪽과 우리쪽이 뜻을 같이 한 유일한 대목이 재벌 구조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호채무보증 해소 문어발 경영 조종 구제금융협상이 진행되던 중 일각에서는 ‘재벌해체’란 말도 나왔으나, 물론 2차 세계대전 뒤 ‘맥아더’식의 일본 재벌해체 같은 강제적 방법은 아니다. 재벌이 현재와 같은 △차입·외형 위주 △선단식 △총수 독단경 영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연결고리를 잘라 현재의 경영체제로는 버 틸 수 없게 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있다. 지난 5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지원 조건 중 주목되는 내용은 크게 두가지다.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고 국제 회계기준을 적용해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며 이를 감시하기 위해 외부감사제를 도입하고, 계열간 상 호 채무보증을 해소하는 것이 큰 뼈대로 돼있다. 이것만 제대로 시행돼도 재벌은 견디기 어렵다. 개별기업에 대한 지원보조금 금지나 세제지원 금지 조처가 더 있긴 해도, 이는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이미 시행되고 있 는거나 마찬가지로 별반 새로울 게 없다. 재벌정책은 아니면서도 여느 조처 못지 않게 재벌을 위협하는 게 구제금 융을 계기로 한꺼번에 이뤄진 인수·합병(M&A)시장과 상품시장의 개방이 다. 재벌이 경영을 잘못해 주식값을 떨어뜨리거나 지분관리를 소홀히 하 면 언제든 외국인의 기업사냥 덫에 걸릴 수 있고, 상품시장 개방은 국내 시장이란 안방에서 재벌이 누렸던 독과점적 지위를 무너뜨린다. 한마디로 제도적으로 재벌체제 유지기반을 깨뜨리고, 시장체제를 바꿔 경 쟁력을 키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하겠다는 게 국제통화기금의 복 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재벌그룹의 기획조정실 임원은 “이제 재벌의 전성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재벌 하면 떠오르는 말 중 대표적인 게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이다. 상호채무보증은 이를 가능하게 한 연결고리였다. 한 계열사가 돈을 빌리 면 다른 계열사가 보증 서주고, 보증 선 계열사가 돈을 빌릴 때는 또다른 계열사가 보증을 서 재벌들은 금융기관 돈을 끌어들였다. 이 돈으로 확장 을 거듭했다. 보증이 계열사 사이에 얽히고 설켜 돈 빌릴 때는 좋았지만 계열사 한곳이 쓰러지면 재벌 전체가 무너져 버린다. 이는 나아가 우리 경제를 ‘연환계’에 얽매이게 해 오늘의 위기를 맞게 했다. 공정거래위 원회도 지난 96년에 2000년, 또는 2001년까지 지급보증을 완전 해소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재벌의 거센 반발로 결국 무산됐다. 외국인 네댓명만 모이면 인수·합병 가능 (사진/민주개혁 사회단체 연대회의 주최로 열린 '경제실정 규탄과 고용안정 촉구 집회.' 재벌들이 진짜 두려워 하는 것은 국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보다는 외국 거대자본의 기업인수·합병공세라는 거대한 파도다. ) 발표된 구제금융 조건에는 상호채무보증 관행 시정으로만 돼있지만, 국제 통화기금의 상호채무지급 조기해소 요구는 강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 다. 일각에서는 99년 말까지라는 얘기도 들리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3 0대 그룹의 상호채무보증은 지난 4월1일을 기준으로 64조4천억원에 이른 다. 재벌들이 이를 해소하려면 계열사 정리나 합병 등 대수술을 하지 않 을 수 없다. 계열사 전체를 하나로 묶어 회계처리하는 결합재무제표와 국제기준에 맞 는 회계처리, 외부감사는 재벌의 경영내용을 유리알처럼 들여다보게 하려 는 조처다. 이는 한국기업의 재무제표는 믿을 수 없다는 국제통화기금의 강한 불신에서 나왔다. 실제로 재벌 계열사간에는 자금과 물품 거래가 얽 혀 있고 일부 자금은 총수에게로 빠져나가, 재무제표로는 재벌의 실상을 알 수 없다. 총수가 봉건군주처럼 군림하며, 경영을 독단할 수 있는 것도 그 결과가 재무제표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젠 재벌이 돈 잘버는 기업의 돈을 빼내 다른 기업을 살린다든가, 총수가 기업돈을 제돈처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구제금융 협상이 진행되며 재벌정책이 이렇게 가닥을 잡아가자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던 재벌들은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든 지난 3일 갑자기 돌출한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50%까지 확대와 일본제품의 수입을 막아준 ‘수입처 다변화’ 폐지 소식에 또한번 충격을 받았다. “너무 빠르고 시기도 최악 이다. 대응할 방법이 없다.” ㅇ그룹 한 고위임원의 심각한 표정은 이 조 처가 담긴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엄살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재벌들은 그동안 인수·합병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와 다른 그룹 계열사 를 넘보지 않는 재벌간 묵계 등으로 경영권 방어에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 그런데 이제는 순항하던 선단이 외국 거대자본의 기업 인수·합병 공세 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아 흩어질 위기에 놓인 셈이다. 정부는 물론 외국인이 국내기업 지분을 10% 이상 가질 때는 해당기업 이 사회의 승인을 받게 해 외국의 약탈적 인수·합병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아 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기업의 반응은 다르다. 외국인 네댓명만 모여도 국내기업은 손쉽게 사냥감이 된다며, 구제금융시대 경영전략 목록에 ‘적 대적 인수·합병 대응’을 주요 표제로 올려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만약 외국기업이 주력사를 노리면 그룹은 졸지에 와해될 수도 있다. ㅅ그룹 재무담당 임원은 “국내기업들의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편인 데다 , 주가도 크게 떨어진 상태여서 외국인의 약탈적 인수·합병 공세가 잇따 를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자사주 매입, 전환사채 발행, 금융회사와의 연대 등을 통해 지분을 확보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급작스레 벌어진 사태에 대부분 재벌들은 대응책을 짜 내지만 뾰족한 방안은 찾지 못하고 있다. 다급해진 자금난 때문에 돈을 구하러 뛰어다녀야 하는 판에, 인수·합병에 대비한 자금을 확보할 여력 이 없다. 재벌해체 요구는 선진국의 음모? 재벌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3일 한나라당 국민회의 국민신당 정책위 의장을 초청한 가운데 30대그룹 기조실장 회의를 열어 “재벌기업은 한국 경제 고유의 문화로 국가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해왔다”며 해벌해체 에 반대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평소 아무리 재벌들의 말을 잘 들어주던 정치권이라지만, 대통령 후보들이 국 제통화기금 요구사항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마 당에 도움이 될 리 없다. “진작부터 구조조정을 했으면…”하고 재벌그 룹 한 임원은 혀를 찼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경제주권은 넘어가 경제식 민지 시대는 시작됐고, 식민지 통치자(국제통화기금)은 재벌의 말에 귀기 울일 생각조차 않는다. 그런데, 주목되는 목소리가 들린다. 평소 재벌체제 타파를 목소리 높여 외쳤던 이들도 뭔가 개운치 않다. 왜 국제통화기금은 그렇게 재벌을 해체 하려 했을까? 일각에서는 과감하게 투자하고, 그룹이 함께 뭉쳐 해외시장에 진출하며 선진국 기업을 위협하는 한국의 재벌을 이틈에 와해하기 위한 선진국의 이해가 ‘재벌이 한국경제 위기’라는 포장을 한 채 국제통화기금을 통해 뜻을 이뤘다는 얘기가 들린다. 다행히 재벌이 이번 일을 계기로 주력사에 힘을 모으고 강력한 국제경쟁력을 가진 기업으로 거듭나면 더 바랄 게 없 다. 하지만 선진국의 ‘음모’가 사실이고 ‘음모’대로 재벌이 그대로 주저앉는다면 다음 국내산업을 이끌 주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 이율배반 의 숙제가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김병수 기자/ 한겨레 경제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 아이들은 미래를 물고 늘어지고 나이든 사람은 과거를 물고 늘어진다. 현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미래나 과거를 만들어낸다. 노인들의 미래는 과거이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지금'을 통해서인데, 많은 사람들은 시간의 굴레에 묶여 있어야 편안하리만큼 무력하다. 과거와 미래를 원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울고 꽃은 핀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