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SSman (♣ 평화 ♣맧) 날 짜 (Date): 1997년10월17일(금) 15시10분11초 ROK 제 목(Title):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2] <<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두번째 97. 10. 15. 심백섭 예수회 수사 --------------------------------------------------------------------------- -- 글에 앞서서 -- << 필자의 정체를 이제나마 밝혀 드립니다. 필자는 서강대 교목실에서 올해부터 내년까지 일하기로 한 예수회의 심 백섭 유스티노 수사입니다. 앞으로 예수회 수사로서 가톨릭과 예수회의 시각을 염두에 두고 방을 꾸려 나갈 생각입니다. 또한 예수회 수사라는 신분은 그 이전에 한국 문화에 세례받고 종교학을 연습한 사람으로서의 신원과 충돌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방을 통해 신앙과 종교 문화의 성숙을 기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빕니다. >> 개인적인 의문이나 대화를 원하시는 분은 호출기 (012-1011-8165)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나 이제는 근대 이후의 시기, 사춘기 이후의 시대를 예감하거나 예비해야 하는 때이다. 생각하면 비합리성에 대한 합리성의 반항, 그 근대적이고 사춘기적인 반항은 기실 합리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인간이, 역사가 도대체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도 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것이 성숙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그 성숙이 합리성 이전의 비합리성으로의 역행이나 복고일 수는 없다. 합리적 검토를 하고 또 해도 여전히 남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대한 재발견인 것이다. 우리만의 비합리적 영역만이 아니라, 제네들의 비합리적 영역도 보는 신비의 재발견인 것이다. "탐구할 수 있는 데까지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은 숭배하라"는 괴테의 고백을 여기서 되울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서 종교를 보는 눈은 어느 한 종교의 틀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일 수도 없고, 어느 특정한 세속 학문의 자리에서만 타당한 것일 수도 없다. 그러한 자리에서 종교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 곧 "존재론적 문제(물음)에 대한 해법(풀림의 길)의 상징 체계"라는 식으로 일단 정리될 수 있다.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해법의 상징 체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음 차례의 강좌부터) 좀더 자세히 살펴 보겠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렇게 정의하고 보는 우리들의 접근 태도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그것은 분석과 종합, 비판과 공감, 분별과 사랑 등의 상반되어 보이는 태도 사이에서 긴장된 균형을 유지하는 성숙에의 연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정하게 제도화되어 있는 우리 종교의 틀 안에만 갇혀 있는 패거리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 종교의 정신을 구현하는 길이다. 이렇게 폭넒은 시야와 공정한 태도를 지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사상적 돈-환이 되어 이 종교 저 종교를 집적거리며 아이 쇼핑하듯이 배회하거나 방황하지도 않아야 한다. 어느 한 종교와 그를 믿는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 가 함께 하는 것이다. 실로 여러 종교들과 문화들에 대한 탐색은 이웃 사랑의 속 깊은 차원과 다른 것이 아니다. 종교현상학자인 반 델 레에우는 그리하여 종교학을 "사랑하는 이에 대한 사랑하는 이의 사랑어린 눈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랑은 분별있는 사랑이다. 그 공감은 비판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그 종합적 통찰은 분석적 절차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합리성을 거친 다음의 비합리성의 영역으로서의 신비, 그것이 성숙한 종교의 모습이듯이, 그러한 종교에 대한 성숙한 접근이라는 것도 합리적 영역과 비합리적 영역을 넘나드는 외교여야 할 것이다. 온탕과 냉탕을 넘나드는 것과 같은 이러한 성숙에의 연습은 어쩌면 죽음에의 연습이다. 친숙한 것에 눌러 붙고 싶은 타성을 거부하고,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 자꾸 만나고, 만나다가 사랑하고,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야 하는 그것은 죽음에의 연습이다. 기존의 입장과 생각과 생활 전체가 밑바닥부터 붕괴되어 내 자신이 깨져버리는 것과 같은 것을 경험하는 그것은 죽음에의 연습이다. 다만, 우리는 죽음 그 끝에, 아니 이미 그 안에 저 부활의 새 지평, 그 영원한 삶으로의 길이 열리고 있음을 보고 또 믿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