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SSman (♣ 평화 ♣맧)
날 짜 (Date): 1997년10월16일(목) 12시40분30초 ROK
제 목(Title): 종교와 문화


다음은 유니텔 가톨릭 동호회에서 퍼온 글입니다.
예수회 심백섭 수사님 께서 쓰신 글이군요.

================================================

 흔히 알고 있듯이 가톨릭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 역사는 타문화나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가톨릭이나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속성이라거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이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구약 시대에서부터 뚜렷하게 보편화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 야훼가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였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약은 끊임없이 보편적인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다.

 우리는 아브라함 성조 이후에 히타이트나 바빌로니아 등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 문화, 희랍 문명과 로마 문명과 부단히 
조우하면서 그러한 굵직하고 다양한 제 문화권의 진수들을 하느님 신앙 안에서 
통합시켜 온 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이나마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인간적인 
시각에서도 쉽게 수긍이 간다.

 사실은 유태교나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그처럼 강력한 배타성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위대하고 다양한 문화들과 교섭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어린 아이가 강하고 다양한 
무리들 속에서 배우면서도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감과 고집까지도 
요구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단 어릴 때의 그 단계를 지나서까지 자기 방어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과정이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인류와 
교회는 이제 어린 아이의 단계를 벗어났다.  옛날처럼 비교적 독립된 문화권 
안에서 특정 문화나 종교가 그 문화권 전체를 지도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훨씬 많은 종교와 문화가 있으며 우리의 종교와 문화는 그 여러 가지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특히 다원적 종교 문화의 상황 하에서 
근대적 세계관은 특히 세속주의적 경향을 가속화시키면서 아예 종교 문화 자체가 
위축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을 촉구한다.  우리는 다양한 종교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그 안에서 어떻게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지에 대해서 
주목하고 지각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어떤 종교든지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의 관점에서 성령의 안목에 
따르면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더 그 종교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그들보다 더 
그 종교의 문제점을 고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는 하느님 자녀의 마음이다.

 타종교 문화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자됨의 자연스러운 발로이기도 
하지만 , 갈수록 세속주의에 찌들고 있는 세상에서 신비를 알아 보는 감각을 
계발하고 기도의 가치를 삶을 통해 알아 차려야 할 필요가 그만큼 절실해진 이 
시대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는 산업화와 상업주의가 절정에 
달한 서구에서 세속주의에 감염되어 이제 원래의 종교적 생명력이 상당 부분 
고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원래의 싱싱한 영성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고 동양의 여러 종교와 깊이 만날 필요가 있다.

 세속주의는 세속을 초월한 어떤 준거도 지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것의 일정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세속주의의 문화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도 세속적 경험과 세계가 사실상 전부인 삶을 살면서 스스로 새로운 
차원으로의 출구를 봉쇄당하고 있다.   사회도 세속적 이익과 권력, 쾌락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준거도 허용하지 않는 만큼, 자기 비판과 자기 쇄신의 
가능성을 닫아 걸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적 감성과 신비의 
발견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안에서뿐만 아니라 성령이 일정하게 현존하고 활동하는 
장인 타종교에까지도 우리의 사랑어린 눈길을 정성을 다해 던지는 것은 누구나가  
떠 마셔야 할 정신적 문화적 생수를 지켜 내는 절대 절명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상을 통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다분히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은 이미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강요하고 있는 터여서 구태여 할 필요가 없는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다원적이고 세속적인 삶 한가운데에서 살면서 몇 천년 전에나 타당했을 것 같은 
교리가 더 이상 절실하게 와 닿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위로나 마음의 평화를 
적당히 얻어 쓸 수 있으면 되겠는데, 그것도 흔히 신통치 못하다는 것을 느끼며 
사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이렇게 내 종교도 제대로 못 살고 있는 터에, 굳이 남의 
종교나 종교 자체에 대해서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이  할 일 많고 
재밋거리도 많은 세상에.

 그러나 사실은 여러 언어를 아는 것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보다 근본적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괴테는 여러 언어를 모르면 한 언어도 
모르는 셈이라고 하였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여러 종교를 모르면 자기 종교도 
모르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알면서 내 종교의 독특한 면과 종교로서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면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