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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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byulnim (★꿈의대화�0)
날 짜 (Date): 1997년07월28일(월) 17시49분21초 KDT
제 목(Title): 유럽여행 기행문~!!


제가 친구들과의 소식지에도 내고, 카톨릭 보드에도 이태리, 로마여행 
기행문을      
 
올리고 싶어 써봤는데요 다소 길지라도 끝까지 읽어주세요...헤헤
 
요이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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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기전의 마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들뜨게 마련인 것 같다. 특히 
바쁜 직장생활 가운데 맞이하는 여름 휴가중의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이번 
여행일정은 스위스, 이태리, 프랑스, 영국 등 4개국을 7박 8일동안 관광을 하게 
되어 있었다. 약 11시간의 비행 끝에 스위스의 쮜리히에 도착하였다. 지저분한 
통로, 터미널 크기보다 작은 공항청사 등을 뒤로하며 알프스 산중의 호텔로 
이동하면서 차창을 통하여 보는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고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특히 백년설로 뒤덮인 티티리스 산을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잡은 
호텔에서 바라본 경치는 한폭의 풍경화였다. 그렇게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한껏 
느끼며 유럽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이튿날 티티리스산을 등정하게 되었다. 
케이블카를 두 번 갈아타고 정상에 올라보니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뒤덮으며 
동시에 다리에 만년설의 차가움이 뼈속 깊이 파고드는 듯했다. 그산의 해발은 
4,700m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봉에서 내려다 본 스위스의 풍경은 이글로 
표현하기에는 나의 글솜씨가 부족한 듯 싶어 생략하고자 한다. 티티리스 등정후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루째른을 잠시 관광한 후 이태리로 향하게 되었다. 

(요그서 부터는 더 유심히 보셔야 함다~!!  :) )
전체일정 7박 중 기내 1박을 제외하면 유럽에서의 숙박은 실지로 6박인데 그중 3
박은 이태리에서 하게 되어 있는 만큼 유럽관광의 주요국가가 이태리였다. 이태리
의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로와 아주 흡사했다. 고속도로 양 옆의 집들
이나, 논, 나무, 산 등의 모습들이 우리나라의 그것들과 너무 비슷하여 마치 한국
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태리 관광의 첫 도시는 세계패션과 이태리 경제의 
중심지인 밀라노였다. 현지관광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면 이태리는 1인당 국민 총
생산이 2만불을 넘는 수준이지만 북부와 남부의 경제력을 비교해 보면 남부는 오
로지 로마와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관광수입 밖에 없어 북부의 경제력으로서 남부
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밀라노, 피렌체를 중심으로 이태리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자는 운동이 지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밀라노를 방문하는 
날 마침 이태리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베르사체가 피살당한 날이어서 밀라노 
뿐만이 아니라 이태리 전체가 들끓고 있다고 현지가이드는 전한다. 패션의 중심지
답게 밀라노에는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의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밀라노
에서 1박을 한 뒤 단테의 고향 피렌체를 거쳐 드디어 세계문명의 발상지중의 하나
라 할 수 있는 로마에 도착하게 되었다. 스위스에서 로마까지 차량으로의 이동시
간을 더해보면 모두 11시간정도가 소요된 만큼 강행군이었다. 로마는 실제적으로 
보면 2개 국가였다. 로마안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바티칸 시국이 있었다. 카
톨릭교의 총 본산인 바티칸 시국은 약 400KM 크기의 나라로서 하나의 대도시라고 
불려도 좋을 만한 작은 국가였다.(그곳에서는 화폐도 따로 사용되고 있었고 그나라
에 들어오는 정보는 CIA보다 더빠르다고 한다.) 하지만 교황이 계신 곳이고 카톨릭
의 총 본산지다운 유적들이 즐비하여 전세계의 방문객들과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라였다. 바티칸 시국을 들어가는 입구는 줄지어 선 사람들로 인하
여 근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카톨릭의 총 본산지답게 웅장한 성당들과 2000
년전에 세워진 많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백미는 역시 성 시스티나성당
과 성베드로 성당이었다. 르네상스시대를 풍미했던 천재예술가 미켈란젤로의 대역
작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벽화가 그려져 있는 성 시스티나 성당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그 불세출의 그것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음직한 그 대작들은 성시스티나 성당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주인공들이었다. 천정에 그려져 있는 "천지창조"를 완성하고 미
켈란젤로가 목이 구부러지고 얼굴인상이 찌그러졌다고 할 만큼 그림에 전혀 문외
한인 내가 보기에도 그 작품들은 대단한 것이엇다. 다만 비디오와 카메라 촬영이 
금지된 것이 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성 시스티나 성당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향한 
곳이 세계에서 가장 큰 베드로 성당이었다. 약 120년에 걸쳐 공사를 완성했다는 
이 성당은 교황선출을 하는 중요한 성당이며 교황께서 직접 미사를 주관하는 장소
로서도 유명하다. 이 성당의 높이는 약 50M 정도였고 전체길이도 300M정도가 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잇었으며 내부 전체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잇엇
다. 또한 성당내부의 삐에타를 비롯한 유명한 조각상들과 아름다운 디자인등이 곳
곳에 드러난 거대한 위용의 대성당 이었다. 참으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엿다. 교
황께서 미사를 주관하시는 그 자리가 약 2천년전 베드로성인께서 카톨릭을 전파하
시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 순교한 바로 그 장소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탄성을 지르고 하는 동안 유럽관광은 벌써 5일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우리가 사진으로 낮이 익은 콜롯세움과 기독교 박해시절 기독교인들이 기거했던 
카타콤베(지하묘지)를 관광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곳도 많이 관광하였지만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될 듯 싶다. 로마의 유적지중 가장 기억에 남는곳은 카타
콤베였다. 콘스탄티노풀 대제가 서기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기독교인들
이 그 박해를 피하여 지하로 숨어들어 약 250년간 생활했던 곳이 카타콤베였다. 
카타콤베는 미로로 이루어져 있어 안내자가 없이는 그 출구를 찾기가 불가능할 정
도로 어둡고, 좁았다. 지하로 들어가보니 공동으로 미사를 드리는 평방 30M정도의 
공간이 하나 있었으며 그 공간 뒤쪽으로 옛날 사람들의 집이라 할 수 있는 미로가 
나 있었다. 미로를 따라가는 양 옆 벽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들이 수없이 나 
있었다. 이 구멍들이 여기에서 기거했던 사람들이 죽으면 그 시체를 이구멍속에 
눕혀놨다고 했다. 한사람 한사람 죽을때마다 미로를 파고 구멍을 파고 한 것이 지
금의 타타콤베를 형성하게 되었다한다. 카타콤베의 크기는 엄청나다. 그예로 2년전 
신혼여행을 온 일본인 부부가 안내인 없이 이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이 안에
서 시체로 발견된 이후에는 깊은곳은 가지 못하게 군데군데 막아놓았다. (일본관광
객들은 그후로 로마를 와도 카타콤베는 관광에서 뺀다고 한다.)미로를 따라 걸어가
는 동안 곳곳에 그 철망들을 볼 수 있었다. 파여진 구멍 속의 유해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시켰기 때문에 지금은 그 유해가 들어있었던 구멍들 밖에는 없었지만 
그 구멍들을 보는 우리들의 기분은 이상하였으며 미로 전체에 작고 푸른 불빛들이 
즐비했는데, 그 빛들은 오랜 세월 쌓인 인광들이라고 한다. 이렇게 빛한줄기 없고 
시체가 즐비한 곳에서 그당시 기독교인들은 250년간 살았으며 기쁨에 겨워 매일 
저녁 찬양가를 부름으로 인하여 미로 전체가 온통 찬양가로 메아리 쳤다고 한다. 
종교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실감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시절의 그 
순수하고 위대했던 종교의 힘이 요즘 일부 타락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고 그 힘
이 잘못 쓰여지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종교인들도 참 반성할 점이 많지 않은가 
생각을 해 본다. 로마에서 파리까지는 비행기로 이동하였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알프스 산맥의 위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수십개의 고봉들과 그 고봉들을 뒤덮
고 있는 만년설과 전체를 휘감고 있는 구름들은 나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대하는 
거대한 대자연의 위엄이었다. 그 대자연을 넘어 우리는 파리에 도착하여 관광일정
을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파리는 역시 그 명성에 걸맞게 아
름다운 도시였다. 파리 전체가 중세 유럽풍의 건물들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도시가 깨끗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에펠탑 위에서의 파리 모습은 참으로 아
름다웠으며 센강을 유람선을 타고 순회하면서 보는 센강 주변의 밤 풍경들은 너무
나 낭만적이어서 그 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씨는 다소 쌀
쌀하엿으나 와인을 한잔 곁들인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더할 나위없이 행
복해 보였다. 그리고 고호, 고갱, 모네등 유명한 인상파주의 화가들이 가난했던 시
절에 주로 생활했떤 몽마르뜨 언덕에 올라보니 지금도 가난한 길거리 화가들이 즐
비어 있엇다. 물론 그것이 그 이전의 환경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옛날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언덕 주변의 길거리 풍경은 참으로 낭만적이었
다. 아름다운 파리도시의 풍경을 가슴에 간직한 채 우리는 런던으로 가는 TGV 유
로스타 열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처음이자 어떻게 보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TGV에 타보니 명성그대로 좋은열차인 듯 싶었다. 달리는 도중에 흔들림이 거의 
없었으며 소음이 전혀 없었다. 특이한 것은 가는 방향을 보는 좌석과 지나간 방향
을 바라보는 좌석으로 구분이 되어 좌석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취향에 맞게 앉
게하기 위한 배려같았다. 영국을 접어들자 마자 흐린 날씨 속에 비가 오기 시작했
다. 영국의 그 우중충한 날시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런던 여행은 한마디로 별로였
다. 런던시내의 밤거리를 나가보았지만 지저분하고 특색이 없었다. 그리고 길거를 
오가는 사람들도 다소 과격하고 정신이 없어 마치 미국의 못사는 동네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유럽에서의 마지막 관광일정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
를 한 번 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생각을 하면 그 나름대로의 의미도 
있는 듯 싶다. 좋은것만 볼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 유럽여행을 돌이켜 보면 참으
로 강행군이었다. 5일째부터는 버스에 타기만 하면 졸음이 올 정도로 피곤했다. 그
렇다고 해도 한 번은 꼭 가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이 
눈을 감으면 떠오르고 파리의 낭만적인 모습들, 로마의 그 엄청난 유적들을 떠올
리면 이 여행이 값지고 보람된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여유있는 
생활환경과 태도는 우리에게 현재는 없는 것이어서 그것이 부러웠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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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삶의 어느 순간 하늘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보라. 그러면 그대의 숙인 
머리 위로 내려오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리라. 그럴 때 그대 더 깊이 숙여 
차라리 쓰러져 보라. 그대를 포근히 껴안아 품는 하느님의 가슴 그 체온을 느끼리라.
또는 삶이 괴로울 때 가슴을 열고 홀로 조용히 울어보라.속으로 흐르는 눈물은
이제껏 흐렸던 하느님의 모습을 그 먼지를 깨끗이 닦아 씻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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