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9일 일요일 오후 01시 51분 11초 제 목(Title): 김태희/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얻은 지혜 출처: 오마이 뉴스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얻은 '지혜' 김태희 기자 uzsjxd@uni-bonn.de ▲ 도나우 강변의 레겐스부르크 지난 여름 필자는 휴가다운 휴가는 가지 못했지만, 어느 주말을 이용하여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크에서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그 어느 휴가 때보다도 알찬 휴식을 취하고 왔다. 레겐스부르크는 바이에른 주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바이에른 주가 대체로 그러한 것처럼 레겐스부르크 시민들도 가톨릭을 주로 믿으며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기차에 타자마자 바이에른으로 가고 있다는 실감이 난 것은 열차 승무원이 독일 표준어인 구텐 탁(Guten Tag!) 대신에 바이에른 인사말인 그뤼스 고트(Gruess Gott!)를 구사하는 것을 들은 후부터이다. 도나우 강이 가로지르는 레겐스부르크는 독일에서도 전통이 깊은 고도시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나우 강 다리가 놓여져 있기도 한 이 도시는 로마 시대의 주요 도시여서 당시의 유적지가 도시 곳곳에 남겨져 있으며, 또한 중세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그 의회가 열렸던 시청사 앞에는 당시 제국의회 사절단들이 방문했다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작은 카페도 있다. 레겐스부르크 시와 제국의회 청사를 안내하는 코스에 참가하면서 흥미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많이 듣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필자의 주말 여행 중 가장 인상깊던 기억은 이러한 역사적 지식의 습득이 아니었다.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한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9시에 나는 레겐스부르크 중앙 성당에서 거행되는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레겐스부르크 성당은 매우 장대한 건축물로서 특히 유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와 소년 합창단으로 유명하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필자가 미사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명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레겐스부르크 소년 합창단은 '성당 참새(domnspatz)'라고 부른다. 이런 별칭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빨간 색과 흰 색의 제복을 입고 지휘자의 손놀림에 따라 일제히 입을 뻐금거리는 귀여운 꼬마들은 정말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참새들처럼 보여,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 잘 지은 별명이다 싶었다. 명불허전! 이들의 아름다운 합창을 들으면서 제단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바라보니 어느 순간 필자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신자인 필자가 이럴진대 정말 믿음 깊은 신자들은 어떠할까? 늘 느끼는 것이지만, 미사는 정말 제사처럼 보였다. 신에게 드리는 장엄한 제사. 그러나 필자에게 정말 감명 깊었던 것은 이러한 음악과 건축과 미술과 종교 제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다음 이어진 사제의 설교였다. 신부는 독일의 어느 커다란 성당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의 상단부는 구약의 천지창조를 다루고 있고, 그 다음에는 신약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천지창조와 같은 엄청난 규모와 의미의 이야기 바로 다음 위치에 '작고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놓고 있다는 것은 중세 기독교가 이미 이 이야기의 중요성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기독교의 중심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의 정신'이 없다면(신부는 사랑이 아니라 연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천지창조와 같은 신의 대역사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 사제는 그렇게 물었다. "여러분께 매우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 마음 속에 곧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것은 누구입니까? 가십시오. 이 미사가 끝나면 그에게 가서 손을 내미십시오." 나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종교가 우리 사회에 어떠한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깨달았다. 지난해 여름 한국을 일시 방문 중 서강대학교의 독일 철학자 초청 강연회에 들른 적이 있다. 클라우스 헬트라는 이 유명한 현상학자는 문화 간의 교류를 주제로 한 강연 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나타나듯 자신과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기독교에서 중심적인 것이며, 유교의 인(仁)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슬람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이 분명 옳지 못한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이슬람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이러한 '연대의 정신'이 없이, 신도가 수십 명에 불과한 신흥종교를 넘어서 수 억 인류의 세계 종교로 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헬트 교수는 기독교적인 기준에서 보아 그러한 정신이 이슬람에는 없다고 한 것이겠지만, 이는 또 다른 의미의 편협한 서구 중심주의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과 관련되어 이 날 레겐스부르크에서 들은 설교는 필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세속적이고 비종교적 사회에서 '연대'라는 사회 윤리는 대체 어떠한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일까? 기독교인에게 성경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은 그 자체로 권위로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 아닌 많은 현대인들에게, 아니 그런 모든 것을 떠나서 바로 필자 자신에게 어떻게 연대의 정신은 '설득'될 수 있을 것인가? 독일에서 가장 보수적인 바이에른 지역의 가톨릭 사제로부터 이러한 연대의 화두를 받을 줄은 미처 몰랐다. 필자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끊임 없이 성호를 그으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고, 그 옆 할머니는 무릎이 아픈지 무릎을 꿇는 일은 삼가고 있었다. 이 노부부는 이 설교를 들으며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성당 앞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성당 입구에서 구걸하는 걸인이 한 명 있었는데 성당에 들어갈 때는 아무도 돈을 주지 않다가, 미사를 마치고 나올 때는 많은 사람이 돈을 주더라고... 그래서 필자는 성당 안에서 들은 설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