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4월 14일 화요일 오전 02시 53분 29초 제 목(Title): [불교신문]다종교시대의 불교0 불교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를 어떻게 볼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 2. 포용적 관용 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데, 지금 보드에서 논의 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고, 불교신자가 아니더라고 도움이 될거 같아서 퍼왔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 번호 : 7/23 입력일 : 97/05/12 17:36:45 자료량 :118줄 제목 : (특별기획) 다종교시대의 불교0 부처님이 탄생할 무렵 인도의 사상계는 매우 복잡했다. 沙門이라 불리우는 사상가들이 대거 출현, 전통 브라만 사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우주.인생관 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물질적인 요소로 보고, 이 요소들이 취합하여 자 연과 인간의 모든 것을 성립시킨다"는 공통된 기반위에 서 있었던 대표적인 신흥 사상가들을 原始經典은 六師外道라 부르고 있다.부처님은 이렇게 여러 사상이 혼재된 사회에 태어나 종교적인 방황을 겪으면서 성장하였다. 진지한 구도의 길에 나서 마침내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 그것을 전인류를 향해 설하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브라만과 육사외도 사상에 적지않게 영향 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확연히 다르면서 보편적인 가르침을 확립, 전파했다.사상 이 혼재했던 시기에 태어나 불교를 정립했던 부처님이 만약 "종교의 백화점 "이라 불리우는 지금 우리 사회에 다시 탄생한다면 어떻게 할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종교간의 만남은 불가피할 뿐아니라, 특히 다 종교 사회에서 종교대화가 바림직한 양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이는 누 구나 품는 의문일 것이다. "기원전 6세기경의 인도보다 많은 사상.종교가 존재하는 현재 한국에서 불 교의 정체성을 확립.전파하려면 무엇을 해야할까"라는 화두는 우리에게 많 은 가르침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먼저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강조할 것이다. 육사외도 등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에 부처님이 정통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쉽게 이해된다. 또한 "무지에서 오는 배타성"을 항상 경계해온 여러 가르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부처님은 "오직 나의 종교만이 유일한 길 이라는 진리에 대한 독단, 즉 法執을 경계했을 것"이다. 신앙인이 자기 종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사상을 무시하는 독단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 다. "교법을 배워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 이 아니다. 하물며 법아닌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중부> "蛇喩經", <금강경> "정신유희분")는 가르침에서 이것은 잘 나타난다. "하나의 사물(하나의 관점)에 집착해서 다른 것들(관점)을 열등하다고 멸 시하는 것,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족쇄라고 부른다"(<經集>), "비구들이 여 명확하고 분명한 관점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고 애착하여 달라 붙는다면 내 가르침이 강을 건너면 놓아 버려야 하는 뗏목과 같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중아함경>)이라는 가르침 등에서도 확인된다. 한편으로는 "언어와 논리의 겸손"을 강조할 것이다. 모든 종교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교의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온전하게 드러내기에는 언어 와 생각, 논리는 너무나 빈약하고 무력하다. 참마음의 세계는 言不可說하기 때문이다.무분별한 타종교의 공격에 대해 부처님은 관용의 자세를 견지하라고 할 것이다. 즉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해 차원높은 대응을 하라고 강조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관용은 본질적인 것을 말한다. 마지못한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 입각한 관용의 자세를 견지하라고 할 것이다. 불교 를 국교로 정하고 각국에 불교를 전파한 아쇼카왕이 남긴 다음의 말에서 이 를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은 존경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경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의 신앙을 높이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이의 신앙에 봉사할 수 있다. 만약 그같이 실천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해칠 뿐만아니라 또한 다른 이의 신앙도 해친다. 왜냐하면 만약 신앙의 이름으로 또 자기 신앙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스스 로의 신앙을 높이고 다른 이의 신앙을 비하한다면 그는 반대로 그 자신의 신앙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용은 오랜 전도의 역사속에서도 예를 찾을 수가 있다. 육파철학 과 대립이 극심했던 5세기경의 인도에서 불교가 새로운 논리학(因明學)을 발전시킨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대립을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타개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중국에 전해져서는 도교와 유교에 대해 투쟁이 아닌 교섭관계를 유지 했으며 중국인의 사유방법에 맞는 새로운 불교사상을 발전시킨 것도 전형적 인 보기다. 불교의 이러한 포용적 관용성은 현대에 다시 되살려 져야할 전통인 것이 다.外道들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에서도 관용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중아 함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자신의 교설에 승복하여 제자기 되기를 원하는 유명한 외도에게 서두르지 말고 다시 고려해 보길 원한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조했다. 그래도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자 부처님은 그가 이전에 모시던 외도의 스승을 계속해서 존경하고 받들어 모 실 것을 당부한다.반면 이같은 관용이 진리에 대한 포기는 결코 아니다. 원 효스님의 화쟁은 관용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깨닫게 해준다. "말 그대로 들으면 모두를 용서할 바 못되지만, 뜻을 살려 이해하면 모두 용서하지 않는 바가 없다" 즉 "진리와 절대성을 부르짖는 숱한 말들 속에 숨겨진 말 그대로의 허점을 지적하는 것은 지적인 면이요, 그 뜻을 이해하 는 것은 정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화쟁은 이같이 지와 정의 전인적인 조화속에서 다같이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화쟁과 관용의 논리는 불교가 타종교에 대해 개방적일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현재의 다종교 상황에서 불교가 의미있는 자기 영역 을 확보하고 나아가 불성의 절대 진리성을 밝힐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관용을 견지하면서 불법의 불멸성에 대한 확신에 가득찬 호법과 호교의 의지 또한 갖추어야 할 것"이다. 특히 보살행을 널리 펴면 이 의지는 더욱 진실성을 공인받게 될 것이다. 한편 후기산업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특성을 확립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 여야 한다. 산업사회의 성격에 대한 서구 사회과학이 얻어낸 중요 성과인 소외론을 단서로 해방신학을 도출해낸 기독교의 역사적 체험은 불교에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런 자기성찰이 무소유사회의 전형인 원시근본불교의 승가공동체를 물질 만능의 현대에 다시 되살리는 계가가 되게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불의한 폭력에 맞서는 折伏의 개념을, 정당한 권위에 대한 攝受의 태도와 짝하여 불교의 대사회적 태도를 균형되게 하는 것도 새롭게 정립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趙炳活 기자> <발행일(1625호):1997년 5월 13일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