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aDA ] in KIDS 글 쓴 이(By): Dooly (넬로섭머린) 날 짜 (Date): 2001년 5월 13일 일요일 오후 01시 01분 30초 제 목(Title): [퍼온글]캐나다드림의 빛과그림자 3 캐나다가 요구하는 인간형 캐나다는 2001년 G7국가 중 가장 높은 생산성(2.9%)과 경제성장률(3.7%)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되며 지난 10년 이래 가장 낮은 이자율, 실업률, 물가인상률(연 1.5%)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늘 만성적 적자에 허덕이던 연방정부의 예산이 오히려 2001년에는 기록적인 흑자를 낼 것이라고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제호황의 체감효과를 제조업이 아닌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대다수 한인들은 거의 느낄 수 없으며 오히려 유학생과 모국 방문객을 상대로 하는 교민들의 각종 업소들은 캐나다경제보다 한국경제의 등락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캐나다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일 안해도 전혀 생계 걱정이 없는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특히 기업이민은 캐나다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를 한명 이상 고용해야 영주권 조건을 딸 수 있기 때문에 2년 안에 어떤 사업이든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캐나다 이민자들이 주로 토론토나 밴쿠버 같은 대도시로 몰려들고 언어장벽과 현지 시장정보의 미숙 때문에 결국 동네의 코너스토어·한인식당·한인식품점 같은 교민 상대 업종들이 늘어나고 이런 집중은 필연적으로 교민들 사이에 ‘소경 제 닭 잡아 먹는’ 과당경쟁을 일으키게 된다. 어느 동네에 장사가 잘된다 싶으면 길 건너 혹은 바로 옆에 똑같은 가게를 열어 이윤의 저하와 극도의 신경전을 벌이다 서로 사이좋게 망하는 꼴을 많이 보았다. 캐나다는 창의력으로 승부를 거는 사회다. 그런데도 한국 이민자들은 독창적인 사업을 시작하기보다 늘 교포들 중 누가 돈 잘 버나를 염탐하고 똑같은 모방을 시작한다. 나이 들어 이민한 기성세대들은 영어라는 장벽 때문에 직장도 사업도 안된다고 투덜대지만 말만 잘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님은 한국이나 캐나다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창의력의 빈곤이지 반드시 언어장벽만은 아니다. 캐나다로 한국인들의 본격적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60년 후반부터 1970년대 서독에 파견되었던 광부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이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 또한 영어를 거의 못했으며 더구나 오늘날 같은 정착된 교민사회도 없어 정작 모방하려고 해도 모방할 것이 없었다. 요즘의 사업이민자들처럼 돈을 가져간 것도 기술이민처럼 숙련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정말 허허벌판에 놓인 막막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한국인들의 억척같은 근면성은 대도시의 코너스토어들을 석권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들의 수입은 어떤 전문직종 못지 않은 고수입이어서 캐딜락이나 벤츠 같은 고급차에 웬만한 백인들도 엄두를 못내는 고급주택들을 구입하는 성공들을 거두었으나 계속 밀려 들어오는 한국이민 행렬들이 모두 똑같은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대형 체인스토어들이 등장함으로써 코너스토어의 전성기를 앗아가 버렸다. 이들이 과연 당시 영어를 잘해 돈을 벌었던 것일까? 중국인들 역시 영어를 잘못하면서도 캐나다에서 가장 인기있는 외식산업을 장악했다(캐나다인들은 가족과 함께 외식할 때 가장 인기있는 음식으로 중국음식을 든다). 확실히 서울에서 맛보는 중국음식은 매운 반면 토론토에서 맛보는 중국음식은 달고 시금털털해 확연히 틀리다. 중국인들은 어느 나라를 가든 먼저 현지인들의 입맛을 조사하고 그에 맞게 메뉴와 맛을 재창조하는 반면 한국식당들은 여전히 한국에서 했던 재래적 방식에서 조금도 탈피하지 않는다. 실제로 북미에는 순수한 한국식당이 없다. 일식이 유행한다니까 거의 대부분 스시바를 곁들인 일식·한식(대다수 식당 간판을 아예 Korean & Japanese Restaurant 으로 써 붙인다) 겸용 식당이며 심지어 중국요리까지 혼합한 동양 3국 짬뽕 식당들뿐이다. 이처럼 몰개성적이며 비창의적인 매너리즘이 한국식당들을 지배하는 한 주 고객은 여전히 교포·유학생·모국의 관광객들이나 끌어들일 뿐 현지인들을 끌어들일 수 없다. 사실 우리 고유 음식 중 불고기·갈비·각종 튀김·잡채·만두 등은 언제나 서양인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데도 왜 경쟁력을 가진 브랜드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일까? 음식장사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맛과 서비스로 승부를 거는 사업이다. 캐나다는 무한정 넓은 나라이며 그만큼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도 이민자들이 파고들만한 구석은 수없이 널려 있다. 그러나 창의력은 없으면서 단숨에 그리고 편안하게 돈을 벌려고만 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도착해서 몇개월 영어 배우고는 늘상 한국신문 읽고 한국TV 보고 한국인들의 게토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런 기회나 구석이 보일리 없다. 인류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다 캐나다가 원하는 인간형은 놀고먹는 유한귀족이 아니라 숙련된 노동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인간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캐나다는 이러한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유인책을 쓴다. 쿼터제가 있는 미국의 이민정책과 달리 캐나다는 숙련된 노동력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자나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술자들에게는 최단시일 내에 비자를 내준다. 이민심사관은 교육·기술·직장경험·나이·언어능력 등을 각각 점수로 환산해 기업이민(entrepreneurs)이나 투자이민(investors)은 87점 만점에 25점, 독립이민(기술이민)은 127점 만점에 70점 이상이면 허락한다. 쉽게 말해 젊고 대학 졸업자이고 캐나다가 필요로 하는 학력과 숙련된 현장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돈 한푼 안 가져가도 쌍수로 환영한다. 참고삼아 학력과 기술도를 합쳐 계산한 점수(ETF)를 보면 농업·컴퓨터·조경·응용화학·우주항공·광산업 관련자와 심리학자·역사학자·정치학자·지리학자·수학자 등은 최상급인 17~18점을 받는 데 비해 단순 사무직종이나 이발사·작가·세탁업자·사진사 등은 1~2점을 넘지 못한다. 최근 방영된 KBS의 몽골리안루트에서 보듯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이주와 모험으로 점철됐다. 우리의 직계조상들이 본래 한반도에서 산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듯 미래의 인류도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이주를 감행하게 될 것이다. 1985년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인 미국의 레이건(Reagan) 대통령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역시 아일랜드 이민 2세인 당시의 캐나다 총리 브라이언 멀루니(Brian Mulroney)와 손을 맞잡고 아일랜드인들의 애창곡(When Irish eyes are smiling)을 합창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유럽 본토는 소국에 불과하고,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북미에서 영국인들로부터 온갖 천대와 박해를 받던 그 아리리시 후손들이 지상의 최강국들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되어 자기 민족의 애창곡을 함께 부르는 것을 지켜보던 북미의 직계 및 방계 5,000만명의 아이리시 후손들은 실로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캐나다는 이민자의 나라이며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꿈과 기회를 찾아 몰려오는 땅이다. 이 땅으로 건너간 최초의 이민자는 백인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먼 선조인 몽골리안들이 1만2,000~2만년전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서로 연륙(連陸)이 되었을 때 건너갔으며 1,000년 전에는 바이킹들이 몰려왔으며 현재 캐나다인들의 다수를 점하는 영국계나 프랑스계는 고작해야 대부분 200~300년 전에 이주했을 뿐이다. 백인들이 신세계에 대한 진취적 탐구와 모험정신으로 광대한 북미와 남미·호주·뉴질랜드 같은 엄청난 넓이의 대륙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유럽은 인구폭발과 자원고갈을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주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며 민주주의 국가는 어느 누구도 이 권한을 제한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전세계에 흩어진 화교들이 중국경제의 세계적 창구 역할을 담당했듯 현재 전세계에 널려 있는 570만명의 한국 교포들이야말로 주식시장의 등락과 관계없는 가장 안전한 한국의 해외자산이자 투자다. 폐쇄적 국수주의를 고수하다 보면 세계화의 물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며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를 과감하게 탈피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