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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aDA ] in KIDS
글 쓴 이(By): uksoo (cableman)
날 짜 (Date): 1998년04월07일(화) 05시05분33초 ROK
제 목(Title): Cap] Sovereignty in Quebec

캡쳐:

 [ canaDA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날 짜 (Date): 1998년04월05일(일) 15시23분31초 ROK
제 목(Title): Sovereignty in Quebec



캐나다는 크게 나눠 영국계와 프랑스계 사람들이 건설한 나라이다. 원래
프랑스가 먼저 캐나다땅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나, 나중에 캐나다땅에 정착
하기 시작한 영국인들에게 밀려 결국은 대부분의 땅을 영국인들에게 빼앗
기게 되고, 그들 프랑스 인들의 영토는 지금의 퀘벡주와 동부 온타리오일부
그리고 노바스코시아, 뉴브른스윅의 일부지역으로 좁아지고 말았다. 캐나다
식민지 시대의 영불 두나라간의 분쟁의 역사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퀘벡의 독립에대해 최근
몇십년간의 사실들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개척시대에 영국인들에게 그들이 먼저차지한 영토의 대부분을 잃게된 프랑스
인들은, 철저하게 배척받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도 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2등시민대접을 받았으며, 모든 경제권은 영국계 사람들이 거머쥐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의 후예들은 그 자존심강한 프랑스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왕을
그들의 국가 원수로 모셔야 했고, 또 그 영국왕앞에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나라사람들이 옛날에 시베리아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무력이 강한 일본인들이 나중에들어와서, 무력으로 우리가 차지했던 땅을
빼앗고
그들의 전통을 유지한 국가를 그곳에 세우고, 한국인들의 후손들에게도 일본
천황
을 국가 원수로 모시며,그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한다면 어떠했을까?
이런식으로

퀘벡인들의 독립운동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보다쉽게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독립
운동을 이해 할수있을 것이다. 이것에 더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캐나다
연방이
성립된후에, 사회에서 여러모로 영국인들에게 차별을 받아왔다.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정부나 국영기업체들이 단지 그들이 불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고용하기를 회피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국인들 밑에서
막일정도 
였다고한다. 물론 모든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그런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그런 사회분위기속에서 철저하게 차별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지금까지 고집하고있고, 최근에와서는
더욱더 
고집스럽게 불어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와중에, 1960년 퀘벡에서는 자유당이 퀘벡주에서 정권을 잡게되었다.
이때의 
주수상인 쟝 르사지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서서히
혁신적인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우선 르사지는 주정부관할의 산업경제에
연방정부의 
간섭을 줄임으로서 주의 권한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퀘벡주내의
혁명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게되었고, 이것이 최근의 
퀘벡분리주의로서 퀘벡만의 독립국가를 염원하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된
것이다. 
이당시 있었던 재미 있는 일화중에, 프랑스의 드골이 캐나다를
방문하게되었는데, 
캐나다 연방의 수도인 오타와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라 퀘벡주에서
제일 큰 
도시인 몬트리올을 처음으로 방문하게되었다. 이때 대중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게되는데,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Vive le

Quebec!!" (퀘벡만세) 즉 퀘벡내에서 서서히 일고있던 분리주위에 기름을
붙는
것과 같았고, 이로인해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지금도 그말을 자주
외치곤 
한다. 이런 드골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캐나다 연방정부에서는 마침내
드골에게 
출국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로 프랑스와 캐나다는 껄끄러운 관계를
유기하기도 
한다. 1960년대 초기 몇몇 분리주의자들은 주의원선거에 출마하기도 하고 
퀘벡해방전선은 분리주의를 가속화 시키기 위해 연방정부건물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1963년 캐나다 연방정계에 미국에서의 국토방위용 미사일 도입을 놓고
논쟁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때 정권을 잡고있던 보수당은 야당인 자유당의 반발을 
무마하기위해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고, 끝내는 선거를 통해 그당시
자유당을 
이끌고있던 레스터 피어슨이 수상이되게된다. 그는 여러 가지
사회보장제도의 
혁신을 시도했고, 국민연금과 국민 의료보험제도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때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캐나다의 국기, 즉 빨간색 단풍나무잎이 그려져있는 
캐나다연방의 국기를 제정하였다. 

1968년 피어슨이 사임하고 유명한 삐에를 트뤼도가 수상이 되었다. 그는
48세 
총각으로 수상이 되었고 인기가 아주 좋았다. 그는 프랑스계후예로는 세
번째 
연방수상이었다.연방주의자인  트뤼도는 퀘벡의 분리주의를 약화시키고자
노력했고, 
불어사용자나 영어사용자에게 동등한기회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Official 
Language Act(공용언어법)을 의회에 상정하여 통과시켰다. 이법은 그 지역에
최소한 
10%의 불어사용자가 있으면 그지역의 공공기관은 영어와 불어를 대등하게
사용해야 
하고, 모든 공문서와 광고에데 두언어가 똑같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법이다.
물론 
불어사용지역에 있어서 영어도 동등하게 취급되어져야만 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공공기관에서나 기타 상품등 여러 곳에서 영어와 불어가
동등하게 사용되고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후 트뤼도는 영국의회로부터

캐나다헌법을 가져오게되는데, 그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하겠다.

이런 와중에 1976년 퀘벡에서는 르네 레벡이 이끄는 Parti
Quebecois(퀘벡당)이 
정권을 잡게된다. 그해는 우리나라가 최초로 올림픽에서 양정모가 금메들을
딴 
몬트리올 올림픽이 열린 해이기도 하다. 르네 레벡은 집권하자마자 퀘벡내 
공식언어를 불어만으로 사용하는 법을 정하게 된다. 그래서 퀘벡내 모든
상점의 
간판들은 영어대신 불어로만 표기하게되었으며, 도로표지판도 불어로만 
표기하게되었다. 여러분이 퀘벡을 자동차로 여행하시려면, 최소한
동서남북과 
요일정도는 불어로 알아둬야 길을 찾고 또 주차딱지를 떼지 않을 것이다.
이법은 
강력하게 시행되었고 오늘날 까지 유지되고있어 퀘벡은 그야말로 북미에서
언어
의 섬이 되고 말았다. 퀘벡으로 이민오는 모든 사람들의 자녀는 불어학교에
입학을 
해야하고(고등학교까지. 대학은 자유임), 이민자가 정착을 위해 불어를
배우고자 
하면 무료로 교육도시켜주고, 또 불어를 배우는동안에는 생활비까지
주정부에서 
지급한다. (참고로 여러분들 중 퀘벡주에있는 불어계통의 대학으로 유학을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면 한국과 퀘벡주정부간의 협약에의해 학비를
캐나다주민수준 
으로 면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으니 알아보시기 바란다.)
이에 대해 퀘벡의 독립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계 캐나다인들의 자본이 퀘벡을

서서히 떠나게 되었고, 그로인해 그때까지 유리한 입지조건과 비교적 풍부한

노동력등으로인해 번영을 구가하던 캐나다 제일의 도시이었던 몬트리올은 
토론토에게 그영화를 물려주게 되었고, 몬트리올에비해 작은 도시이던
토론토의 
번영이 시작되었다. 

너무 길푬 沮測� 간단하게 95년도에 있던 퀘벡분리를 위한 국민투표얘기를
하고 
마치겠다.

95년에, 퀘벡에서는 퀘벡의 독립을 위해 퀘벡주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빠르띠 
퀘벡쿠아(퀘벡당)를 이끄는 쟉 빠리죠와 연방정계에서 블록퀘벡쿠아당을
이끌던 
루시엥부샤(현 퀘벡수상)이 함께 퀘벡의 독립을 위해 뛰었다. 이에 캐나다 
연방정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연방 집권당인 자유당과 수상인 쟝
크레치엥, 
그리고 보수당의 쟝샤레 등 연방주의자들도 퀘벡주의자유당의  다니엘존슨과

연합하여 퀘벡독립을 저지하기위해 뛰기 시작했다. 이당시 많은사람들이
퀘벡독립이 
이루어질것이라 예상을 했고, 또 국민투표의 결과는 개표가 시작되고
서 끝날때까지 엎치락 뒤치락하며 50대50을 유지하다가, 개표가 완료ㄷ는데,

결과는 아주 적은 마진으로 독립이 부결되었다. 결국 퀘벡의 독립을위한
시도는 
또다시 무산되었고, 이후 쟉 빠리죠는 주수상직을 사임하고 야인으로
돌아갔으며, 
연방정계에서제일야당의 당수로 활약하던 현 퀘벡수상인 루시엥부샤가
퀘벡주의 
수상에 취임하게된다. 

루시엥부샤라는 사람이 퀘벡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뛸 때, 갑자기
한쪽다리를 
절단하는 비운을 겪게된다. 당시 세계를 공포에 떨게했던 살파먹는
박테리아에 
감염이 되었는데 응급조치가 늦어져서 결국은 한쪽다리를 (허벅지아래)절단
하기에 
이르렀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당시 몬트리올의 맥길대학(영어대학) 
의대부속병원에서 치료를 하려고 하였으나, 루시엥부샤는 굳이
프랑스계병원이 
셍룩병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의족을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불구자가 
되었다. 이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데,퀘벡독립을
저지하려는 
신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얘기에서부터, 한쪽다리를 절단하게된
루시엥부샤를 
빈정거리는 낙서에 이르기까지 큰 화제거리가 되었었다. 최근엔, 퀘벡의
독립을 
퀘벡주 주민이 독자적으로 결정할수있느냐에대해서 연방정부 대법원에서
재판을 
하게되었는데, 이런 사실을 보며, 나는 민족주의적인 분리운동도
법테두리안에서 
정당성을 부여 받으려는 캐나다인들의 태도에 의아하기까지 했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오늘은 여기서 줄일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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