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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nSei ] in KIDS
글 쓴 이(By): Athena (유니콘)
날 짜 (Date): 1997년06월15일(일) 22시24분24초 KDT
제 목(Title): [연체춘추] 문명간 장벽 허물기 


  기획탐구 - 인류와 문명

  미분화되어 있는 다양한  문명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살펴
본다

  자본주의에 의해 세워진 문명간 장벽 허물기

  제문명간 최소한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세계적 연대운동으로 눈
을 돌리자

                                                 김준수 기자

  ‘사람의 지혜가 깨서 자연을 정복하여 사회가 물질적·정신적
으로 진보된 상태’.  ‘문명’에 대한 사전상의 설명이다. 물론
이것이 문명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는 ‘진
보’라는 개념으로서 이미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
다. 어원적으로 따져 보자면 문명, ‘civilization’이란 도시화
를 뜻한다. 즉, 조직화·통합화가 문명의 특징이다. 이것은 ‘경
작’에서 유래한 ‘문화, culture’와  비교할 때, 더욱 쉽게 다
가올 것이다. 과거 독일  역사철학자들은 문화를 인류 유산의 정
신적 측면, 문명을  물질적 측면으로 구분했으나, 이는 ‘도시혁
명’ 이후 사실상 문화가  문명과 병존해 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미 적절성을 잃고 있다.  따라서 문명에 대해 굳이 정의하자면
‘문화의 한 발달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문명은 지금
까지 ‘인류가 진보해온 길’  전부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문명’의 정의를  가지고 요즈음 사학계에 등장하는 ‘
문명’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면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4대  문명으로 시작되는 문명의 발생과  그 이후의 중
세, 근·현대 문명까지의 문명 발달사를 살펴보는 역사학적 접근
방식과 현대의 제문명들을  각각의 문명권으로 나누는 방식이 있
는데, 이 두 연구  형태를 각각 통시적, 공시적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하버드대 교수인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이라
는 글에서 탈냉전 시대에 세계는 ‘문명들을 갈라놓는 문화적 단
층성’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고 주장해 문명권 구분 논의를 가속
화시켰다. 또한 각 문명권은 제 나름의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
으며, 지금까지의 문명사는  이른바 ‘발전 단계설’로 대변되는
서구 중심적 사관으로만 흘러 왔기에 이제 그런 관점에서 탈피해
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있다. 이에  발맞추어 우리도 우리만의
문화적 전통을 복원하고  타문명과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그 우월
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런 문
명권 구분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
다. 물론 그 논의가  순수한 역사 철학적 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런 논의가 활성화됨을  지지하는 세력들도 모두 같은 의
도를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누가 이 전통 논의를 주도
하는가를 유심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계는 자꾸 넓어지고  따라서 미개척시장은 자꾸 줄어들고 있
다. 자본의 교류는 활발해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거대
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을 뿐이다.  자본시장의 세계적 통합은
신흥 자본이 쉽게 끼여들기  어렵게 하고 있으며, 이런 시점에서
각 문명권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결국 그들 시장을 문화적 장벽으
로 블럭화하여, 그 안에서  지속적 이득을 원하는 세력이 있음은
자명하다. 바로 이런 움직임이  우리의 무분별한 전통 복원을 암
묵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혜정 교수(문과대
·문화인류학)는 “전통복원이란 단어의 ‘허영’에 주의해야 한
다”며 무분별한 전통문화 논의를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당연시하며 거부없이 받아들여 왔던 서
구 중심의 사관에 대해 ‘에드워드 사이드’식의 비판적, 주체적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 문명을 무작정 경원시
하며 우리 문화권 안으로만  관심의 눈을 돌리는 것은 현명한 방
법이 될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서구 중심성은 존재할 것이고,
다만 새로운 문화·문명적 벽이  더 생기는 것 뿐이다. 최소한의
문화적 등질성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문명간의 상호 관계
성과 영향성까지 부정하게  되고 이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로 환
원되어 버릴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흐르지 않는 웅덩이의 물은  고요해 보이지만, 마침내 썩고 벌
레들이 생기게 된다.  문화나 문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가 우리만의 문화적 장벽을  세운다고 해도 결국 막힌 물에서 썩
는 물고기는 우리가 될  뿐이다. 지금까지 문명이 ‘진보’할 수
있던 이유는 문명 상호간의 ‘영향 주고받기’에 있다는 점을 잊
어서는 안된다. 결국 문화장벽  세우기란 자본주의 팽창 이후 시
장 재편의 과정 속에서  문명권에 대한 논의가 단기적 이득을 얻
기위한 수단으로 이용당한 데  지나지 않는다. 문화 장벽은 종국
적으로 과거 일본이  꿈꾼 ‘대동아 공영권’의 재판(再版)인 셈
이다.

  그럼 우리가 취해야 할 ‘문명 바라보기’의 태도는 어떤 것일
까? 일반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우리는 다원적 태도를 견지해
야 한다. 제문명들의 기본적 등질성을 인정하고, 인류 문명이 가
지고 있는 공통의  관심사에 주의를 돌려 타문명·문화권과 함께
이룰 수 있는 사업을 찾아보는 것이 올바른 길인 것이다. 세계적
으로 문명권의 구분  없이 전개되는 환경운동과 같은 연대운동들
에서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주의의 단초를 볼 수 있다. 환경 정의
를 구현하면서 다양한  환경보호 운동을 벌이고 생태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있어 공동체적  합의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런 작업
을 통해 인위적인 ‘문명’의 장벽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명적 유산을 보존하고 전승시키는 데에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원적 사관을 확립하는 일, 그리
고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모두를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 그리고  그 안에서 ‘공동체’라는 유토피아를 건
설해 나가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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