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YonSei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 ILEEN) 날 짜 (Date): 1996년03월01일(금) 03시49분35초 KST 제 목(Title): 어떤 수필 ... <구름 아이> 그 시절엔 구름만 보면 눈물이 고였다 내 나이 열넷 일당 350원이던 시곗줄 공장 도금실 매캐한 연기 속을 빠져나와 충혈된 눈을 비비고 나면 멀리, 학교 국기게양대 위로 드리운 지랄같이 푸른 하늘 내 하얀 그림자가 병풍 둘린 산을 넘곤 하였다 -- [구름] 전문 내 눈망울이 가장 맑았던,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고싶다. 국민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학교를 작파하게 되었다. 초가을, 살랑거리는 코스모스 위로 하늘은 더없이 높아져만가는 어느 체육시간에, 불행은 닥쳐왔다. 몸이 약해 언제나 따로 떨어져 놀던 얼굴이 해쓱한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둘은 한몸으로 얼크러져 비스듬하게 넘어졌다. 뚝! 그 친구의 팔이 부러졌다. 물론 아무런 악의도 없는 아주 우연한 사건이었지만,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천둥소리만하게 들었다. 그리고 순간 내운명의 물길이 어디론가 휙 방향을 트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아침이면 도시락도 없는 빈 가방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우리 집이, 뼈가 동강이 나버린 그 친구의 수술비를 절반이라도 해줄 형편이 되었더라면 내가 굳이 학교를 그만두는 일까지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산에 오르면 양지바른 무덤가로 가서 빈 가방을 베고 누웠다. 비탈진 산이라 누워 있어도 산아래 풍경이 한눈에 다 보였다. 부산 울산간 국도와 그를 따라 흐르는 작은 강, 부산과 경남 양산의 경계선에 자리잡은 뜨내기들이 주로 사는 우리 동네, 그 뒤로 거대한 삼각형으로 우뚝 선 철마산은 해발 700 미터. 산봉우리 위로 흰구름이 한가하게 떠돌다가 산 너머로 사라져 갔다. 나는 종일 구름만 바라보다가 해가 설핏하면 내려와 신문배달을 하러갔다. 입동 무렵에 나는 처음으로 취직이란 걸 했다. 일당 350원을 받는 시곗줄 공장 시다였다. 시곗줄 마디마디를 손으로 조립해서는 그라인더와 버퍼로 연마를 하고, 마지막으로 도금을 해서 포장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했다. 나는 특히 도금실에서 기사의 보조 일을 많이 했는데, 염산 가스가 언제나 눈을 후비고 코를 찔렀다. 도금 기사 형과 나는 그런 고역을 잊기 위해 일하는 중에 줄곧 노래를 불러젖혔다. <눈물 젖은 두만강> 에서부터 최신 유행곡까지 해대면 한나절이 갔다. 밑천이 다하면 동요까지 꽥꽥 불러댔는데, 두 평 남짓한 천막 도금실에서 우리가 가장 목 쉬게 불렀던 노래는 송대관의 <해뜰 날> 이었다. "쨍 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하지만 도금실은 북향인데다 구석진 곳이어서 햇살 한줄기 비치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씩 천막 밖으로 나와서 바람을 쐬곤 했다. 그럴때면 공장 담 너머로 얼마 전 내가 그만둔 국민학교가 보이고, 국기게양대 위로 새파란 하늘이 아른아른하였다. 입이 걸쭉한 도금 기사 형은 "그 하늘 한번 지랄거치 시퍼렇네" 하고 충혈된 눈을 비비며 말했다. 구름은 어디론가 부지런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듬해 봄에 시곗줄 공장은 문을 닫았다. 나는 이웃집 형과 온천장 근처에 있는 철공소에 취직했다. 주조로 찍어낸 미싱 부품의 거스러미를 그라인더에 깎는데, 하나를 깎으면 1원을 쳐주었다. 이웃집 형은 통상 700개를, 나는 450여개를 깎곤 하였는데, 그 형이 보태어 500개를 채워 주곤 하였다. 철공소는 어두웠고, 햇빛은 커녕 창밖으로 구름 지나가는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차비 떼고, 점심값 떼고, 하루 한 켤레씩 없애는 목장갑값 떼고, 수시로 그라인더에 손을 갈아먹어 약값까지 떼니, 취직을 했다뿐 한푼도 모이는게 없었다. 이웃집 형은 자주 코피를 쏟았고, 나는 기침을 할 때마다 시커먼 쇳가루가 섞인 가래를 토해냈다. 우리는 어느날 같이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그다음부터 우리는 신이 났다. 강으로 낚시를 다니고, 논두렁과 들판에서 개구리를 잡았다. 강에서 잡은 고기는 매운탕 집에 팔고, 개구리는 한약방에 팔았다. 수입이 시곗줄 공장이나 철공소 때보다 한결 나았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하늘과 구름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게 나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일도 오래 가진 못했다. 장마철이 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웃집 형은 트럭 운전사의 조수가 되어 마을을 떠났다. 나는 혼자 들판을 쏘아다니다가, 비오는 날이면 버스를 타고 공연히 시 경계선인 종점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관통하며 송도 바닷가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하였다. 비가 그치면 가끔씩 버스에서 내려서는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서 아득한 수평선에서 꾸무럭거리며 솟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마치 수평선이 고향인 듯, 모든 구름은 수평선으로 가고 또 모든 구름은 수평선에서 오는 것 같았다. 지구가 둥글다는 건 익히 알지만, 수평선 끝에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폭포가 있어서 무장무장 구름을 피워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던가 보다. 내가 글이란 걸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이. 굳이 시인이 되겠다는 마음도 없이, 그것이 시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음이 부는대로 수첩에다 옮겨 적었다. 뭔가를 쓰다가보면 내 마음은 언제나 구름에 가서 머물곤 하였다. 그 구름은 어디론가 늘 떠나고 싶어하였고, 떠나지 못하는 내가 슬퍼졌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고달프고 쓰라린 추억이다. 공장에서 잔업철야를 하고서 후줄근한 표정으로 귀가하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늘 혀를 차며 '에구, 짠한 자슥' 하고 돌아서서 눈물을 찍어내곤 하셨다. 학교를 그만둔 직후에는 나도 스스로가 비참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모든걸 포기하고 잊었다. 그런 다음부터 나는 스스로를 한번도 불쌍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다. 특별히 어떤 희망도 무엇이 되겠다는 야망도 없었다. 그저 구름을 쳐다보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조그만 흰 구름 하나가 흐르는 푸른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런 마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나는 시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되고 나자 불현듯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아무도 나를 시인으로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 시절이야말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오직 시인이었던것 같기 때문이다. 떠도는 구름과 더불어. 나는 구름을 사랑한다. ------------------ 우리집엔 언제부터인가 [라이포] 라는, 시스템 다이어리 회사에서 보내는 책자가 온다 (아마도.. 한창.. 엽서만 보내면 보내주고, 또 뭐 공짜로 주곤 하던 시기에 내가 설친 것으로 기억한다). 한동안 그런 시간관리 책자의 '합리'와 꼼꼼함에 시니컬해져서.. 집에 배달되어도 안보고 차곡차곡 쌓아두고만 있다가, 오랫만에 자세히 읽어보았다. 윗글은 그중에 있던 글이다. 이이가 나중에 어떤 글꾼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기억을 담은 그의 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줄기 바람이 될 것 같아서 옮겨 적었다... ...그이는 박운규.. 라는 시인/소설가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