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oGang ] in KIDS 글 쓴 이(By): parkeb () 날 짜 (Date): 1998년 7월 11일 토요일 오전 11시 23분 25초 제 목(Title): 연구중심대학.. 연구중심대학이라 하면 보통 미국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 시초는 오히려 유럽이며, 미국은 유럽의 대학을 모델로 하여 자신들의 철학에 맞게 고쳐나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것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대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고려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유럽 특히 독일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시기를 통해 독일은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수많은 학교가 세워짐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배출하려고 합니다. 이때 문제가 생긴 것이죠. 과거의 독일의 교육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철학과 고전 라틴어위주의 교육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세워진 학교들은 대부분 이런 전통적인 교육보다는 실용적인 과학기술을 배우는 학교였으며, 이들의 지위는 전통적인 대학보다 낮은 단계에 있엇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수가 증가하고 경제성장과 더불어 과학기술인력의 요구가 커지면서 대학의 교육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새로운 개혁이 시도됩니다. 이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수학자인 클라인이었고, 그당시의 교육이 철학과 라틴어위주의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에서 과학기술 교육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이때 또 한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프로이센의 정부 관료인 알트호프입니다. 카이저 황제와 의회, 재무부까지도 연결되어있던 이사람이 클라인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것때문에 클라인의 개혁시도는 강력하게 추진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대학교육과 중등교육의 과정이 바뀌게 됩니다. 또한 이때에 대학의 연구소들은 국가재정의 지원과 함께 정교수,부교수,사강사, 조교들의 적절한 수의 배치, 실험실, 세미나, 콜로키움등을 갖추게 됩니다. 이러한 제도적인 뒷받침과 더불어 당시 독일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수많은 인력이 필요했으며 이로 인해 대학의 학생수는 증가했습니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대학은 사강사의 수를 늘렸으며, 이들이 정교수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수많은 연구성과가 나왔습니다. 또한 이시기에 국가적인 연구소들이 세워졌으며 이들의 설립과정에서 정부의 재정지원은 보장하나 운영은 자율에 맡김으로써 좋은 학자들을 모으고 대학에서 수행할 수 없는 기초적이며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연구가 수행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중심대학이 나타납니다. 괴팅겐대학의 수학과가 그것이며 이것을 주도적으로 이뤄낸 것은 위에서 언급한 클라인이엇습니다. 그는 학자보다는 관료적이며 행정적인 역할을 많이 담당했고,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알트호프엿습니다. 클라인은 우선적으로 좋은 교수들의 확보에 주력했으며 이시기에 괴팅겐에 있었던 학자들은 힐베르트, 리만, 민코프스키, 바일, 뇌테르, 좀머펠트, 보른, 비헤르트, 슈바르츠실트 등 당대 최고였습니다. 또한 클라인은 자신이 수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수학과 물리학 뿐만 아니라 공학과의 협력연구를 수행하였고, 이를 위해 산업체와의 공동연구를 처음으로 시도했습니다. 또한 산업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그 대가로 교수자리를 만들어서 교수의 확보에 주력햇습니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분야의 통합적인 연구와 더불어, 산학협동의 연구를 통해 재정지원을 확보하고 이를 다시 좋은 연구인력의 확보에 힘을 기울여서 괴팅겐은 20세기 초 최고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서게됩니다. 이런 것도 있군요. 수학을 좋아했던 사업가가 내놓은 펀드를 예치하고 그 이자로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해서 연구하고, 토론을 하게 했습니다. 당연히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구요. 괴팅겐의 이 영광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정신병자로 인해 산산조각났습니다. 유태인 출신의 연구인력과 교수들에게 가해진 해임과 추방에 의해 클라인이 이뤄놓은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은 연구인력의 해산과 더불어 다시는 그 명성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