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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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wolverin (GoBlue)
날 짜 (Date): 1994년07월24일(일) 23시54분49초 KDT
제 목(Title): 짝사랑. 옛일을 생각하며.


비가 오는 날이나 마음이 울쩍해지면 가끔 바하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곤 한다.

(많이 알려진 바하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 파르티타 (BWV 1001-1006) 와는

다른 곡입니다.) 마치 자신의 옛 추억을 이야기하는 듯한 선율에 음악을 듣는

나도 옛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어제 저녁에 너무 일찍 잠이 든 탓에 새벽에

일어나 빈둥거리다가 오랜만에 바하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었다. 첫곡 일악장이

끝날 무렵, 갑자기 10 년도 더 지난 옛 일이 생각이 난다.


내가 지금까지 짝사랑을 해본 것은 3 번인 것 같다. 처음은 유치원에 다닐 때

였는데 한 여자애를 좋아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때는

참 예쁘고 착한 애라고 생각을 했던 기억은 있다. 1 년이 다 지날 때까지 말도

별로 해보지 못하고 있던 중, 하늘이 내 짝사랑에 감동하셨는지 나를 도와주시는

것이었다. 유치원 졸업전, 학예회같은 것을 했는데 그 중 두가지 공연에 출연하게

되었다. 하나는 예수 탄생에 대한 연극이었는데 동방박사 역을 따내었고 (유치원

다니는 동안 수녀님께 연기력은 인정받고 있던 터였다.) 다른 하나는 무용이었다.

그런데 무용에서 내가 짝사랑하던 애가 파트너가 된 것이었다. 파트너가 결정된

후 어찌나 좋았는지 억지로 웃음을 참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고마우신 하느님

아빠) 한달 정도 열심히 연습한 후 공연하는 날이 되었다. 그 연습하는 동안 

(특히 무용 연습할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 보니...

어찌된 일인지 그애는 다른 아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시간이 초박하여 

연습때의 파트너와 상관없이 짝이 지어진것 듯 했다. 어차피 모두 같은 동작을

하는 것이니... 그래서 다른 여자애와 하게되었는데 얼마나 실망하고 낙담했는지

내 무용공연은 엉망이 되었다. 유치원 졸업 앨범을 보면 서로 팔을 끼고 도는

장면에서 나만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 나오니까... 아뭏든 나의 첫 짝사랑은

이렇게 끝나고 만다. 졸업때까지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두번째는 국민학교 4 학년 때였다. 그때 짝을 하던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그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짝이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

을까. 그런데 행동은 마음과는 달리 그애에게 못되게만 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거란 생각때문이었을까. 역시 그애에게도 제대로 말도

못하고 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 두번째 짝사랑은 끝이 난다.


세번째는 대학교 1 학년 때였다. 대학원 졸업한 후에도 영어때문에 고전하고 있던

형의 권유로 상당히 비싼 사설 영어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역시 나도 영어는 

자신이 없는 터라 꽤 열심이었던것 같다. 그런데 같은 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거의 3, 4 학년인데다 어학에 관련된 전공 (영문학, 독문학, 고시준비중인 외교

학과 등등..) 이라서 그렇지 않아도 신통치않은 영어 실력인 나는 자연히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영어 교육과를 다니는 2 학년 누나가 한명있었는데 내가 그 반에서

유일한 1 학년이어서였는지 참 잘 해주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뻣던 그 누나 앞에서

나는 시선을 마추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 누나에게는 내가 수줍음

잘 타는 시골아이로 보였겠지. 첫 학기 성적이 너무 나빠서 영어 학원은 한 학기로

끝이 났고 다음 학기는 생존을 위한 싸움으로 정신없이 보내었다. 그 때는 학사

경고가 엄격히 적용되었던지라 첫 학기에 경고를 받았던 나는 두번째 학기 성적에

따라 학교를 나가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음해 봄, 간신히 살아남은 나는

오랜만의 따뜻한 날씨를 즐기며 도서관에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서관 유리 동물원

앞에서 그 누나와 마주쳤다. 너무도 우연히.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 누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니? 웃는걸 보니 좋은 일이 있나봐."

아마 나는 너무 기뻐 웃고만 있었나 보다.

"너무 날씨가 좋아서...."

"그래? 나는 바뻐서 먼저 갈께. 나중에 또 보자."

'커피 한잔 하자고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유치해. 영화 보러 가자고 할까?'

혼자 이생각 저생각하던 중 그 누나는 가버렸고 나는 그냥 뒷 모습만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에 또 만나면 꼭 데이트 신청을 해야지 하는 생각만 하면서.

그러나 졸업때까지 단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도.

아마 나는 그 누나를 꽤 오래 생각했었나 보다. 그 누나를 마지막으로 본 후 학부

졸업하기 얼마 전까지 한번의 미팅이나 소개팅도 못했으니까. 지금은 아줌마가 

되었을 그 누나를 다시 만난다면 바하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으며 차 한잔을

마셔야지. 그때 내가 왜 웃고만 있었는지를 얘기하면서. 그러면 그 누나는 환하게

웃어주겠지. 옛날의 그 미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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