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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landau ()
날 짜 (Date): 1994년12월10일(토) 23시28분37초 KST
제 목(Title): 관악서적에의 기억...




앞에 어떤 분이 좋은 서점을 물었을 때.... 난 갑자기 지금은 없어져 버린
어느 허름한 서점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릿해졌다.

80년대에 서울대를 다녔던 사람들은 아마 모두 교문 옆 140번 버스 종점 앞의
간이 양철 건물에 있었던 '관악서적'을 기억할 것이다. 기껏해야 매점이나
하나 들어서면 좋을 것 같은 가건물에 서점이 있다는 사실은, 그것도 바로
학교의 상징인 교문 바로 옆에 허접한 모습으로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설은 후져도 넓고 큰거 하나는 끝내주는 관악캠퍼스와 그 허름한 
서점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대 주변에는 몇개 큰 서점이 있다. 제일 유명하고 큰 것은 광장 서적이고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애용되는 서점은 '그날' 로 약칭 되는 '그날이 오면'
이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책이 후생관, 학생회관, 공대식당 등에 산재된 
구내 서점에서 판매된다.

하지만 ... 나에게 가장 '좋은' 서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그 허름한 
가건물의 관악서적을 꼽고 싶다.

관악서적은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양철판으로 대충 얽어 놓은 건물도 아주
작았고 안에 들어가 보아도 넓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조명이 나빠 매장 
안은 늘 어둠침침했고 책들은 빛이 바래서 마치 우리교수님 대학 다니시던 
시절부터 그렇게 꽂혀 있었던 것처럼 후줄근했다.책도 별로 많지 않았었다.

응당 있으려니 싶었던 책들을 물어 보면 없다는 대답을 듣기 일쑤였고
도대체 서점이라는 데가 이런 책도 안 가져다 놓는단 말야? 하는 생각도 곧잘 
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한 책을 찾을 때... 그런 때는 관악서적은 언제나
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관악서적을 지금 이렇게 즐겁게
기억하는 이유이다.

당신이 80년대에 서울대를 다니면서 약간은 구하기 어려운 어떤 책을 찾으려고
한다고 치자. 대개 어느 교수님이 '참고로' 읽어보면 좋다고 추천한 정도거나
아니면 선배가 그 책 한번 읽어 보라고 권했던 책이다. 결코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을 그런 인기 없는 책.... 학교 구내서점에는 없기 일쑤다. 구내매점은
큰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나 가져다 놓지 정작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책은
안 가져다 놓는다.

광장서적은 그래도 우리 입맛에 맞는 책들이 많은 편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그런 서점들은 고시서적이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설사 책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 박혀 있는지 찾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면 당신은 툴툴거리면서 그깐 책 하나 때문에 종로나 교보문고까지 나가야
하나 .... 이러면서 혹시 하는 심정으로 교문 옆의 광장서적에 들러보게 된다.
(어차피 집에 가려면 교문을 거쳐가야 하니깐....^_^ )

" *** 에서 나온 ### 라는 책 혹시 있어요? "

흠...있을리가 있겠냐? 이런 허접한 서점에.... 서점 아저씨나 아가씨는 단번에
있어요, 없어요 를 말하기를 꺼린다. 

"음... 잠시만 기달려 보실래요? :) "

그리고는 서가뒤의 '창고'로 사라져 버린다. 그곳은 적어도 매장에서 보기에는
불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창고 그 자체였다. 정리도 잘 안 되어 있는지 계속
부시럭 소리가 들린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서점 아저씨나 아가씨는 한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창고를 빠져 나오면서 먼지를 탁탁 털어내곤 했다.

"이 책 맞아요? "

기절초풍! 바로 여러분이 '관악서적의 위력' 을 맛보게 되는 순간이다. :)
도저히 그런 서점에 있을 것 같지도 않던 책이 마치 요술상자를 연 것처럼
술술 나온다. 대개는 그 이상한 '창고' 에서.

처음에는 에이 재수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런일이 두어번 반복되다 보면
학생들은 '관악서적의 위력'에 대해 차츰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는
신입생 때 

"너네들 관악서적을 우습게 보면 절대 안 된다."

하던 선배의 말을 기억하게 되고 자기도 후배들에게 꼭 같은 말을 전해주게
된다. (전통이 별 게 아니다. 이런것이 쌓이면 그게 전통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지금도 그 허름하고 좁은 공간의 관악서적이 어떻게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그러나 구하기 어려운 책을 쪽집게처럼 내놓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지금도 그 놀라운 능력에 경탄한다. 아마...서점에 장인
정신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아니었을까? :) 

나도 그랬지만... 아마 학교 다니면서 관악서적의 덕을 보고 졸업한 서울대생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 서점은 언제 그런 것을 다 가지고 있었는지 가끔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추리소설을 반액세일해서 나를 기쁘게 해 주었고 ( 주로 1000원짜리 페이퍼 백
이었지만, 내가 거기서 구한 좋은 추리소설은 한두개가 아니다.)
언젠가 내가 포스팅에 쓴 적이 있는 재미있는 기인거지 '200원 아저씨'가
바로 그 앞에서 영업을 하기도 했었다.

나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창고'는 80년대 초반 의 험난하던(?) 시기에
학생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큰 서점에서는 팔지 못하던
좌파서적이 그곳을 통해 유통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몇년전에 관악서적이 없어질 때, 난 참으로 애석하게 여겼었다.
점점 첨단화되고, 전산화 되고, 화려해지는 여타서점과 달리 내 맘에 쏙 들던
그곳이 헐린다는 것이 왠지 서운해서였다. ( 관악서적은... 중학교 때 내가
드나들며 책을 구했던 청계천의 고서점가를 연상시키는데가 많았다.)

지금은....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횅뎅그래하게 비어 있다.

우리는 그런 '좋은' 서점을 다시 가질수 있을까? 서점을 물어 오신 그분에게
관악서적을 추천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 그 서점 이름이 제 기억에는 관악서적이었던 것 같고 제 친구들도 상당수
  동의했지만...왠지 자신이 없네요. 이름 같은 것이 중요할 것은 없지만요.




                                               
                           싸늘한 진보와 부풀어 오르는 야만 사이에서
                           나는 행복한 소수의 여러분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 land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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