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eyedee (아이디) 날 짜 (Date): 1995년03월23일(목) 13시03분33초 KST 제 목(Title): * 김영삼 정권의 위치 6공은 5공보다 정치적 측면에선 더 유연했고 김영삼 정권은 분명히 그 이전의 군사정권 보다 나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점진적 발전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 할 분도 있겠지만 나는 김영삼 정권에 대한 (그리고 6공의 5공에 대한 유연성 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주저하게된다. 그 이유는 80년대 후반 이후 진행되고 있는 개량화 국면이 정권 또는 기득권 세력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적 압력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그것도 불충분하게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나마의 개량의 공은 민주화를 바란, 더 나아가 이를 위해 싸운 국민의 몫이고 가능한 또는 가능했던 개혁을 힘들게한 책임은 정권의 몫인 것이다. (이 주장은 6.29가 정권의 자발적 선택이었거나 김영삼이 야당의 위치에서 집권했다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5공 군사독재 정권은 6월 항쟁 당시 군 동원을 기도하다 마지막 순간에 협상 카드를 들고 나왔다. 양김의 분열과 일부 국민의 무지로 인해 그 카드는 결국 군사정권을 합법적 모습으로 연장시키는데 쓰이게 되었다. 만일 군사정권이 6.29대신 무리한 승부수를 띄웠다면 그 결과는 승패에 따라 더 좋았을 수도 더 나빴을 수도 있다. 내생각엔 민주진영 내지는 국민의 승리쪽으로 결판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군사독재 정권도 패배의 가능성을 크게 봤기 때문에 타협안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면적인 과거청산과 개혁이 이루어졌을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6공은 (마지못한) 타협에 의해 들어섰기 때문에 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5공에 비해 정통성 면에서 덜 취약했고 5공 처럼 파시스트적인 탄압을 강행할 힘도 적었다. (부분적) 민주화도 하고 싶어서 한게 아니라 힘에 밀려 전면승부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정도나마 하게 된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어떠한가? 먼저 6공 초기의 상황을 보자. 6공은 법적 정통성은 확보했지만 기본적으로 5공의 연장인데다 여소야대 정국 때문에 스스로 정권을 연장할 힘이나 국민적 지지를 결여하고 있었다. 여당 체질 때문에 대선에서 승리할 만한 대중적 지지를 갖춘 정치인이 없는 한계도 있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민주당이 제3당인데다 야권통합 (= 양김 후퇴) 움직임 때문에 집권할 확률이 아주 낮았다. 김종필의 집권 가능성은 거의 전무해서 의원 내각제에 의한 권력의 분점이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스스로의 (재)집권 가능성이 없는 3개 정파가 안전하게 권력을 분점 하기 위해 3당통합이라는 야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민정당의 경우는 재집권 가능성이 없었다라기 보다는 낮았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3당통합 이전의 상황을 보면 야당통합을 하고 (양김의 퇴진을 전제할 수 있다) 후보를 내세우면 충분히 민주진영의 대선승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됐다면 전면적 민주화와 개혁이 가능했을 것이다. 3당통합은 이런 가능성을 봉쇄한 반역사적 행위이다. 비록 김영삼이 내각제 약속을 파기하고 권력투쟁을 벌여 대통령이 되어, 구 민정당이 그대로 집권했을 경우 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논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3당통합이 아니었으면 민정당이 재집권했을거라는 가정이 충족되어야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의 근거는 없다. 재집권이 가능(probable)했으면 애당초 구집권세력이 자기들로 봐선 권력의 분점, 축소를 의미하는 3당통합을 먼저 시도하지않았을 것이다. 이런 명분상의 취약성을 김영삼도 알기 ㎖문에 그도 친위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듣고 이를 막기 위해 3당통합을 했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나중에 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런 쿠데타 움직임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려니와 (생각은 있었는 지도 모르지만 비현실적인 계획이라 할 수 있다. 6월 항쟁을 계기로 군을 동원한 정권연장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노태우와 박철언이 내각 제와 정당통합에 애쓴 것이다) 미리 정보를 입수했다면 이를 공개하고 노태우 정권을 공격해야 할 일이지 그런 음모를 꾸민 쪽과 연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발상이다. 헌정 중단을 그렇게 걱정한 사람이 왜 그렇게 중간 평가에는 제일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지 의문이다. 우리나라는 수십년간의 군사독재 체제하에서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과점적으로 소유한 부패 기득권층이 형성되어왔다. (내가 생각하는)개혁이란 그런 기득권층의 저항을 물리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새로운 rule을 만드는 것이다. 전면적 근본적 개혁은 과거의 불공정 경쟁을 통해 축적된 부와 권력을 박탈하는데서 (불공정이라는 말에주의하자. 모든 기득권이 부정되는게 아니다)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까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개혁이라고 불리려면 과거의 불공정 경쟁의 틀을 짠 사람들의 공개적 반성이나 유감 표시는 있어야하고 (예를 들어 5-6공 잔당이 소위 문민 정부에도 그대로 있으려면 군사독재 정권하의 행위에 대한 해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 불공정한 기득권의 추가적 형성이나 강화를 막고 공정한 rule을 만드는데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그 기득권층을 정권의 기반으로 삼아 출발한 태생적 한계 때문에 완전한 수구도 개혁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잘못하면 양쪽에서 욕얻어 먹기 좋은 상태인 셈이다. 비록 태생적 한계가 있더라도 "학실한" 개혁을 통해 지지기반을 넓히는 방향을 (=기득권층 또는 소위 안정희구세력을 잃더라도 개혁으로 인한 추가적 지지의 확보로 이를 메꾸고 남을 방향) 텍해야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구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은 분명 진전(progress)이긴 하지만 더 나은 발전 방향 (수평적 정권교체로 인한 민주화와 개혁)을 막아버린 또는 연기시킨 역사적 책임은 져야할 것이다. 5M 갈 수 있는 상황을 없애버리고 1M 만 갔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퇴보라고 부를 사람도 있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