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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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FreeBird ()
날 짜 (Date): 1997년05월07일(수) 09시22분49초 KST
제 목(Title):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통령


<뉴스메이커>

   "박정희 시절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황금기였지요. 운영자금 마련
에서부터 세금, 수출까지 나라가 다 책임져 줬으니까요. 요즘같이 불경
기가 지속될수록 그때가 그립습니다” (ㅎ섬유제조업체 사장).

 “요즘 대권 후보치고 ‘경제 전문가’를 자처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
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만큼 경제에 목숨을 건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의욕뿐만 아니라, 판단력·추진력 등 능력면에서도 탁월한 분이었지요”
(모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근래들어 재계엔 “박 대통령이 있었으면 이렇게 경제가 곤두박질치지
않았을 텐데”라며 과거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다. 부도기업이 늘고
무역수지 적자폭이 깊어갈수록 이런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흔히 박정권 시절을 ‘한강의 기적’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룬
시기라고 말한다. 정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었다면 지금같은 불황에
허덕이지 않을까. 박 대통령은 전무후무한 경제대통령이었을까. 그
시절엔 지금보다 얼마나 경제가 나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어떻게 내려질까.95년 11월24일자
<뉴욕타임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인도 수준에 불과한 한국경제를
짧은 기간에 후발개도국 반열에 올려놓은 한국경제 기적의 주역이며
오늘날 다원화된 한국사회의 중추인 중산층을 형성케 한 장본인”이라고
규정했다.

  세계은행은 “집권 18년동안 수출 4천1백만달러를 1백50억달러로 300배,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서 1,640달러로 20배 증대시킨 것은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2차대전 이후 신생독립국은 100개
가 넘었다. 이들 국가들은 한결같이 경제부국을 국정 최고 목표로 삼았다.

  뜻을 이룬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대만·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10개도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가 한국이었다.박 대통
령의 경제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는 소련과 중국의 자본주의
도입에서 잘 나타난다.

  소련연방 붕괴 후 소련은 미국경제를, 중국은 한국경제를 교과서로
삼았다. 소련은 미국식 경제를 배우기 위해 하버드대학에 공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며, 중국 역시 한국경제를 접목하기
위해 국내 경제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소련 경제는 실패작으로, 중국은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소련이
선택한 미국식은 경제발전을 시장논리에 맡겨두는 것이다. 기업간 자유
경쟁을 통해 기업체질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식은 바로 정부주도의
강력한 ‘독재’다.

  마스터플랜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정부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로봇식
경제체제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서재 옆방에 ‘5개년 계획 진도 상황실’
을 별도로 마련, 틈만 나면 사업별 진도를 일일이 챙겼다. 말단 공무원
에게까지 직접 전화를 걸어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되도록 독려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관계부처들은 담보가 불충분한 기업에도 은행으로
하여금 추가 자금을 지원토록 했다.당시 한국의 기업주로서 국제 금융
시장서 스스로의 힘으로 차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용도가 전무한 기업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민간차관을 받는데 정부가
보증을 서줬다. 요즘들어 거대 재벌의 폐단이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정부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목숨을 걸었던 셈이다.오원철 기아경제연구소
고문은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 성공 노하우를 ‘중화학공업 투자’와 ‘현장
사람과의 교감’으로 요약했다.

  사회기반시설인 중화학공업 육성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선진국의 하청시장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경제학자가 아닌 상공부와 기업인 등 현
장에서 뛰는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쥐어줬기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이사는 “박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청사진, 그리고 강력한 리더십이 경제부국의 원동력
이었다”고 말한다.박 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경제발전 제일주의였다.

  지금은 경제가 정치논리에 좌우되고 있지만 그땐 정치보다 경제논리가
우선했다. 혹자는 지속적인 권력장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주력했다고 주장하지만 어쨌건 경제는 박 대통령의 통치철학의 출발점이자
목표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5·16 군사쿠데타에서 내걸었던 혁명공약중 하나인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구해낸다’에서부터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 그리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경제
로 통했다.

  통일도 민주주의도 경제가 부강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박
대통령의 ‘경제살리기’는 구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실천이
뒤따랐습니다. 시행착오가 있으면 그때마다 고쳐가며 최선의 길을 찾는데
주저하지 않은 겁니다.

 ‘장관이나 공무원은 경제발전에 총력하라, 정치는 내가 막아주마’라고
말할 정도로 경제에 힘을 실어줬습니다.”박 정권 18년중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으로 16년을 함께 한 김정렴씨는 박 대통
령을 “개발독재자라기보다 리더십과 추진력을 겸비한 영도자”라고 설명
했다.

  그는 또 “집권 기간 동안 쌀 자급자족과 경공업과 중공업, 방위산업까
지 ‘풀 세트 공업화’에 성공, 100여년의 공업화 공백기를 단시일에 메
워놓은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극찬했다. 또다른 여권 관계자는 최근
경제여건과 비교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즘 국내 경제가 바닥권을 헤매고 있지만 세계 경제는 호경기를 누
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박정희 시절은 지금보다 국내외 여건이 훨씬 어
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기적을 이뤘습니다.

  이는 대내외적 여건과 무관하게 얼마나 강력한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경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지요.”중국은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자동차 산업 육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물론, 현대·기아
·대우 등 3개업체를 중심으로 키운 것까지 똑같이 흉내내고 있다. 90년대
들어 중국이 한국의 주요경쟁 대상국으로 떠오른 것도 한국 덕택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일부 경제전문가 사이엔 국익을 위해 지나친 노하우 전파는 삼가야 한
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중국 외에도 당초 미국식을 따르던 남미국가와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까지 박정희식 경제개발법을 배우거나 관심을 기울
이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까지 박정희식 경제해결법을 배우기 위해
나섰다.

  정정길 서울대 교수는 “정부의 역량이 민간보다 월등할 땐 정부주도로,
정부와 민간의 역량이 비등할 땐 민관협조로,그리고 민간역량이 정부보다
앞설 땐 민간주도로 경제가 운용되는 게 바람직하다”며 “60, 70년대는
민간의 힘이 미비했던 만큼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으며, 박 정권은 이
원칙을 충실히 이행했기에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경제문제만큼은 사후
후한 점수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경제환경은 박 대통령 시절과는 크게 다르다. 박정희 시절이
그립다고 그때 방식이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동시대의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제 만큼은 지금보다 그때가 좋았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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