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drake (돈데주전자) 날 짜 (Date): 1995년09월01일(금) 20시50분04초 KDT 제 목(Title): 한겨레21: 양김이 그려온 쌍곡선... ---------------------------------------- 양김이 그려온 협력과 경쟁의 쌍곡선 ---------------------------------------- 김영삼과 김대중. 지난 60년 장면의 민주당 정권 때부터 시작한 이른바 ‘양김’의 35년은 민주화와 집권을 위한 협력과 경쟁, 단결과 분열이 점철된 일대 파노라마 였다. 그리고 두 주역이 엮어내는 드라마는 아직도 종말을 잊은 채 현재 진행형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와대 회동 둘러싼 여야의 신경전 ------------------------------------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8월25일 집권 절반을 맞이해 출입기자단과 간담회 를 갖는 자리에서 “모든 경쟁은 끝났으며 나는 어느 누구하고도 경쟁할 입장도 아니고 필요성도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어느 누구는 김대중 새 정치국민회의 창당준비위원장을 말하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김대중 준비위원장과의) 경쟁은 끝났음을 선언했으나 최근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경쟁이 끝났다”는 말이 “아직도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역설 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사자는 부인할지 모르지만 대다수 국 민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 거의 모든 언론들이 김 대통령이 지난 8 월23일 정·관계 원로 29명의 한명으로 김 위원장을 초청한 모임을 양김 의 회동에 초점을 둬 대서특필한 것은 국민들의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 이다. 또 실제 김 대통령은 미국 순방 뒤 지난 7월31일 열린 3부 요인 및 정당 대표 초청 방미성과 설명회에서는 신당이 아직 창당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 위원장을 초대하지 않았으나 불과 20여일 뒤인 지난 8월23일에는 전혀 상황변동이 없는 데도 그를 초청했다. 그를 “스스로 정계에서 은퇴한 사 람”으로 무시하던 데서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식으로 태도를 바꿨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두 사람의 경쟁이나 관계가 예민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 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우선 김 위원장의 청와대 초청 발표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김 위원장쪽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청와대의 윤여준 대변인은 회동 전전날인 21 일 김 위원장을 포함한 원로들의 청와대 초청 사실을 출입기자들에게 알 려주며 비보도를 요청했다. 이날 비보도 요청은 그런 내용이 과연 비보도 를 받아줄 만한 내용인가에 대한 의문을 주기에 충분한 사안이었으나 어 쨌든 기자들에 의해 ‘접수’됐다. 그러나 비보도 요청은 엉뚱한 데서 깨 졌다. 국민회의의 박지원 대변인이 22일 아침 기자들의 질문에 “김 위원 장이 청와대 초청을 받았고 이를 수락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청와 대의 윤 대변인은 “박지원 대변인에게 또 당했다”며 박 대변인의 발표 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런 신경전의 배후에는 8월22일 강삼재 의 원의 ‘젊은 총장’ 발탁에 이어 다음날 김 이사장 등 원로와의 모임을 터뜨리는 깜짝쇼를 통해 국민의 시선을 독점하려는 청와대쪽의 홍보대책 과 이를 견제하려는 국민회의쪽의 반발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외부의 적이 있을 때는 협력과 화해 -------------------------------------- 새정치국민회의 발기인대회가 열린 지난 8월11일 정부가 8·15대사면을 발표한 데 대해서는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서 “내가 큰일을 하면 정부도 이에 맞춰 큰일을 해왔는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사면복권을 발표했다 ”고 YS의 ‘김빼기 작전’을 비난했다. 김 위원장 측근들은 “이제까지 그가 아태재단 행사 등 언론에 부각될 만한 행사를 할 때마다 개각 등 중 요발표로 견제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김 대통령이 이유없이 개각을 미루는 것도 오는 9월5일 열리는 창당대 회의 김을 빼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또 김 위원장의 정계은퇴 이후 한때 문제가 됐던 정치사찰 문제도 두 사람의 대 결과 경쟁, 견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영원한 라이벌’ ‘대립의 동반자’로 표현되는 두 사람의 전쟁과 화해 의 드라마는 지난 14대 대선의 패자인 김대중씨의 은퇴 발표로 끝나는 듯 했으나 김씨의 정계복귀와 김 대통령의 그에 대한 실체인정으로 연장방영 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들을 동시에 옥죄는 외부의 적이 있을 때는 협력과 화해의, 그런 상황이 걷힐 때는 경쟁과 대결의 곡선을 그려왔다. 협력과 화해의 경우는 유신 말기인 지난 79년 5·30전당대회가 순서상 첫 손가락에 꼽힌다.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유신독재와 협력노선을 취했던 이 철승씨와 타협없는 유신독재와의 대결노선을 견지했던 김영삼씨가 한판 대결을 벌였던 이 대회에서 김대중씨는 김영삼씨의 당권장악에 결정적 도 움을 줬다. 이때 잠시 가택연금에서 풀린 김대중씨는 김영삼씨와 경쟁하 던 조윤형·김재광·박영록씨의 후보 사퇴와 YS지지를 설득해 YS가 3표차 의 승리를 거두는 데 공헌했다. 두번째는 신군부 시절인 83년 8·15공동성명 발표로 시작으로 87년 6월 항쟁까지의 협력시대다. 둘은 이 시기 민추협을 결성해 6월항쟁을 이끄는 기틀을 세웠다. 90년 3당합당 이후에도 둘은 공통의 목표를 위한 제한적 인 협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90년 10월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의 단식 농성장에서의 지자제 실시합의, 공안정국 해소를 위한 91년 4월 대구합의 가 그런 예이다. 97년 대선에서 또 만날까 두 사람은 협력한 만큼 대결도 많이 했다. 둘 사이의 공식적인 첫 대결은 68년 5월 신민당 원내총무 지명전에서 벌어졌다. 당시 유진오 총재가 DJ 를 지명했으나 YS의 방해로 DJ는 총무를 맡지 못했다. 그러나 DJ는 2년 뒤 열린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보기좋게 YS에게 역전승으로 전날 의 패배를 갚았다. 이후 야권의 대통령 후보를 두고 운명적인 경쟁을 벌 인 두 사람은 80년, 87년 두번에 걸친 ‘서울의 봄’을 분열과 대결로 걷 어차 버렸다. 이어 90년 1월20일 YS가 ‘구국의 결단’이라는 이름 아래 여권의 품 안에 들어가면서 둘간의 관계는 야야에서 여야로 질적인 변화 를 했다. 이제 한 사람은 대권후보로, 또 한 사람은 대권후보 지명권자로 97년 대 선에서 만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경쟁과 협력을 오간 둘 사이의 쌍곡 선이 이번에는 어떻게 나타날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오태규 기자 한겨레신문사 1995년09월07일 ######################################## drake : 돈데크만 #################### #한국대전의어느한적한공대에서뱅기와우주선에대해서공부하고있는소띠의대구싸나이#� ############################################################################## hjyoon@fdcl.kaist.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