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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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24일 토요일 오전 09시 35분 58초
제 목(Title): 이상수/ 길을 따라 산다는 것은 


출처: 한겨레 21, 이상수의 동서횡단 

 [ 이상수의 동서횡단 ]  2001년03월20일 제351호   
 

[이상수의 동서횡단] 길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위의 삶을 영위하는 사회적 실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낮은 곳 향해 


 

노자는 사람이 길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길을 따라 사는 삶의 
모습을 그는 물의 은유를 통해 들려준다. 

“가장 잘하는 건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아니하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니, 길에 가깝다. 머물 때는 
물처럼 땅을 잘 기름지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는 물처럼 더불어 잘 어울리고, 말을 할 때는 물처럼 미덥게 하고, 
바르게 할 때는 물처럼 잘 다스리고, 일을 할 때는 물처럼 능숙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잘 맞춘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므로 허물이 
없을지니.”(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8장) 


만물을 비추는 물같은 덕을 간직한 사람 


노자는 물에서 매우 풍부한 은유를 읽어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온갖 
것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은 땅을 잘 
기름지게 하여 백화방초를 길러낸다. 이렇게 남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그걸 
내세워 군림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간다. 
조금이라도 더 내려갈 곳이 있으면 조금도 망설임없이 그곳을 향해 흘러 
내려가는 게 물의 속성이다. 누구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군림하는 건 물의 
본성으로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물이 고이면 그윽하게 만물을 
비춘다. 명경지수와 같은 물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다. 물은 늘 반듯한 
평형을 유지한다. 바람이 불어와 파도가 일거나 수면이 흔들리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바람이 잦아들면 물은 어느새 반듯한 평형상태로 복원된다. 물은 
하늘로 증발해 올라가 때가 되면 어김없이 눈비로 내린다. 노자는 물의 이런 
성질이 “길에 가깝다”(幾於道)고 말한다. 노자는 거기서 겸양, 이타행, 
자랑하지 않음, 내세우지 않음, 다투지 않음, 공평무사함, 반듯함, 미더움 등의 
미덕을 발견한다. 

물에 관한 은유를 잘 읽어보면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가 무위도식하면서 
도사 흉내나 내는 나무거울의 처신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길을 잘 
실천하는 사람은 물과 같은 덕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세상일을 물처럼 
공평하고 반듯하고 미덥고 능숙하게 잘 이루어내면서도, 어떤 공적을 이뤘다고 
해서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하거나 잘난 체 하거나 군림하려들지 않는 
사람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참사람은 일삼아 하는 일이 없는 데 
처하며, 말을 떠난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이 이뤄지지만 그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무얼 창조해내지만 그걸 소유하려 들지 않으며, 남을 위해주지만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공이 이뤄지더라도 거기 눌러앉으려 들지 아니한다. 
대저 오로지 거기 눌러앉으려 들지 아니하므로 오히려 영원히 거기 거할 수 
있으리라.”(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2장)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사사로운 자기중심주의를 버린 사람이다. 어떤 일이 
이뤄지면 그뿐, 그걸로 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일자무식의 평민 출신이었다. 그는 관군에 쫓겨 평생 도망다니는 삶을 
살았다. 그가 누운 곳은 늘 임시거처였다. 그럼에도 그는 잠시도 쉬는 법이 
없이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는 따위의 일을 했다. 한번은 은신처에서 
망태기를 삼고 있는 그를 보고 수행자가 물었다. “내일 이곳을 떠나면 지금 
삼고 계신 망태기를 써보실 수도 없을 텐데 그걸 삼아서 뭐하시렵니까?” 
해월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쓰지 않으면 누군가는 이 망태기를 쓸 게 
아닌가?” ‘무위’란 말의 참뜻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본디 좋은 말을 남기는 
것보다 좋은 일화를 남기는 게 더 어렵다. 내일 떠나갈 집의 텃밭에 채소를 
심고 거름을 주던 해월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말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해월이 남긴 
일화는 말이나 글로 된 어떤 빼어난 설명보다 더 생생하게 무위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노자가 말한 “말을 떠난 가르침”(不言之敎)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무위란 말의 참뜻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 데 있다. 노자는 말한다. “잘 
가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잘하는 말은 허물이나 티가 없다. 잘 
헤아리는 사람은 계산기를 쓰지 않는다. 문을 잘 거는 사람은 빗장을 지르지 
않지만 열 수가 없다. 잘 맺는 사람은 끈으로 꽁꽁 묶지 않지만 풀 수가 
없다.”(善行無轍迹, 善言無瑕謫, 善數不用籌策,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27장) 

우리 사회에는 자기가 하는 일에 공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듯하다. 가령 자기가 세운 기업이나 학교, 
신문사, 방송사라 해서 그게 자기 집안의 소유물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 공공의 그릇으로 변한 것이다. 삼성은 이미 이씨 집안의 소유물이 
아니며, 조선일보는 방씨 집안의 소유물일 수 없다. 이 말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오로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기업을 하고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찍어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일수록 서민들만 불행하다. 


길을 따르는 사람은 앞에 나서지 않는다 


노자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들보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참사람은 늘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뒤에 두지만 그 
몸이 앞서게 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지만 그 몸이 잘 지켜지는 사람이다.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능히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이룰 수도 없는 법이다. 자기를 지키려 
안간힘 쓰는 사람은 그럴수록 자기 본모습을 잃어간다. 타고르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의 이름으로 에워싸인 그는 이 감옥 안에서 울고 있습니다. 나는 
그 둘레에 벽을 쌓느라 늘 바쁩니다. 그런데 이 벽이 나날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갈수록 나는 그 어두운 그늘 속에 내 참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크나큰 벽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모래와 티끌로 더덕더덕 
바르지요. 이 이름에는 아무리 하찮은 구멍일지라도 남겨선 안 되니까. 그런데 
내가 들인 정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참모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기탄잘리> 29)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늘 다른 이의 뒤에 자기 몸을 두는 사람이다. 그는 잘 
꾸어주고 일을 잘 이루도록 하지만(“夫唯道善貸且成.” 41장) 빚 독촉을 하지 
않는다. 그는 늘 빌려주는 사람이면서 빚쟁이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빚진 사람의 자리에 선다. “참사람은 늘 빚진 사람의 자리에 서지 남에게 빚 
독촉을 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 빚을 갚아주어야 할 것을 
살피고, 덕이 없는 사람은 남의 잘못을 꼬집어낼 거리를 살핀다.”(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 有德司契, 無德司徹. 79장) 

노자의 말은 시속과 거꾸로 살라는 얘기로 들린다. 공자의 말을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은 늘 중용을 잡으려 애쓴다. 그가 말하는 중용이란 산술적인 
가운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때에 알맞음’을 뜻한다. 공자는 ‘알맞음’을 
높인 사람이다. 노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왼쪽으로 물러서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리의 반대편에 자기 몸을 두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아지길 원하지만 노자는 낮은 곳을 향하는 물의 덕처럼 자기를 낮추라 
말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빚쟁이처럼 큰소리치며 살길 원하지만 노자는 늘 빚진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소리치며 사는 즐거움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가치의 
반대편에 서라는 것이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중용에서 한 걸음 더 왼쪽으로 물러서라 


“그 수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킴으로 하늘아래의 둠벙이 된다. (…) 
그 흼을 알면서도 검음을 지킴으로 하늘아래의 틀이 된다. (…) 그 영화로움을 
알면서도 욕됨을 지킴으로 하늘아래의 골짜기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28장) 
수컷됨(雄)이란 가부장적 권위주의, 남근중심주의를 말한다. 세상은 
‘사내다움’을 높게 평하고 ‘계집애’처럼 행동하는 걸 얕본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암컷됨(雌)을 지키라는 말이다. 수컷됨, 흼, 영화로움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가치와 반대되는 암컷됨, 검음, 
욕됨을 “지키라”(守)는 게 노자의 요구다. 물이 늘 낮은 곳을 지키듯.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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