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31일 토요일 오후 05시 13분 29초 제 목(Title): 이상수/ 길을 따르면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출처: 한겨레 21 [이상수의 동서횡단] 길을 따르면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천하를 위해 마음을 뒤섞는 노자의 참사람… 일본군 전범에 종신형을 내리지 않은 이유 “그 수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킴으로 하늘아래의 골짜기가 된다.” 노자의 이 말은 힘의 논리가 맹위를 떨치는 우리 시대에 깊이 새겨봄직한 금언이다. 노자 할아버지는 이미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사회를 압도하던 시절을 살았다. 지금부터 3천년 전인 상(商)나라 때의 갑골문에서부터 이미 사내아이 선호의식 따위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경사스럽다”는 뜻을 가진 ‘가’(嘉)자의 갑골문을 보면 무릎을 꿇은 여인이 쟁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쟁기를 끌고 나가 일을 할 수 있는 사내아이를 얻은 게 기쁘다는 뜻이다. <시경>에도 노골적으로 남아선호를 선양하는 시가 남아 있다. “사내아이 낳으면/ 침상 위에 누이고/ 밖에서 활동하는 겉옷을 입히며/ 옥을 쥐고 놀게 하리라. (…)/ 계집아이 낳으면/ 맨바닥에 재우고/ 포대기에 싸서/ 길쌈 실패를 주어 놀게 하리라.”(乃生男子/ 載寢之牀/ 載衣之裳/ 載弄之璋/ …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석/ 載弄之瓦 <小雅·斯干>) 노자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공자는 또 이런 발언을 남겼다. “여자와 종은 기르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버릇없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陽貨> 25) 노자의 위 발언은 이런 숨막히는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참신하게 들린다. 이 알 듯 말 듯한 발언을 통해 노자가 전하고자 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사는 법 이 구절에 대해 왕부지는 이렇게 풀이한다. “안다는 것은 맑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지킨다는 것은 흐림으로 돌아가는 것이다.”(知者歸淸, 守者歸濁. <老子衍>) 무엇을 안다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높이는 가치는 맑은 물 속처럼 분명하다. 그러나 노자는 그렇게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마음을 뒤섞으라”고 말한다. 노자가 말하는 참사람은 늘 사람들의 뒤에 몸을 두고 일을 잘 이루도록 하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늘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49장) 사람이다. 노자는 참사람이란 “천하를 위하여 그 마음을 뒤섞는 사람”(爲天下渾其心. 49장)이라고 말한다. 맑게 분별하는 대신 마음을 뒤섞으라니,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란 식의 흐리멍덩한 태도로 살란 말 아닌가? 이런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그래서 노자는 “그 수컷됨을 알지만, 암컷됨을 지킨다”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다. 수컷됨이나 암컷됨이나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수컷됨이 세상에서 환영받는 가치임은 알지만, 그럼에도 암컷됨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늘아래의 ‘골짜기’가 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잘 가꾼 정원은 아름답다. 그러나 정원에 발을 붙일 수 있는 나무나 풀은 한정되어 있다. 잡초와 쓰레기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위해 추방당해야 한다. 광야는 버리는 게 없다. 광야는 더러운 물도 온갖 잡초도 모두 받아들인다. 그게 광야의 미덕이다. 골짜기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것도 쌓아두지 않고 흘려보낸다. 그게 골짜기의 미덕이다. 이에 관해서는 여길보(呂吉甫)의 풀이가 알기 쉽다. “골짜기라는 것은 계곡물을 받아서 강과 바다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한다. 어떤 계곡물이든 거절하는 법이 없이 받아들이며, 또한 쌓아둠이 없이 실어 나른다. 그것은 만물을 잘 통하게 하면서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谿之爲物, 受于谷而輸于江海. 受而不拒, 輸而不積. 物之能通而無오者也.)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분별심을 내는 대신 마음을 뒤섞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는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참사람은 늘 사람을 잘 구하므로 버리는 사람이 없다. 그는 늘 온갖 것을 잘 건져내므로 버리는 것이 없다. 이를 일러 밝음을 드러내지 않고 쓰는 것이라 한다.”(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27장) 노자는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식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는다. 설혹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려 보이더라도 “화광동진”(和其光, 同其塵. 4장, 56장)할 것을 요구한다. 화광동진이란 “빛을 무디게 하고 티끌과 더불어 함께함”이란 뜻이다. 자기 내면의 자랑(빛)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깊숙이 감추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깊숙이 품어주는 일을 화광동진이라 한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그는 사람을 버리는 법이 없다. 이는 자기 내면의 빛을 쓰되 드러내지 않고 쓰는 일(襲明)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섞는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이를 흐리멍덩함의 찬양으로 읽는 일은 정말 흐리멍덩한 독법이다. 마오쩌둥은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 사람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유언처럼 측근에게 남겼다. 평생 루쉰의 작품집을 늘 옆에 두고 즐겨 읽었던 그는 병석에 누워 간병하는 이에게 루쉰의 책에서 ‘썩은 사과를 먹다’란 글을 펴서 읽도록 했다. 사과에 썩은 부분이 있으면 몽땅 내다 버려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당시 문예계의 맹목적인 경향을 루쉰이 비판한 글이다. ‘썩은 사과를 먹는 법’을 아는가 이 글을 손으로 가리키며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 “‘장신구를 만들 때는 순금을 써야 하고, 인물은 깨끗한 사람을 써야 한다’는 사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흠이 있는 사람을 제대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리더는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 기질을 뜯어고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 사람의 성격, 습관, 기질에 맞는 일을 찾으려고 힘쓴다. 마오가 루쉰의 논리를 빌려 말하는 ‘썩은 사과를 먹는 법’이란 이처럼 어떤 사람이 완벽하길 기대하는 대신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임무를 찾아내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논어>에는 주공(周公)이 그의 아들에게 남긴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장점을 두루 갖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無求備於一人. <微子> 10) 이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냐?”는 식의 비아냥으로 남의 허물과 함께 자기 허물도 덮어버리려는 태도와는 인연이 없다. 이런 논의를 한국 정치판을 뒤덮고 있는 ‘패거리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임 또한 말할 나위도 없다. 썩은 사과를 그냥 다 내다버리는 것도 온당한 방법이 아니지만,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고는 사과를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태도는, 대동아전쟁 종전 뒤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본군 전범에 대한 처리에서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전후 연합군쪽에 체포당한 일본군 전쟁범죄자는 6752명이다. 이 가운데 971명이 미, 영, 프랑스, 중국 국민당군 등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가운데 중국 해방군에 체포당한 전범은 1062명이다. 이들은 단 한명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았다. 종신형을 언도받은 사람도 없다. 유죄 처벌을 받은 사람조차 단 45명에 지나지 않으며 1017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대조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관용정책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군 전범들을 잡아 수용한 우순 전범관리소에는 과거 일본군의 만행에 부모형제를 잃은 사람들이 다수 근무를 자원했다. 여기에는 조선족도 몇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 전범을 가까이서 감시하며 일종의 보복이 가능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우는 전범들을 폭행하거나 학대하면 안 됨은 물론, 한 사람도 사형이나 무기형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방침을 내렸다. 전범관리소 간수들은 조밥을 먹으면서도 전범들에게는 쌀밥과 고기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중국의 전범정책은 그들이 자신의 죄상을 진심으로 뉘우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진심으로 뉘우친 전범들은 나중에야 전범관리소쪽이 자신의 죄행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문하거나 자백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탄바이’(고백)할 것을 기다렸음을 알게 됐다. 이들은 1956년 재판을 마친 뒤 대부분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일본의 역사왜곡과 신사참배 등 극우화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노다 마사아키, <전쟁과 인간>) 풀려난 전범들, 일본군 극우화에 반대 저우의 관대정책에 전범관리소 근무자들이 반감을 표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20년이 지난 뒤에는 일본 전범에 대한 우리 당의 관용정책이 옳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마도 혁명 초기의 중국이 일종의 ‘양산박 국가’였기 때문에 이런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정책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저우의 관용정책은 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 똑같이 선하게 대함으로써 선함을 얻는다는 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좋은 사례다.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을 확연히 구분했던 이들의 실천조차 이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leess@hani.co.kr leess@hani.co.kr * 쪽자할 게 두 글자 있습니다. 1. <시경>에서 인용한 글의 원문 뒤에서 두번째 행 : (乃生男子/ 載寢之牀/ 載衣之裳/ 載弄之璋/ …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석/ 載弄之瓦 <小雅·斯干>) ‘석’자 : 옷 ‘衣’(初에서 刀를 뺀 왼쪽) + 바꿀 ‘易’ 2. 여길보의 인용문 원문에서 마지막 행 : (谿之爲物, 受于谷而輸于江海. 受而不拒, 輸而不積. 物之能通而無오者也.) ‘오’자 : 책받침(‘道’에서 ‘首’를 뺀 것) 위에 ‘午’자를 얹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