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parsec ( 먼 소 류 ) 날 짜 (Date): 2000년 11월 26일 일요일 오후 11시 14분 53초 제 목(Title): 노자를 웃긴 남자(74) ※ 아무도 안퍼오시길래... 아이디 하나 빌려서 천랸 들어가서 퍼옵니다. 바퀴 살을 모아 바퀴를 만들고,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고, 문을 뚫어 창을 냄으 로서 방이 생긴다. 그런데 수레와 그릇과 방의 쓰임을 만드는 것은 바퀴와 흙과 창의 빔에서 나온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은 수레의 짐싣는 칸이고, 그릇 의 담을 수 있는 공간이고, 방의 내부이다. 이것이 할아방이 말하는 '용(用)'이다. 먼소류님의 반론은 이 용(用)과 무(無)를 같은 것으로 본 데서 오류가 있다. 할아방의 글을 잘못 읽으면 전체 맥락이 이상해 진다. 바퀴의 빔(살통과 바퀴 테 사이의 공간)은 무(無)이고, 수레의 빔은 용(用)이다. 진흙의 빔(주물러서 비게 만 들 수 있는 성질)은 무(無)이고, 그릇의 빔은 용(用)이다. 창의 빔(뚫어 놓은 상태 )은 무(無)이고 방의 빔은 용(用)이다. 그래서 용(用)은 무(無)에서 나온다는 말들 이다. 그러나 바뜨 할아방이 결코 무(無) 이퀄 용(用)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퀴가 수레인 것이 아니고, 찰흙이 그릇인 것이 아니고, 창이 곧 방인 것도 아 니다. 바퀴는 수레와 떨어져 있을 때는 무용지물이고 빚기 전의 찰흙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며 밀폐된 공간으로서의 방이란 것에 뚫려있지 않을 때의 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수레는 바퀴가 없으면 구를 수 없고, 그릇은 모양을 잡지 않으면 그릇이 아니고, 방은 뚫려져 있지 않으면 막힌 상자에 지나지 않는다. 상자 밑에 발통을 달아야 수레가 되고 찰흙을 눌러서 움푹하게 만들어야 그릇이 나오고 사방을 막아 놓은 박스에 문이란 구멍이 생겼을 때 비로소 방이 된다. 그래서 할아방이 말하고 싶은 것이 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보이는 것이야 말로 눈에 보이는 쓰임을 만들어내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라는 소리다. 때문에 어떻게 해라? 바로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수레가 되지 말고 바퀴 가 되고, 그릇이 되지 말고 주무르는 대로 모양이 잡히는 찰흙이 되고, 삐까번쩍 한 방이 되지 말고 그저 뚫려있는 구멍이 되라는 소리다. 이게 다 앞에서 줄창 해 온 소리들, '없는 듯이 살아라(生而不有)', '몸을 사람들의 뒤에 두라(後其身)', '그저 비어있을 뿐 쓰이지 않는다(虛而不屈,用之不勤)',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不自生) 등등등... 계속 해 온 소리가 다 그 소리야. 용(用)이 아니라 용(用)을 낳는 무(無)가 되는 삶, 그런 삶이야말로 성인의 삶이 요, 천지의 본연이고, 도의 실천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름도 역시 수레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고, 그릇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고, 방 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엄따. 횅 비어있는 바퀴로 살고, 찰흙이면 만족하고, 뻥 뚫 려있는 문이면 좋다는 그런 생각으로 산다. 이 글도 그런 생각으로 쓰는거다. 나는 내 글이 세상에 무슨 도움을 주고, 노자 해석에 새로움을 더하고 이런 생각같은건 갖고 있지도 않아. 내 글이 세상에 눈꼽재기만한 용(用)을 가져온다 해도 그건 나 하고는 별로 관계없는 얘기야. 이래 말항께네 구르미 이퀄은 성인이다카는 결론이 나와부네. 역시 결론은 버킹검이네. 나도 도올이 닮아가는 갑다. 다음 구절 함 보 까? 故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 고유지이위리,무지이위용 '그러함으로, 있음(有)으로부터 이로움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없음(無)으로써 쓰 임새(用)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의 위(爲)는 드물게도 글자의 뜻인 '만들다, 지어내다'가 원 뜻 그대로 쓰이고 있다. 할아방의 말을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 무 │ 유 │ ├────────┬────────┬──────┼─────┬────┤ │ 무의 과정 │ 무의 실체 │ 무의 용 │유의 실체 │유의 용 │ ├────────┼────────┼──────┼─────┼────┤ │바퀴살을 살통에 │바퀴의 빈 공간 │바퀴의 기능 │ 수레 │타거나 │ │모으는 일 │ │ │ │실음 │ ├────────┼────────┼──────┼─────┼────┤ │찰흙 빚는 일 │흙 눌러놓은 부분│그릇의 형태 │ 그릇 │담음 │ ├────────┼────────┼──────┼─────┼────┤ │문 뚫는 일 │문뚫린 자리 │문의 존재 │ 방 │공간 │ └────────┴────────┴──────┴─────┴────┘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들이나 해설서를 보면 할아방이 용(用)을 낳는 무(無)의 예 로서 들어논 것들과 용(用)의 실체인 유(有)를 구분치 못하고 있어. 그래서 이 11 장의 해석을 보면 바퀴와 수레, 찰흙과 그릇, 문과 방이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우왕 좌왕이야. 우리 주인공이야 두말할 필요가 엄써. 첫번째 문장은 '바퀴의 빔에 수레 의 쓰임이 있다' 해놓고는 두번째, 세번 째 문장은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 다',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이카고 자빠지는기야. 한눈에 봐도 첫 문장하 고 두째 세째 문장이 구조가 틀리제? "A의 빔에서 X의 쓰임이 생기고, B의 빔에서 Y의 쓰임이 나오고, C의 빔에서 Z의 쓰임이 나온다' 이렇게 통일이 돼야 돼. 이런 문장을 'A의 빔에서 A의 쓰임이 나오고, B의 빔에서 B의 쓰임이 나오고, C 의 빔에서 C의 쓰임이 나온다'고 읽으면 글이 강아지 풀 뜯어 묵는 소리가 되부리. 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