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Tao ( 烏有先生) 날 짜 (Date): 2000년 11월 21일 화요일 오후 02시 42분 57초 제 목(Title): 노자를 웃긴 남자(73) [주 제] 노자를 웃긴 남자(73) ─────────────────────────────────────── 수레라는 것은 인간이 바퀴의 살통과 바깥 테두리 사이의 빈 공간을 만들어 내었 을 때 비로소 유용성을 갖게 되었다. 바퀴가 디스크처럼 꽉 차 있는 형태일 때는 결코 이용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 수레였던 것이다. 때문에 바퀴의 살이 지나가는 그 빈 공간이야 말로 수레의 유용성을 있게 한다는 것이다. 대단한 직관과 관찰력 에서 나온 말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 특히 요구되는 것이 추론능력이다. 사물 에 대해서 유추하고 논거를 들어 자신을 직관을 설명해 가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덧붙여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추론의 과정에 끌어오는 비유이다. 상황과 논지에 적합하고 어울리는 비유를 가져오는 능력이 없으면 나무없이 집짓자고 덤비는 목수 다. 무와 허의 효용을 설명하는데 할아방이 드는 비유들을 함 봐바. 참 기가 멕혀. '수레의 용은 바퀴의 빔에 있다.' 이렇게 절묘한 비유를 들어도 도올이처럼 못 알아 먹으면 소용이 없는게라. 그 담의 비유도 함 보까? 埴以爲器,當其無有器之用 연치이위기,당기무유기지용 이 구절을 도올이 <노자와 21세기>에서 써논 것을 보면서 도올도 참 한자 모른다 싶었어. '연'자가 안 찍혀서 좀 그렇긴 한데 도올은 이 '연치'를 '선식'이라고 읽 고 있어. 물론 '연'자는 음독할 때 '선'으로 읽기도 하는 글자고 '치' 자도 '식'으 로 읽을 수 있어. 그러나 도자기 만들 때 '흙을 빚어 이기는 작업'은 '연치'지 '선 식'이 아니야. '연치'라는 것은 이미 합성되어 사용되는 하나의 단어야. 이것을 '선 식'이라고 읽는 것도 무식한 짓이야. 보통 사람이면 당근 그렇게 읽을 수 있지. 한 자어 중에서도 일종의 전문 분야의 용언데 그걸 우찌 일반인이 알겄어? 그러나 도 올은 자칭 대동양학자자나. 노자 하나만 수십년을 연구한 사람이고. 그러면 이런 정도는 제대로 읽어야지 안 글나? '연치'도 몰라서 '선식'이라 하는 수준으로 무신 동양철학을 한다 말이고? 도올의 해설도 같이 보자. 『(선)이란 우리말로 "이긴다,""빚는다"의 뜻이다. 埴(식)이란 "찱흙"이다. 도자 기를 만들 수 있도록 가공된 최후의 흙을 도공들은 "질"이라고 부른다. 埴은 곧 " 질"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노자와 21세기> 하권 122쪽 상단 '그릇을 빚기 위해 가공된 최후의 흙'이 아니라 연치는 '흙을 이기고 빚는 작업 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니 이쯤 하고 저 문장의 뜻이 나 알아보자. '그릇을 빚기 위해 흙을 이기는데, 그릇의 쓰임은 그 속이 빈데 있다.'라는 뜻이 다. 차의 쓰임이 바퀴의 빈 공간에서 나오듯이 그릇의 쓰임은 속이 비었기 때문에 나온다는 말이다. 다음 구절도 비슷한 맥락의 것이다. 鑿戶爽以爲室,當其無有室之用 착호유이위실,당기무유실지용 도올은 '착(鑿)'을 원래 끌질하다는 동사(to chisel)라 설명했는데,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영어를 함께 쓰는 버릇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도올이 영어로 같 이 써놓은 것은 대개 잘 모르는 대목이란 뜻이다. <노자와 21세기>에는 이 구절의 해설이 아주 간단하게만 나와 있다. 옮겨 본다. 『"戶"는 자형을 보아 쉽게 알 수 있듯이 여닫이 문의 반쪽이다. 그것이 두 쪽이 다 갖추어지면 "門"이 된다. "爽"(유)는 창이다. 戶는 "door"로 爽는 "window"로 영역될 것이다. "鑿"은 원래 "끌질하다"(to chisel)는 동사이다.』<노자와 21세기> 하권 122쪽 하단 심각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철학'이란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는 학문이 아 니다. 수학처럼 정확하고 과학처럼 치밀해야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문장 하 나 글자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심사숙고해야 하고. 특히 고전의 번역에 있어서는 글자 하나를 살피는 데도 대충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호(戶)'라는 글자는 '여 닫이문의 반쪽'이 아니라 '외쪽문'이다. 어엿한 문의 한 종류이지 문의 반쪽이 아 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방문들은 전부다 문(門)이 아닌 호(戶)이다. 방을 만드는 데 문(門)을 달아서야 될 일인가? 물론 고관대작이나 대학자의 저택이라면 방마다 문(門)을 낼 수도 있겠지만 구름 같은 서민의 집들은 대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 고 '착(鑿)'은 '끌질하다'는 의미의 'to chisel'가 될 수 없다. 끌을 한자로 '병착 (柄鑿)'이라고 하지만 '착(鑿)'이란 글자 하나만의 의미는 '뚫거나 관통하여 열다' 가 된다. 영어로 하면 'opening' 또는 'drilling'이다. 해설하는 부분에서는 '끌질 하다'로 설명을 해 놓고 이 장에 대한 전체 번역에서는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 다'라고 제대로 해놨다. 번역에도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헷갈리게 만들뿐일 말들을 실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자 실력을 과시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들키고 싶어 서일까? 자랑치 않으면 안 들킬 것을 굳이 내세워서 우사를 자초하는 이유는 무엇 일까? 나는 도올의 책을 읽다 보면 신기한 점이 너무나 많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재미 때문에 도올의 책을 사보는 것일까?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방의 쓰임은 바로 방의 빈 공간에서 나온다'라 는 이 구절의 뜻은 어려울 것이 없다. 문제는 왜 할아방이 자꾸 되풀이 무(無)와 허(虛)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 회에 그것을 알아 보자. 이번 회는 그냥 도올의 무식을 확인하는 것으로 소비해 버렸다. 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