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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2000년 11월  5일 일요일 오후 01시 03분 23초
제 목(Title): 노자를 웃긴 남자(29)   



◎ 이름:구름 
◎ 2000/11/04(토) 16:45
 
 노자를 웃긴 남자(29)   



[주    제] 노자를 웃긴 남자(29)
───────────────────────────────────────

 절구와 피리라는 물건은 사람이 그 속을 파서 비게 만든 물건이다. 이 빈 것이

절구와 피리를 쓸모 있는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공적인 빔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의 부가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절구는 공이로 부지런히 찧어야 곡식이 빻아지고  피리는 입과 손을 열심히 움

직여야 소리가 난다. 열심히 할수록 더욱 많은 곡식을 빻고 더 요란한 소리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절구질은 세게 할 수록 가루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세게 불면 음이 깨져서 나온다. 이게 바로 '동이유출(動而愈出)'이다. 그러나 천

지 사이의 공간은 열심히 움직이지 않아도 부지런히 애쓰지 않아도 그 빔은 비어

있다는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 바로 짜부러지지 않고 우주를 받치는 '허이불굴

(虛而不屈)'인 것이다.

 그래서 할아방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다언삭궁(多言數窮),

불여수중(不如守中)'이다. 즉 절구나 피리를 불 때 너무 세게 하면 곡식가루나 음

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 많으면 금새 막히니 가슴 속에 아껴둠만 못하다'

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보고 아무 소리 안하고 성인이 백

성들을 간섭하지 않으며 천지간의 공간이 비어있음으로써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본받고, 절구와 피리처럼 경망되이 움직여 쏟아내지 마라. 모름지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모쪼록 말을 아껴 가슴속에 담아 두라. 이런 가르침이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니라' 얼마나 좋은 말이고?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마음속에 담아 둠만 못하느니라.'는 할아방의 이 말

씀은 도올이 명심해야 될 소리제. 사람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 가지가 따라서

많아지능기야. 틀린 말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많아지고, 책임 못질 말이 많아진다

말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빠지게 되능기야. 요시 사람이 비명에 횡

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이 뭐고? 교통 사고제.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비명에

돌아가시는 이유 중에 으뜸이 뭐였겠노? 바로 말이다. 횡액의 대부분이 말에서 비

롯됐다. 연산군이 대신들한테 걸어준 묵언패의 내용이 '입은 화를 부르는 구멍이

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였자나. 그래서 현대인들은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고 옛날 사람들은 말을 안하면 죽을 일이 없었다. 말로써 궁지에 몰리기는

백성들이나 위정자나 범인이나 군자나 다를 바가 없었제. 옛날 같았으면 도올같은

촐삭이는 그 입 때메 벌써 인생 종치고 날샜을낀데 세상이 좋다봉께 아매 죽을 때

까지 헛소리 나발을 불 수 있으끼야. 그기 다 세상을 잘 타고난 덕분이제. 하지만

할아방 당시에는 나발 잘못 불면 바로 가는 수가 있었다. 가도 지혼자 가는기 아이

고 불쌍한 지 처자식에 삼대까지 델꼬 갔다 말이다.

 그래서 할아방이 말하기를 대저 성인은 백성들을 추구를 보듯이 하여 간섭치 않

고 장담도 하지 않고 약속도 아니하며 거짓말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말을 아끼라

고 재삼 당부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말을 아끼면 백성들은 위정자의 말에 따라 흔

들리지 아니하고 약속을 하지 않으면 기대를 하지 않고, 장담을 하지 않으면 믿지

도 않으며, 거짓말을 아니하면 분노할 일도 없으므로 그저 묵묵히 지 할 일이나 하

며 산다는 야그다. 그래서 불행해도 당연, 행복해도 당연, 그저 그런 것이려니, 이

게 인생이거니 하고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라

고 할아방은 보는 것이제.

 자연(自然)! '천지지간(天地之間)은 텅 비었으므로 굽히지 않는데, 사람은 탁약

과 같이 경망되이 움직이고 말이 많아서 자주 궁지에 몰리는도다. 모름지기 다언삭

궁이니 불여수궁이니라!'

 이쯤에서 도올의 번역과 해설을 또 아니 보고 넘어갈 수는 엄찌. 함 보자. 도올

가라사대,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라 해

놨다. '수중(守中)'을 '그 속에 지킨다'로 풀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그

속'이 아니라 '흉중(胸中)에' 또는 '가슴 속에'라고 약간 말을 꾸며주는 것이 자연

스럽다. 꾸밀 때 꾸미고, 꾸미지 말아야 할 때 꾸미지 않는 것이 좋은 번역의 첩경

이다. 직역이 더 어울리는 대목에서 억지 멋을 부리거나 가미해야 할 때 무미하게

두는 것은 훌륭한 번역문이 못된다. 도올의 번역은 엽기적인 오역과 악역의 점철일

뿐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 비슷하게 겐또친 것조차도 그 꼬라지가 한심하다.

 그런데 더 사람을 식겁시키능기 도올이 해논 해설이다. 번역보다 해설은 더 죽

인다. 21세기의 명작 <노자와 21세기> 상권 230쪽에 보면,


  『그러나 노자철학을 총괄해서 보면 그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분명 어떤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무엇인가?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바

    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

    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항상 도는 스스로 그러할 때, 빔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빔을 채워버리는 방향, 그 빔

    을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는 방향으로의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함

    이 없음(無爲)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빔을 유지하는 함이요,

    그 빔을 유지하는 함이야말로 바로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當爲가 아니라 自然이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를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

    둘 때는 반드시 스스로 그러하게 허를 유지한다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가

    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有爲的 행동만이 빔을 유지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함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存在의 自然이다. 여기서

    우리는 虛와 無爲와 自然이 하나로 노자철학에서 관통되고 있음을 발견한

    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道의 쓰임(用)이다.』하고서는, 박스까지 두르고

    아래와 같이 도식을 그려놨다.


    ┌────────────────────────────────┐
    │                                                                │
    │     빔(虛)≡함이 없음(無爲)≡스스로 그러함(自然)≡쓰임(用)     │
    │                                                                │
    └────────────────────────────────┘


 도올이 얼마나 노자 사상을 모르는지 이 표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도올의 강의

를 듣거나 책을 읽고 행여 사람들이 노자를 자연주의자로 오해하게 될까봐 걱정스

럽다. 노자는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위의 도식을 바로 잡으면 다음과 같다.


┌───────────────── ───────────────────┐
│                                                                         │
│도(道)≡빔(虛)≡본래 그대로(無爲)≡스스로 그러함(自然)≡쓰임이 없음(無用)│
│                                                                         │
└──── ────────────────────────────────┘


 노자는 앞에서 '이용지혹불영(而用之或不盈)'이라 하여 '도무용(道無用)'임을 명

백히 한바 있다. 적어도 하나의 사상 체계가 되고자 하면 앞 뒤 말에 어폐가 없어

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앞에서 '아'라  했던 것을 뒤에 가서는 '어'

라 하는 수상쩍은 구석이 보이면 그것은 이미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석가세존 80

년 설법의 어디에 앞뒤가 안 맞는 소리가 있던가? 도올이 번역한 노자의 어디에 앞

과 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던가? 도(道)는 허(虛)로써 무용(無用)이지, 결코 실

(實)로서 용(用)이 아니다. 도(道)는 모든 실(實)이 나오는 허(虛)요, 모든 용(用)

을 낳는 무용(無用)이다. '도(道)=용(用)'이란 등식을 그리는 인간이 우찌 노자를

아는 인간일 수가 있겠노? 소가 웃을 일이제. 그람 이 인간이 노자를 강의하는 꼬

라지는 뭐겠노? 소가 웃지도 못할 일 아이겠나?

 우쭝이가 그랬나? '세상은 넓고 챙길 돈은 많다'고.

 인생은 길고 시간은 많다. 서두를거 뭐 있겠노? 쉬어 가면서 하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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