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2000년 2월 19일 토요일 오후 12시 25분 16초 제 목(Title): 차연과 파르마콘 아주 오래 전에 봐서 제목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영화인 데, 어느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고 높은 산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는 천지 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 나의 승리에 감사하고, 패배에도 감사하고...' 나는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잘 이해는 안 돼었지만... 바로 여기에 '차연'의 의미가 나타난다. 승리는 패배가 있기에 그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승리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승리는 '승리-패배'라는 차이의 구조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인디언 추장의 삶을 전쟁으로 점철된 것이라고 봤을 때 그 추장의 일생은 승리와 패배라는 차연으로 짜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추장의 일생도 차연으로 짜여진 하나의 텍스트인 것이다. 그의 승리는 패배 후의 반성에서 이뤄진 것일 수 있고, 그의 패배는 승리 후의 자만에서 오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승리에는 이미 패배가 예감돼어 포함되어 있고, 패배에는 승리가 예감되어 있다. 데리다는 이것에 '흔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승리에는 패배의 흔적이 묻어있고, 패배에는 승리의 흔적이 묻어 있다고 말한다. 포스트 구조주의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이 '차연' 개념의 재발견에 있다. 모든 가치는 절대적이 아니고 바로 차연의 구조 하에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차연'의 개념은 노자 2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때까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던 논리가 포스트 구조주의와 노자의 이 차연 개념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 차연이란 한 가지 때문에 이 전 서양 형이상학을 비롯한 전 학문 체계가 모조리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데리다는 차연의 가장 간단한 예로 '파르마콘(pharmakon)'이란 것을 든다. 이것은 플라톤의 '파이에드로스(?)'에 나오는 말로 '독당근'이라고 번역하는 데, 藥이면서 동시에 毒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현대 의학에서도 모든 치료약은 동시에 독이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는 상식적인 얘기이다. 아편이 진통제도 되지만, 과용하면 고통스런 마약 중독의 후유증에 시달릴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약은 파르마콘임을 알 수 있고, 이러한 파르마콘의 예는 수도 없이 우리 주위 가까이에서 손쉽게 들 수 있다. 즉, 파르마콘은 한가지의 절대적 가치가 아닌 두 가지의 상반된 가치를 함께 지닌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가치는 이런 상반된 두 가지 이상의 가치를 함께 지닌 파르마콘 또는 차연으로 이뤄져 있다. 그 동안의 서양 형이상학이나 과학에서는 이러한 파르마콘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한가지의 고정된 절대적인 가치에만 매달리는 닭질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동양에서도 일찌기 2500년 전에 얘기한 노자의 차연적 의미를 보지 못함으로써 같은 닭질을 되풀이해왔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파르마콘의 가장 오래된 예를 볼 수 있는 것은 구약 성서의 창세기이다. 바로 에덴을 잃게 되는 원인이 되는 사과가 바로 파르마콘이다. 이 사과는 선악과이다. 이 사과를 아담이 한 입 깨물어 먹는 순간에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선과 악을 별도의 다른 것으로 절대 구분을 하게되면서, 신에게 내쫓겨 인류의 길고도 힘겨운 문명의 역사로 들어섰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차연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선에는 이미 악의 흔적이 묻어 있고, 악에는 선의 흔적이 묻어 있다. 즉, 선과 악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 파르마콘인 것이다. 에덴 동산의 관리인 입장인 신은 바로 이 차연적, 파르마콘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인간은 헛된 분별심을 가지게 되어 선과 악을 제멋대로 구분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서로 비난하고 다투고 피를 보는 비극의 역사에 들어섰다는 의미를 이 사과라는 파르마콘으로 나타내고 있다. JMS는 이 사과를 성적으로 해석한다. 아담이 사과를 물었을 때, 성적인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신화학에서 사과는 여자의 봉긋한 가슴을 상징한다. 중세 이후 유럽의 시인들 뿐만아니라 무수한 시정잡배들도 이 사과라는 비유로 여성의 가슴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리고, 뱀으로 나타나는 사탄은 남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영화 '우나기'에서 뱀장어도 같은 것을 상징한다. 주인공 남자의 성적인 무능력은 뱀장어 같은 성적인 능력을 무의식적으로 열망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뱀의 유혹으로 이 사과를 깨물었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욕망에 굴복해 성행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것은 이때부터 인간이 성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얘기로 많이 해석한다. 그 때부터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시작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행위나 나체를 부끄럽게 보는 것은 인간의 자의적인 헛된 분별심의 결과인 것이다. 즉, 성행위는 부끄럼과 신의 축복인 기쁨이라는 것으로 이뤄진 파르마콘인 것이다. 이러한 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신이 그 몸을 만들어주고 신이 번식의 기쁨으로 내려주신 성행위를 인간이 오만하게 부정했으니 에덴에서 쫓겨나도 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JMS식 해석은 선악과라는 파르마콘을 둘로 쪼개어 구분했다는 해석의 아주 작은 부분, 성적인 면만을 부각시킨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선악과을 따먹은 의미를 인간이 자연을 황폐화 시킨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즉, 인간과 자연은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것인데, 인간은 자연을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동물들을 남획해서 멸종시키고 자연을 황폐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자연이란 인간이 생존해나가는 모태인 환경이자 이용 수단 이란 두 가지면으로 이뤄진 파르마콘인데, 인간은 자연을 이용 수단이라는 한가지 가치로만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자연 파괴의 결과로 맘모스 같은 많은 거대 동물이 멸종하는 바람에 수렵 채취 시대가 끝나고 농경 시대로 들어간다는 사건이 에덴에서의 추방이라는 신화의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는 의견인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에덴 추방 후에 아담의 후손들은 일생동안 땅을 파며 땀을 흘리는 벌을 받게 된것이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인간들은 에덴 추방 이후에도 거의 만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자신이 무엇을 잘 못했는 지를 깨닫지 못하고, 즉 사과의 파르마콘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노자와 포스트 구조주의는 바로 이 사과라는 파르마콘의 의미를 비로소 가르켜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