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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7년02월15일(토) 18시10분23초 KST
제 목(Title): 왜 다시금 국학인가 [한겨레21]


왜 다시금 국학인가 

                         한형조/ 정신문화연구원 교수·철학 

                         우리 학문을 새로 찾고 세워야겠다는 논의가
                         뜨겁다. 그러면서 국학 혹은 한국학의 이름 아래
                         잊혀져가는 한국의 풍물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며,
                         우 리의 제도, 문화, 사상의 가치를 창조적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더 높고
                         강고한 목소리가 이 흐름에 저항한다. 21세기 정
                         보화 무한경쟁시대에 그동안의 노력으로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정착시켜가는
                         판에 무슨 시대착오적 발상이냐고 핀잔을 준다. 아
직까지 싸움은 평행선을 긋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근대사의 경험이
학문에 지운 원초적 상흔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투성이 국학의 역사 

이제 왜 다시금 국학(國學)인가. 국학이란 말의 근원은 일본이다. 도쿠가
와 후기 일본은 서양문물과 접하면서 오랜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는 민족
적 각성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는 구분되는 일본의 정체성을
확인 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고학(古學)과 국학(國學)으로 나타났다.
고학 이 중화문명을 객관화하려는 준비작업이었다면 국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나가는 적극적 작업이었다. 국학은 일본의 근대를
정초시킨 사상적 보루로 기능했다. 한국의 국학은 그러나 영광의 길이
아니었다. 서구열강 에 주눅들고 일본에 강점당한 뒤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국학이 대두했다. 일본이 그 이른바 정체성론이니
타율성이니 당파성이니 로 한국민을 멸시하고 억압하고 있을 때
민족전통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외세에 저항하고
독립을 고취하는 민족적 단결을 노 린 것이 그 당시의 국학이었다.
신채호의 역사서술과 <여유당전서>의 간 행이나 이른바 <실학>의
천양이 동일한 문제의식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60, 70년대의 국학붐은
성격이 좀 다르다. 이것은 앞에서 예를 든 일본의 경우와 비견될 수
있겠다. 타의에 의한 분단과 냉전체제에 편입된 한국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근대화를 성공시킨 뒤, 얻은 자신감으로 민족적 자아 와
정체성을 국제무대에서 확인하고 선양하고자 했다. 그 당시의 국학붐 은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자주국방과 자립경제의 움
직임과 궤를 같이한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정황은 그때와는 아주 딴판이다. 세계는 하나의 블
록, 이른바 지구촌시대가 되었다. 문명의 원리와 관행은 좋든 싫든 서구
근대가 발전시킨 그것으로 보편화되었고, 한국은 뒤늦은 걸음이었지만
훌 륭하게 그것을 소화시켜나가고 있다. 그런데 어쩌나, 저쪽
선두쪽에서는 벌써 문명의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읽고 있으니.
20년 전의 대학 시절, 나는 토인비가 전 인류의 멸망을 예고하고 지구적
수준의 통합정부 를 촉구하는 글을 읽었을 때 느꼈던 곤혹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 위기가 이제 우리의 피부에 절실하게 와닿고 있다. 

지금 ‘근대 이후’의 다양한 징후에 대해 또 그만큼 다양한 담론이
횡일 하고 있다. 이는 20세기말의 지금이 새로운 문명을 향한 전환기라는
것을 반증한다. 전환기는 다양한 사유의 실험을 요청한다. 특정한
원리가 지배 력을 잃고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 불확실성은 새로운
질서의 모색으로 이어지고 그 모색은 기존에 무시되었던 다양한
레퍼런스를 묵은 책갈피나 금기의 봉인으로부터 끌어낸다.
전환기야말로 주변적 사유에는 다시 없는 호기인 것이다. 

전환기의 선두적 징후는 ‘근대’의 모체인 과학에서 왔다. 이원자와 양
자역학의 발견, 그리고 생태와 전체성의 발견은 근대과학의 원자론적 세
계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고, 그 패러다임 위에 정초해 있던
인문 사회과학의 담론들을 심각하게 수정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과학은
동양적 사유와의 근접성을 모색하고 있고 그 성과 또한 괄목할 만하다. 


죽은 과거로의 회귀를 경계한다 

(사진/전통이라 하여 무조건 존중하고 경배하는 태도는 국학이 천양하는 실학적 
태도가 아니다. 고구려 수렵도 벽화.)

이를 두고 동양적 세계관이 새로운 물리학의 원론을 제공해주고 있다거나 생태적 
각성이 동양적 가치의 우월을 증거한다고 우쭐하는 것은 근거없는 자만일 것이다. 
근대를 거친 반성과 ‘변명’으로의 자만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 동양은 아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객관적 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
서양은 스스로를 인식한 바탕 위에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기 위해 혹은
자신들 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과는 다른’ 동양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들과 대등한 타자로서 독자적인 문화와
의식의 정 체성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대화’는 자기를
지움으로써가 아니라 자기를 드러냄으로써 성립한다! 

그리하여 동양학, 특히 국학은 그동안 과거와 전통 속에서 과연 무엇이
동양적이며, 무엇이 한국적인가를 확인하고 발굴하고 정리하고
보존하는 데 힘을 들여왔다. 일제 식민지 이래 지속된 선학과 유지들의
노력의 결 과, 우리는 훨씬 많은 정보, 심도있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더 많은 물질적 심정적 지원이 가해져야 한다. 이 말은
특히 정책 입안자나 재정후원자,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다. 

장외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촉구하되 그러나 장내에 있는 사람은 그
같은 노력에 안주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함께 덧붙여야겠다.
연 구자들은 우리가 왜 이 시점에서 그같은 골동적 작업을 해야
하느냐를 끊 임없이 물어야 한다. 옛적에는 생활필수품이었던 농기구를
지금은 박물관 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우리것이라 하여 전통이라 하여 무조건 존중하고 경배하는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국학이 천 양하는 실학적 태도가 아니다. 

동양이나 전통은 회고적 환상의 박제가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
된 다. 동양은 이제 확산을 주조로 한 서구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역기 능을 순치할 적극적 대안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 죽은
과거로의 전통 , 역사적 흔적으로의 동양에 대한 회고적 즉물적 연구를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그러므로 국학 혹은 한국학을 “한국이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하 는 모든 분야의 학문연구”라는 식으로
‘가치중립적으로’ 정의해서는, 단언컨대 국학이든 동양학이든
미래는 없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 임없는 대화라는 카(Carr)의
교과서적 발언이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크로체의 말을 상기한다.
텍스트는 한 시대나 개인의 상황과 요청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달리
읽히게 마련이고 또 그래야 한다. 


동아시아 3국의 동양학 태도는… 

다가올 “응축의 문명”의 형성에서 동양학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 는 사람들은 오히려 서구의 지식인 학자들이다. 동아시아
삼국에서 이 문 제에 대한 인식은 고르지 않다. 일본은 근대화에 대한
성공에 취한 나머 지 전통이나 동양적인 것의 미래적 가능성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이다. 중 국은 오랜 사회주의적 관행에서 벗어나 이제 막
개방과 혁신으로 근대화 산업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은 당면한
과제에 동양의 비합리적 주정 적(主情的) 계급문화적 전통이 심각한
장애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유독 한국만이 근대화에 대한 일정한 성공을
바탕으로 동양적인 전통의 유산을 진지하고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동양학의 가 능성은 동양 삼국 가운데
한국에게만 열려 있다. 텍스트와 담론의 원초적 조건에서 한문의
종주국인 중국에 밀리고, 문화적 학문적 기질과 여건 탓 에
고전번역이나 연구의 축적에서 일본에 뒤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양학의 프래그마틱한 인식인 바, 이 점에 있어 한국은 가
장 뛰어난 자산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여, 우리에게 지워진 짐은 무겁
고 길은 멀다(任重而途遠)!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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