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3월08일(수) 14시56분57초 KST 제 목(Title): 신역도덕경6-8장 제목 : 신역도덕경6-8장 #816/1207 보낸이:이은봉 (Eu173 ) 01/08 10:55 조회:45 1/7 제6장 成象: 눈에 보이지 않는 도이나 현상계를 낳는다. (1) 골짜기의 신[谷神]은 죽지 않으리니, 이를 일러 玄牝(신비스러운 암컷)이라 하는도다. 玄牝의 門, 이를 일러 天地의 뿌리라 하느니라. (2) 영원으로부터 연이어져 온것 같으며, 써도 써도 지칠줄 모르는도다. [谷神不死.是謂玄牝.玄牝之門,是謂天地根.綿綿若存.用之不 勤] [감상:도가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 하는 질문은 무의미한 물음이 라고 봅니다. 도는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닌, 남여양성을 초월 하는, 혹은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兩性俱有라고 할 수 있겠습니 다. 그런데 노자는 도를 곧잘 여성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 다. 옛날 서양 중세의 스콜라철학자들도 천사는 남성이냐 여성이 냐 하고 토론을 하였다고 하는데, 할일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생각 도 들지만 그들의 한가로움에 일면 부럽기도 합니다. 하여간 여 성은 生育의 원형입니다. 그 여성을 玄牝이라 하고 天地根이 된 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덕경에서 玄字를 붙이는 경우에는 mystic 한 경우, 즉 우리의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용할 때 사용하는데, 이 경우는 만물을 낳는 암컷의 신비를 지적한다고 할 수 있읍니다. 이 詩에서는 모든 현상계가 도에 뿌리를 두고 생겨난 것인데, 어떻게 그 현상계를 낳고 있는지 우리의 감각으 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뜻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玄牝 입니다. 도의 낳아서 기르는 힘이 얼마나 생명력이 넘치는 것인 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구절이 (3)련에서 '영원으로부터 연이어 져 온것 같으며, 써도 써도 지칠줄 모르는도다'라고 읊고 있습니 다.] 제7장 韜光: 영원한 빛이지만 빛을 숨기고 있는 도. (1)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구원(久遠)하도다. 하늘이 영원하고 땅이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천지는 영원하고 오래 살 수 있느니라. (2) 이런 까닭으로 聖人은 자신을 [남보다] 뒤에 둠으로써 남보다 앞서게 되고 그 몸을 [남을 위해] 버림으로써 영원히 살게 되는도다. 이는 [聖人이] 私心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聖人은]결국 이렇게 해서 자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라.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是以聖 人後其身而身先.外其身而身存,非以其無私邪.故能成其私] [감상:하느님은 아가페적 사랑을 하는 분이라는 소리를 줏어들은 사람이 있어도 노자의 이 싯구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입니 다. 여기서는 도가 일방적으로 인류에게 무한히 베풀어주면서도 아무런 생색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성인도 그 도를 본받 아 인간에게 무한히 덕을 베풀면서도 아무런 생색을 내지 않는다 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와 하느님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이런 말이 되겠는데,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겠습니까? 진정으로 도와 하늘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철이 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에게 작은 것을 고맙게 하는 것은 우리의 지각에 쉽게 포착이 되니까 감사를 하지만 너 무 큰 것을 고맙게 하는 것은 우리의 지각에 포착이 되지 않으니 까 고마운줄을 모르는 것이지요...그런데 가끔 시한부 인생을 사 는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내 생명이 주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함을 느끼고 감사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잠시 철이 드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물론...내가 얼마나 자연의 축복속에 있는지, 자연이 나에게 무 엇을 요구하던가? 그저 순수한 본심을 잃지 않는다면 알 수 있는 자연의 축복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임종 때에나 잠시 그 본심을 되찾으니 한심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여간 이 詩가 좀 어렵습니다(노자의 詩치고 어렵지 않은 詩가 있는가?).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이 '영원한 빛이지만 빛을 숨기고 있는 道'를 진정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2)련에서 말하는 성인처럼 남의 뒤에 서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 이 원칙적으로 사람이 타고난 본심이고 도의 본질을 구현하는 인 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휴~ 말이 너무 심각해지는군...못 해 먹겠네] 제8장 易性: 최고의 善은 물과 같다. (1) 最高의 善은 물과 같도다. 물은 능히 萬物을 이롭게 하되 만물과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處하는도다. 그러므로 물은 道에 가까운 것이니라. (2) [聖人은] 善地[가장 좋은 곳, 낮은 곳]에 居하고, 善淵[가장 깊은 곳, 그윽한 곳]에 마음을 두고, 善仁[최고의 仁,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善信[최고의 성실성]을 말하고, 善治[최고의 질서]로 다스리고, 善能[최고의 效能]으로 일하고, 善時[가장 적합한 때]에 따라 움직이느니라. (3) 대저 [道,물,聖人은]아무와도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느니라.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處衆人之所惡,故幾于道.居善地, 心善淵,與善仁,言善信,政善治,事善能,動善時,夫唯不爭,故無 尤] [감상:너무도 유명한 구절 上善若水, 아리스토텔레스의 至善도 노자처럼 이렇게 구체적인 비유로 설명하지는 못했지...노자는 천성적인 시인이야, 좀 짓꿎은 반어법을 사용하는 괴짜이긴 하지 만...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감상문을 써야 하니까 물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물은 낮은 곳을 향해 흘러 갑니다. 흘러가다가 장애물이 있으면 옆으로 피하거나 기다렸다 가 넘어갑니다. 장애물과 다투지 않습니다. 흘러가다가 웅덩이가 있으면 채워주고 갑니다. 유행하는 어떤 소설처럼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남이 싫어하는 곳에 기꺼이 찾아갑니다. 이것이 노자가 도를 물로 비유한 요점인데, 물질 중에서는 가장 부드러운 것이 물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물은 神이기도 하였습니다. 물에 관해 서 상상력을 펼치면 끝이 없는 일이므로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냐 하는 규범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물의 속성을 체득하고 살면 도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 은 물과는 정반대의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사람은 남의 밑 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남의 결점을 보면 그것을 채우고 가지 않고, 즉 물이 웅덩이를 채우고 또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 는 것처럼 가지 않고 인위적으로 은근히 교묘하게 그 결점을 들 춰내어 자신이 우위에 서려고 합니다. 그러한 인간의 심리를 알 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위선적인 태도를 취합 니다. 이렇게 하여 점점 더 도에서 멀어지고...지랄같은 인생의 드라마가 엮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물의 미덕은 모든 善의 원천이 면서도 자신이 선의 원천임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