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CH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POSTECH ] in KIDS
글 쓴 이(By): EltAeB (몸부림)
날 짜 (Date): 1998년01월31일(토) 14시12분49초 ROK
제 목(Title): 인간 김호길 - 그의 버클리 시절 (2)


다음은 박정권의 붕괴에 뒤따라,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정착하느냐
또는 군사독재가 계속되느냐의 내기를 했다.  김호길 박사는 스탈린의 서거 
직후 수도 수호군 사령관이 모스크바를 점령했듯이 서울은 수도방위 
사령관인 전두환이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에게는 전두환이란 이름은 
들어보기조차 처음이었다.

1979년 11월말에 나는 부친의 상을 입고 계엄령이 깔린 서울에 
들어 갔었다. 삼 김씨가 한국의 민주화를 부르짖을 때였다.  나는 김호길
박사에게서 주워들은 '전두환 설'을 얘기했다가 서울의 어느 주요 신문사의 
주필인 친구에게서 "한국 국민의 정치적 역량을 무시하는 망언을 한다"는 
꾸지람을 들었다.  또 다시 역사는 교묘하게 돌아가서 12.12사건이 일어나게
되니, 나는 김호길 박사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호길 
박사는 기득권자, 특히 기득권 독재자의 막강한 힘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던 모양이다.  바둑판의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앉은 집은 허물어 
트리기가 불가능한 것을 바둑을 오래 둔 김호길 박사는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게다.

나는 1979년 12월에 로렌스 버클리 실험소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그때부터는 같은 빌딩에서 일하며 김호길 박사와 매일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게 되었다.  그때 김호길 박사는 20년 가깝게 중절했던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아마 귀국할 준비였는지도 모른다.  줄곧 레인지에 나가서 
공치는 연습을 끈질기게 일년 나마를 한 다음에는 필드에 나가기 시작했다.
과학연구에도 도전하기 전에 실력을 기르는 김호길 박사의 태도와 맞먹는 
일이었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아침에 김박사를 만나면 으례 "어제는 
93을 쳤다"느니 "96을 쳤다"느니 또는 "전반 나인홀에 44를 쳐서 이번에는 
90을 깨는 줄 알았더니 후반에 가서는 그만."하는 얘기로 아침 인사를 
대신했다.

그 당시에 김호길 박사가 한 말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이 많다.
그 가운데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중용이 좋은 길이다."라든지 "사대사상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분명히 김호길 박사가 한문에 조예가 
깊은데에서 온 말이었다.  또 생각나는 말이 있다.  김호길 박사가 
말하기를 "온 가족이 미국 시민권을 받으러 이민국에 갔었는데 나는 도저히 
한국 국적을 버릴수가 없어서 안 받기로 했더니 아들 둘도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 시민권을 안 받더라.  그래서 우리 집에는 아내와 딸아이만 미국시민이 
됐고, 남자는 모두 한국 국적을 갖게 됐다."라고 했다.

카터 대통령에서 레이건 대통령으로 넘어가던 1980년도 초기의 
미국 경제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국립 실험소들도 궁핍한 재정의 압력을 
많이 받아 실험소의 경영진은 근시적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을 때였다.
그럴때에 버클리 실험소의 상급 연구원 회의에서 김호길 박사는 "실험소의
먼 장래를 바라보는 비젼을 역설해서 실험소 소장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모두 바른 말이었다.  김박사는 열을 올리고 영어로 말하다가 가끔 
흥분해서 말이 막히면 영어의 "웰....." 대신에 "거시키....."라고 
우물거리며 다음 말을 찾았다. 나는 김호길 박사의 "거시키"를 들을때마다 
혼자서 배달민족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짓곤 했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