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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NU ] in KIDS
글 쓴 이(By): youngox (  황소영)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16시25분12초 KDT
제 목(Title): 깊이에의 강요  [1]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
    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
    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이틀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잘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
    가 없다.


      젊은 여인은 골똘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소묘
    를 들여다보고 낡은 화집을 뒤척거렸다.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아직
    작업중인 것들까지 전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물감통 뚜껑을
    닫고 붓을 씻은 다음 산책하러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초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비평을 외우고나  있는
    듯이 그림들이 첫눈에 일깨우는 호감과 많은  재능에 관해 연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기울여 들으면 뒤편에서 나지막이  주고
    받는 소리와,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젊은  여인은 들
    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
    게 깊이가 없어요.]

      그 다음 주 내내 그녀는 전혀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말없이 집
    안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
    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깊은 바닷속에 사는  무지막지한
    오징어처럼 나머지 모든 생각들에 꼭 달라붙어 삼켜 버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두 번째 주,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어설픈
    구상이 고작이었고, 때로는 줄 하나 긋지 못하는 적도 있었다.  마침
    내는 온몸이 떨려 붓을 물감통에 집어 넣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질렀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세 번째 주, 그녀는 미술 서적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화랑과 박물관들을 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
    론 미술 이론 관련 서적들도 읽었다. 그러고는 서점에 가서 점원에게
    가장 깊이 있는 책을 한권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인가
    하는 사람의 책을 받아 들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립 박물관에서 개최된 <유럽 소묘 5백 년>이란 전시회에서  그녀
    는 어느 미술 교사가 인솔하는 학생들을 따라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
    치의 그림 앞에서 불쑥 앞으로 나선 그녀는 물었다.

      [실례지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술 교사는 그녀를 보고 비죽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보다는 더 나은 것을 생각하셔야죠. 
    부인.]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젊은 여인은 몹시 비통
    하게 울었다.

      젊은 여인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화실을 비운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깨어 있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도 자신이 무
    엇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피곤해지면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잠이 깊이 들까  두
    려워 침대에 눕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밤새도
    록 불을 켜두었다.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베를린에 있는 어느 미술품 상인이 전화를 걸어 그림 몇 장을 청했을
    때, 그녀는 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그녀는 간혹 점토를 반죽할 때도 있었지만 특별히 무엇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후비거나 경단 모양의 작은 덩어리를 빚
    었을 뿐이다. 그녀의 외모는 피폐해져 갔다. 옷차림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집 역시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여 점차 폐가로 변하였
    다.






    .B-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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