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ongJi ] in KIDS 글 쓴 이(By): aeolus ( 바람의딸 ) 날 짜 (Date): 2001년 8월 20일 월요일 오후 12시 24분 27초 제 목(Title): 북경방문기 - 3 7월 28일 일요일 > 기상에서 출발까지 아침 7시 반까지 나오라던 가이드의 말을 무시하고 싶진 않았지만 울린다던 모닝콜이 제때에 울리지 않아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뒤늦게 일어나 급하게 후다닥 준비를 하고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물론 늦은 줄은 알지만 그래도 하루종일 걸어다녀야하고 점심시간까지는 멀었으므로 먹기로 했다. 기대를 하고싶진 않았지만 혹시나 했다. 역시나. 밥을 먹는다기보단 굶지않기위해 대강 떼우고 로비로 갔다. 로비에는 다들 일찍들 나와있었나보다. 우리 호텔 앞에는 광혜 병원이라는 매우 큰 규모의 병원이 있는데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밖에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 아니면 일요일이라서 더욱 더 그런 것인지 - 많은 시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그 병원은 특히 안과를 잘 봐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다고 한다. 중국은 의료 시설이 턱없이 부족해서 병원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돈도 많이 드는데 돈이 많아도 병원이 부족하여 진료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북경이 이러하니 다른 곳은 어떨지 안봐도 상황이 짐작이 갔다. 우리는 인원점검(이라봐야 열 명 뿐이지만)을 마친 후 버스에 올라타고 오늘의 첫 코스인 만리장성엘 갔다. > 만리장성 아침부터 무지하게 내리쬐었다. 벌써부터 지칠 기색이 완연했다. 날씨만 좀 서늘했어도 관광이 한층 더 즐거웠을 텐데말이다. 만리장성은 북경의 외곽에 있어서 차로도 1시간을 넘게 갔다. 요즘 북경도 서울과 같이 집값이 크게 올라서 외곽에 집을 얻고 북경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들 한다. 북경 중심지 노른자위는 아파트 한 채가 우리 나라 돈으로 1억에서 1억 5천을 한다니 물가를 고려해 볼 때 만만찮은 시세였다. 이윽고 만리장성의 입구까지 왔다. 이른 아침부터 웬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여기까지는 장성에 올라가기 전이고 우리가 흔히 봤던 장성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우리가 간 장성은 만리나 되는 장성의 일부인 팔달령에 있는 장성이다. '사통팔달'의 그 '팔달'로써 그만큼 중요한 장성 중의 하나란다. 이 곳이 경관이나 보존 상태나 제일 좋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사진에서 보는 만리장성의 모습은 이 곳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곳은 정말 나 하나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만큼 사람들로 가득 찼다. 누구의 표현에 의하면 "여름이면 장성이 사람들때문에 무너질 정도"라고. 모택동이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당당한 사내가 아니다"라 했다니 너도 나도 "당당한 사내"가 되기위함인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서도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찍으려고 했지만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자꾸 나오는지 나중엔 포기하고 찍었다. 장성은 벽과 봉화대로 되어있는데 사람들이 벽 위로 다니는 것이다. 능선을 따라 지어서인지 그 벽도 능선 따라 오르락 내리락 가파랐다. 봉화대는 누각처럼 지어졌고 한 가운데 서있으면 바람이 그야말로 '사통팔달'로 들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중국은 9월쯤에 오는 것이 제일 좋단다. 관광 중에 계속 더운 날씨때문에 고생했는데 9월이면 날씨도 서늘하여 돌아다니기 좋고 사람들도 여름만큼 많지 않다고 한다. 중국 관광은 이 곳에서 저 곳으로의 이동거리도 많지만 정작 유적지에 가서도 많은 거리를 걸어다녀야 한다. 차로 이동할 때야 에어컨이 있어서 더운 줄 모르지만 밖에서 걸어다니면 그 열기에 몇 걸음 못 가 지치고 만다. 만리장성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관광지인 명 13릉으로 떠났다. > 명 13릉 명나라에는 16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우리가 간 명 13릉은 그 중 13명의 황제들이 묻혀있다고 한다. 하지만 명나라의 개국 황제인 주원장의 묘는 여기 없다고 한다. 그 13릉 중에서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는 곳은 우리가 간 정릉이었다. 정릉은 명나라 13대 황제인 만력 황제의 묘로 발굴 당시 그 웅장함에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만력 황제는 10살에 제위에 올라 무려 46년간 명나라를 통치했는데 그 무능과 부패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 지하 궁전은 그가 22살때부터 지었다고 하는데 묘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기념비같은 것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공덕을 찬양한다던가 하는 내용은 커녕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이것은 그가 내세울 만한 공도 없는데다가 온갖 원망을 샀기 때문이라 했다. 우리 일행은 오랜 줄서기 끝에 만력 황제의 지하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 궁전은 지상의 무더운 날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쌀쌀했고 그 곳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두터운 잠바까지 걸치고 있었다. 알고보니 지하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입김으로 습기가 차지말라고 에어콘을 틀어댔는데 발굴 당시에 그 지하 궁전은 습기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지하로 내려가서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제가 살아서 앉았을 법한 옥좌와 그 앞의 커다란 항아리 같은 것이었다. 그 항아리는 지하 궁전을 영원히 밝히기 위해서 능을 지을 당시 넣었다고 한다. 처음엔 항아리 가득 기름으로 채웠는데 묘를 봉하고 산소가 부족하여 꺼졌다고 한다. 발굴 당시 그 항아리에 기름이 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한다. 그 곳에서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만력 황제와 두 황후의 관이 놓여있는 곳이 나온다. 세 관들은 크기가 대단히 크며 높이가 사람 키만큼이나 커서 우리 나라에서 봐왔던 작은 관들과 비교되었다. 우리 나라는 아무리 왕이라하더라도 그렇게 큰 관을 사용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만력 황제에게는 두 황후가 있는데 한 명은 어릴 적에 정략적으로 결혼한 황후인데 나중에 너무도 미워하여 지하에 가둬놓았다고 한다. 정치 뿐 아니라 사적인 면에서도 결코 훌륭한 인물은 아닌 듯 하다. 길을 따라 쭉 가면 능의 정문이 나오는데 이 정문은 발굴 당시 별 어려움이 없이 열렸다는데 이유는 만력 황제가 공사가 끝나면 자신들을 가둘 것을 두려워한 인부들이 일부러 문을 튼튼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능은 모두 금강석으로 지었는데 그 당시 같은 무게라도 금보다 금강석이 더 비쌌다고 한다. 가이드 왈 "명나라 전반기 때까지만해도 순장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명나라 7대 황제(이름은 모름)때부터 없앴다고. 이럴 수가!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지만 명나라때면 500년전이 아닌가! 그때까지 그런 제도가 있었다니 놀라웠다. > 점심(Friendship Store) 점심은 첫 날 저녁에 먹은 것보다는 약간 덜 느끼해서 먹을 만했다. 술(이과두주)도 나왔는데 혜복이가 아무도 안마신다고 하길래 가방에 넣었다. 우리가 먹은 식당은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기념품 파는 곳이었고 2층이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아마 외국인들이 식사하고 나서 자연스레 물건 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물건들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진열되어 있어도 질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특히 상품의 마무리 정도는 크게 미흡했다. 포장 또한 아직은 많이 뒤떨어진 듯 했다. 사실 우리 일행이 들르는 곳 - 외곽은 별로 그런 일이 없는데 - 은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어디든지 상인들이 몰려와서 물건을 사라고 난리들이다. 재밌는 것은 분명 중국인들인데 우리 나라 화폐도 받는다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는 아예 위안화를 안받고 처음부터 천원이니 만원이니하며 우리 나라 화폐로 받는 곳도 많았다. 유적지 내에서나 국영 상점같은 곳은 그런 일이 없는데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그런 예가 많았다. > 제약회사 웬 제약회사냐라고 하겠지만 아마 우리 가이드가 커미션을 좀 받았나보다. 그냥 사지 않아도 되니까 잠깐 들르잖다. 우리는 긴 복도에 수십 개나 되는 방 가운데 한 곳에 들어가서 마냥 기다렸다. 나중에 나오면서 확인해보니 그 많은 방들의 용도는 모두 같았고 방마다 관광객들로 붐볐다. 곧 얼굴이 둥굴둥굴한 남자와 여자 몇몇이 들어왔다. 남자는 20대로 교포 3세이며 현재 학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자기는 절대 약을 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가지고 나온 몇 가지 약을 설명했다. 물론 한국말로. 특히 어느 도포제를 설명하면서 이 약은 치질이나 무좀, 화상에 매우 효과가 있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별로 호응이 없었으나 옆에 다른 관광팀의 치질이 계신 아저씨 한 분은 이것 저것 질문도 했다. 그 남자는 갑자기 자기가 직접 효과를 증명해 보이겠다면서 옆에 있던 아가씨들에게 불에 달군 쇠줄을 가져오라고 하고서는 그 쇠줄을 손으로 만졌다. 세상에나 어린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차력사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영락없는 차력사구만. 암튼 그리고는 그 약을 바르고서는 제발 하나 사가라고 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어서 그냥 나왔다. > 용경협 그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용경협으로 향햤다. 거기서 용경협까지는 1시간쯤 걸렸는데 특이한 것은 입구까지 우리 차가 가는 것이 아니라 입구에서 2km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운행하는 일명 "빵차"라는 승합차를 이용해야 한단다. 이 빵차는 이 지역민들이 운영하는 것으로 중국 정부에서 지역민의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만든 제도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걸어서도 갈 수 있고 가지고 온 차로도 갈 수 있는 거리를 타우너만한 크기에 만든지는 한 10년은 족히 넘어보이는 빵차를 타고 용경협 입구까지 갔다. 여러 나라 말로 씌여있고 한글로 "용경협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진 곳에 도착했다. 용경협은 계곡 물을 70m 높이의 댐으로 막아놓고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었다. 그 댐 위의 유람선 선착장까지는 용경협 입구에서부터 댐 위까지 길이 700m가 넘는다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에스컬레이터는 용의 형상으로 만들었는데 마치 절벽을 용이 안고 있는 듯했다. 선착장에 올라가니 우리가 탈 유람선이 보였다. 물론 한강에 떠다니는 유람선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길이가 한 10m, 폭이 3,4m도 되지않았다. 수명은 여기까지 타고 온 빵차랑 비슷한 것 같았고 말이다. 이 댐이 건설된지 30년이 되어간다니 혹시 그 때 들인것이 아닐까? 아무튼 그날따라 안개가 약간 낀 용경협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면서 주위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나무가 있는 것이 무슨 동양화 한 폭 같았다고나 할까. 처음엔 사진기에 담으려고 했으나 차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들도 조용히 주위의 풍광들에 넋을 놓았다. 우리 유람선엔 중국인은 한 명도 없이 모두 한국 사람이었다. 뒤에서는 부부끼리 온 사람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하는 소리가 좀 들리고 가끔 얘들이 소리 지르는 것 빼곤 대체도 차분하게 풍경화 감상하듯 말이 없었다. 그런데 드문드문 절벽에 "龍境峽"이란 글자를 새겨넣은 것이 보였고 그 옆에 쓴 사람들의 이름도 새겨있었다. 강택민, 모택동 이런 이름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실력자들이 새겨넣은 것 같다. 다시 선착장에 돌아왔을 때는 무려 1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다. 원래 1시간 코스였는데 우리 유람선의 모터가 고장이 나서 천천히 돌았다. 나는 더 좋은 것 같았다. 다시 북경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많이 기울어 있었다. > 저녁 북경 오리구이. 중국에는 유명한 4대 요리가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오늘은 북경 요리의 간판 주자인 북경 오리 구이를 저녁으로 먹었다. 나는 오리 구이라해서 오리를 통째로 구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식사가 반 쯤 진행될 쯤에 나온 오리 구이는 잘게 살을 찢어 소스와 밀전병과 함께 나왔다. 어떻게 먹느냐하면 오리 살을 소스에 묻힌 후 밀전병으로 싸서 먹는 거란다.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이것이 과연 북경 요리의 으뜸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인지 의심됐다. 혹자는 세계 3대 요리 중의 하나라고도 하던데. 이 오리 구이를 하기 위한 오리는 딱 40일을 키운다고 하고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손이 아주 많이 간다고 한다. 그래도 평점을 한다면 별 다섯 중 세 개 정도. > 신세계 백화점 저녁을 먹고나서 호텔로 돌아온 일행들은 각자의 방으로 갔으나 나와 혜복이는 근처에 있는 북경에서 두번 째로 비싸다던 "신세계 백화점"을 가기로 했다. 걸어서 5분 정도되는 거리에 있다. 그 시각이 9시였는데 북경의 백화점은 우리와 다르게 9시 반까지 영업을 한다고 한다. 그 시간에도 거리에 사람들은 좀 많았고 곳곳에서 더운 집에서 나와 밖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백화점 앞에는 먹자거리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았는데 안에는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뭐 그런대로 깨끗한 진열에 서울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물론 전혀 다른 백화점이지만-과 비슷했다. 사람들의 세련된 의상이나 머리는 여기가 북경이 맞는지 착각할 정도였고 서양인들도 많이 보였다. 그 백화점 제일 윗층에는 우리의 PC방 같은 곳이 있었는데 게임이 주인 우리 나라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웹 서핑이 주인것 같았다. 규모도 굉장히 커서 그 큰 백화점 제일 윗층의 절반은 차지하는 듯 하고 PC도 수백대는 되어 보였다. 나중에 들었지만 백화점은 복장이 불량한 사람이나 좀 지저분한 사람들은 못 들어간다고 한다. 아무튼 이제까지 접했던 북경의 여느 분위기와는 다른 느낌의 백화점을 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내일을 위해 쉬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