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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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ic ] in KIDS
글 쓴 이(By): ruby (뱃살공주)
날 짜 (Date): 1995년07월18일(화) 20시30분37초 KDT
제 목(Title): [클래식 입문] 바하 7








  4곡의 서곡(Overture), 다시 말해서 관현악 모음곡(BWV 1066-1069)도

 역시 바로크 시대에 널리 사랑을 받던 이러한 악곡 형의 좋은 한 예이다.

 여기에는 바흐의 가장 원기 왕성하고 매력적인 음악이 몇 곡 포함되어 있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편성에 트럼펫과 팀파니를 덧붙인 모음곡 제 3번과

 제 4번이 옥외에서 연주되게끔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일반적으로 

 ��G 선상의 아리아∼라고 알려져 있는 곡은 모음곡 제 3번의 느린 악장의

 편곡인 것이다.

  �克沅促㎈罐E� 콘체르토∼의 제 3번과 제 6번은 특정한 독주악기가 없이

 작곡된 리피에노 콘체르토(ripieno concerto)이지만, 그밖의 곡은 현악과

 통주저음으로 된 합주가 아니고 독주 악기를 여러 개 조합시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콘체르토 그로소이다.바흐는 또한 독주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 2곡, 두 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 1곡을 작곡했으며,

 그는 아마 처음으로 하프시코드를 위한 콘체르토를 쓴(혹은 편곡한)

 작곡가였을 것이다.그는 1개의 독주 하프시코동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를

 7곡, 2개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3곡, 3개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2곡, 4개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1곡 작곡했는데, 이 마지막 곡은

 비발디의 ��4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의 편곡이다.실제로 하프시코드

 콘체르토 중 대부분은 바흐 자신이나 다른 작곡가들이 쓴 바이올린 곡을

 편곡한 것이다.더욱이 바흐는 그의 실내악과 관현악곡에서 몇 개의 악곡을

 라이프치히 시대의 칸타타용으로 편곡하였다.�橘ス北�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E 장조∼(BWV 1006)의 전주곡은 칸타타 29번의 신포니아로서

 충실한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것이다.그리고 �克沅促㎈罐E� 콘체르토 제 3번∼

 제 1악장은 관현악에 2개의 호른과 3개의 오보에를 덧붙인 형태로서

 칸타타 제 174번의 신포니아가 되었다.또한 독주 클라비어 콘체르토의

 악장은 적어도 5개 이상이나 칸타타에서 찾을 수 있다.칸타타 제 110번의

 첫 합창은 관현악 모음곡 D 장조(BWV 1069) 제 1악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이와 같이 음"가적 소재를 어떤 한 개의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변형시키는 수법은 18세기 초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작곡가들은

 분명히 좋은 악상은 몇 번이라도 사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바흐의 2개의 후기 기악작품인 �隙슭퓻÷� 헌정∼(Musikalisches Opfer)

 과 �槿ぐ÷� 기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부류를 형성하는 작품이다.바흐는

 1747년에 포츠담을 방문했을 때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준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즉흥 연주를 했는데 앞의 곡집은 이때의 주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바흐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와서 자기의 즉흥 연주를 정서하고

 또 손질을 가해 완성된 작품을 왕에게 헌정하였다.이것은 10곡의 카논과

 함께 건반을 위한 3성부 1곡과 6성부 1곡의 리체르카레, 플루트(프리드리히

 대왕이 좋아하던 악기)와 바이올린 그리고 통주 저음을 위한, 4악장으로

 구성되는 트리오 소나타 1곡 등이 포함되어 있다.바흐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아 있게 된 �槿ぐ÷� 기법∼은 1749-1750년에 작곡

 되었고, 모든 형식의 푸가 작법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또 요약하고

 있다.여기에는 가장 엄격한 양식으로 된 카논과 푸가 18곡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동일한 주제 혹은 그 주제의 변형의 하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점점 더 복잡해지는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심원한 대위법적 수법이 대가답게 쉽게 처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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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의 성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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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3년에 라이프치히는 인구 약 3만 명을 헤아리는 상업 도시로서 번영

 하고 있었으며, 인쇄와 출팜의 중심지, 그리고 옛날부터 대학교가 있던

 소재지로서 주목을 끌고 있었다.이 도시에는 훌륭한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가

 있었다.그 후 오페라 하우스는 문을 닫게 되었다.성토마스 교회에서 바흐의

 선임자로 있었던 쿠나우는 자신의 수하에 있던 일급 가수들을 딴 교회에서

 끌어가고 있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라이프치히에는 대학교의 교회 이외

 에도 5개의 교회가 있었다.그 중에서 가장 중옳� 것은 바흐가 음악을

 담당하고 있던 성니콜라스 교회와 성토마스 교회였다.

  성토마스 교회에서 운영하던 학교는 역사가 깊은 학교로서 통학생과

 기숙생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이 학교는 55명의 소년과 4개의 교회에서

 예배 때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며, 이밖의 음악에

 관한 책임을 맡고 있었다.장학생은 음0� 성적과 일반 학업 성적에 기초를

 두고 선발되었다.이 학교의 칸토르로서 바흐는 세 번째로 손꼽히는 위치에

 있었다.

  성토마스 학교의 모든 임명권은 시의회에 있었는데, 교회와 학교 등을

 관리하는 다ズ인 교회 회의(Consistory)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바흐는

 시의회가 첫번째로 임명한 사람은 아니었다.교회 회의는 한층 더

 `현대적�'(modern) 음악가를 원하고 있었다.함보E㈏ 텔레만(G.P.Telemann)

 과 다름슈타트의 그라우프너(C.Graupner)가 그 지위에 대한 임명 제의를

 받았으나, 텔레만은 함부르크에서의 급료를 인상시키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이 제의를 이용했으며, 그라우프너는 고용주로부터 사이므이 허가를 얻어

 내지 못했다.바흐는 관례대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적인 건전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시의회를 만족시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1723년 5월에 취임식을 가졌다.그의 임무에는 하루 4시간의 수업(음악은

 물론 라틴어도 가르쳐야 했다.)과 교회의 각종 예배를 위한 음악을 준비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이러한 일을 하면서도 바흐는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생활하며 시장의 허가 없이는 이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학교의 한 쪽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의 작업실은

 2학년 학생들의 교실과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구분이 되어 있었다.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공개적인 예배를 드릴 기회가 없어서 불편을 느낀

 일은 없었다.모든 교회에는 맹� 예배가 있었으며 축일에는 특별한 의식이

 집행되었다. 성토마스 교회에서는 일요일에는 상례적으로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정오까지 계속풔 주요 예배 이외에 짧은 예배가

 세 번 있었다.주요 예배에서는 성가대가 모테토와 루터파의 미사곡(키리에와

 글로리아만)과 찬미가 그리고 칸타타를 불렀다.성토마스 교회와 성니콜라스

 교회에서는 읏嶽玖떪� 교대로 해서 칸타타가 연주되었다.칸토르는 칸타타를

 연주할 차례가 된 교회에서 제 1성가대를 지휘했고, 칸토르의 대리자는

 다른 교회에서 제 2성가대를 지휘하면서 한층 더 단순한 음악을 연주하였다.

 동시에 가장 실력이 낮 가수들로 구성된 제 3, 제 4 성가대는 다른

 두 곳의 교회에서 자기들의 수준에 맞는 음악을 담당하였다.바흐가 직접

 쓴 기록을 보면(1730년?) 제 1, 제 2, 그리고 제 3성가대에서 최소로

 필요한 인원은 각각 12명의 가수(각 성부에 3명씩)들이었고, 제 4성가대

 에는 8명의 가수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제 1 성가대를 반주하던 오케스트라의 주자들은 일부는 학교에서, 그리고

 일부는 마을의 음악가들 중에서, 그리고 일부는 대학교의 콜레기움 무지쿰

 (Collegium Musicum)에서 선발하였다.콜레기움 무지쿰은 당시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하여 1704년 텔레만에 의하여 창설된 과외의 음악 단체 같은

 것이었으며, 1729년 바흐는 이곳의 지휘자가 되었다.바흐의 요구에 의하여

 오케스트라는 2개의 플루트(필요에 따라서), 2개나 3개의 오보에, 1개나

 2개의 파곳, 3개의 트럼펫, 그리고 팀파니와 통주저음이 붙은 현악합주

 -- 모두 18명에서 24명까지의 연주자들로 구성되었다.바흐가 여러 제약과

 곤란을 겪으며 활동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라이프치히에서 자기의

 어떤 작품에 대해서도 훌륭한 연주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전체적으로 보 그에게는 작곡가의 창작렝� 고무하는 것

 같은 조건들이 있었다.이를테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새로운 곡이 요구

 되었으며, 가수와 악기 주자들은 충분하긴 했지만 언제나 손쉽게 채용할 

 수가 있었다.그리고 그의 지위는 잡다한 성가신 일이 많이 있긴 했어도

 그런 대로 안정되고 명예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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