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 이(By): beom (김상범) 날 짜 (Date): 1993년05월07일(금) 22시47분57초 KST 제 목(Title): 7년전의 대덕에서는... 그 당시 입학생 수는 524명 이었는데, 시골 캠퍼스에 다니는 학생들 답게 500명이 곧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 24시간 같이 생활 하니깐 ) 당시 '가'동 ( 현 사랑관 ) 1층을 여학생들이 쓰고, 2-5층을 남학생 들이 사용했는데, 여학생들이 아침에 화장실 갈때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서로 조심해 주는 바람에 별 무리가 없이 1년을 보냈다. (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있을지? 더구나 그 1층 구조를 생각해 보면... 기숙사 중앙에 현관이 있고, 그 옆에 화장실이 있어서.... ) 당시 등록금 ( 한 학기 기성회비 ) 이 19만 몇천원 이었는지, 21만 몇천원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거의 공짜였다고 생각이 된다. 반면 학생들이 받는 학자금은 지금처럼 4/6/10 만원 이었다. ( 7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학생들이 받는 돈에는 변함이 없지만, 기성회비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인상된 것 같다. ) 당시 최순달 교수님이 학장을 맡으셨는데,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인기 캡! 이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생각이 된다. 점심시간이면 학생식당에 그야말로 불쑥 찾아와선 학생들하고 같이 식판을 받아들고 식사를 하셨는데, 학생들은 학장님이라기 보다는 그냥 교수님이랑 식사하는 기분이었다. ( 이게 한동한 일부 교수님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서 일부 교수님들도 학생들하고 같이 줄서서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하시기도 했다. ( 요즘 상황이랑 비교되지요? )) 주말이면 마땅히 나갈 교통편도 없던 상황이라서 학교측에선 금요일 저녁마다 (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이다! 라고 7년전의 한국 상황 에서 생각했건 것 부터가 획기적이다. 요즘 서울을 보면 비로소 금요일 주말이 정착되어 가는거 같다. ) 연극, 영화, 연주회 들을 준비해 주었고,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학생들은 모두가 대강당에 몰려가서 금요 문화행사를 관람했다. ( 이것이 금요문화 행사의 효시이다. ) 그리고 금요문화 행사가 끝난 후에는 꼭꼭 애프터(?) 를 했었는데, 즉, 학교측에선 학생들에게 사교춤 교습을 체육관에서 했던 것이다. 그당시 외부 강사진이 스텝의 기본 부터 시작해서 에어로빅, 디스코까지 가르쳐 주었던 기억이 있다. 춤 교습 시간 이후에는 학생들에게 자유시간을 주었는데, 이 때 체육관의 조명을 끄고, 미리 설치한 디텍 조명 과 다운타운가의 댄스음악으로, 대전에서 가장 넓은 스테이지를 가진 디텍으로 체육관이 변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도 여러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당시 전설로 전해져오는 414호에서 끓여먹은 라면박스를 쌓아놓으면 8톤트럭 몇대 분량은 될 것이다. 이당시 주방장은 이상주군이 담당을 했는데, 이 때의 선수들로는 박강민, 최정환형 등등이 있다. 한 번은 한 선수가 4개 분량의 라면을 끓이고는 익자마자 바닥 (그냥 돌 바닥임)에 그냥 엎어버렸다.( 코펠을! )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 혼자 먹겠으니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 일전에 다 익은 라면에 침을 퉤퉤 뱉어서 혼자 먹으려고 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바닥에 엎은 듯.. ) 물론 다른 선수들도 집어 먹을 수는 있었지만... " 침 뱉은것까지는 먹겠지만, 저렇게 까지 먹고 살려고 애 쓰는데.." 차마 건드리지 못하겠더라.. 라면서 혼자 먹게 내버려 두었었다. 그 당시 기숙사에서 술을 먹거나 라면을 먹은 적은 많았지만, 이것이 사회 문제로 확대댈 만큼 커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며, 너무 정도가 지나치게 되기 전에 학생들이 스스로 알아서 조심하고 자정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 자정이라는 것이 라면을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라면을 먹어도 조용히, 술을 먹어도 옆방에 방해되지 않게 먹었다는 이야기... ) 당시 전교생이 500여명이었는데 새로 생긴 서클(지금은 동아리라고 부름)의 수는 30여개였다. (당연히 새로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15명의 회원만 있으면 서클로 등록을 할 수가 있었는데, 회원수의 부족으로 ( 혹은 소수 정예 원칙 고수로 ) 등록을 안하고 지하에서 활동을 한 언더그라운드 서클도 부지기수였다. ( 본인도 언더 서클 '놀당'의 멤버 였음. ) 여름엔 서클 연합회 주최로 '물축제' 라는 것을 열었는데, 학생들이 거의 수영복 차림으로 모두 참가해서 서클대항으로 각종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이 게임이라는 것이 거개가 다 물을 뒤집어 쓰거나 하는 것들 이라서 수영복차림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더운 여름날 모처럼 시원한 행사였다고 생각이 된다. ( 요즘은 이런거 안 하는지? ) 줄다리기를 하면서 상대편에게 호스로 물을 뿌린다던지, 물풍선 던지고 받기라던지를 즐기는 동안 얇은 셔츠들도 흠뻑 젖게 되는데, 당시 옷 걷어 부치고 활약한 최경일군이 돋보였다. 현재 학부쪽의 축구장(운동장)에는 원래 인공연못이 들어설 예정 이었고, 연못 가운데는 작은 섬과 나무를 심을 예정이었고, 보트를 몇 대 마련해서 데이트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 현재 대학원쪽에 있는 연못에 보트를 놓아보면 어떨지? ) 도서관은 현재처럼 막힌 구조가 아니라 완전 개가식으로, 2층에는 벽이 없었다. ( 외벽은 빼고 ) 당시 개가식 도서관 구조는 국내 대학 에서는 최초로 도입되었던 것으로, 서울의 다른 대학들의 도서관은 모두 폐가식이었다.(그당시) 그럼에도 도서분실사고는 거의 없었다고 기억이 된다. 이 당시 도서관에 김창근 과장님이 근무를 하셨는데, 이 분의 인기도 학장님 못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오리엔테이션때 획기적인 프레젠테이션 기법을 도입하여, 임프레시브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대학의 강의실의 의자들이 전부 하이팩 의자인 것도 이 분의 입김이 작용한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다. ( 당시 하이팩 의자는 엄청 고가였음. ) 당시 대학의 11개 동 전체가 교내 LAN으로 구축되어 있어서, 기숙사 는 물론 도서관에서도 전산소의 터미널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입학전에 전산센터를 담당하게 된 이주장 교수님이 '모든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완벽히 개방하겠다'는 공약을 하셨다. '이상이 생길 경우를 위해서 항상 백업을 하면 되니깐 학생들은 걱정말고 마음껏 나래를 펴라' 는 말과 함께... 하지만 이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고, 학교의 컴퓨터는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운영이 되었다. ( E-mail 도 오갈 수 없었음. ) "학생들이 무분별하게 외부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연결할 수가 없다" 는 것이 전산소측의 입장이었지만, 관리의 어려움을 핑계로 전체 학생들 에게 손해를 끼친 그야말로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