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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chang (장 상 현)
날 짜 (Date): 1993년07월12일(월) 18시41분54초 KDT
제 목(Title): 조선어학회사건 4

조선어 학회의 노력--

그 분들은 우리의 말과 글을 완전이 연구 정립해 놓지 않으면

결국 일제에 의해 쉽게 사라지게 될 것을 깨닫고, 이 일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였다. 맞춤법은 3년간 125회의 회의를 거쳐

제정되었는데, 경기 지역을 표준으로 지방출신 회원의 의견을

일부 받아 들였다. 이 회의는 매우 격렬하여 때로는 의자를 내던지며

싸우기도 하였다 한다. 또 많은 뜻 있는  유지들의 도움으로 사전 편찬에

애썼는데, 사건당시 이 분들 중 일부도 잡혀갔다. 다만 어떤 분들은

일제와도 관계가 있어 잡혀가지 않았었다.

일제는 사실 20년간 조선어 학회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없애버릴 기회를

찾아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모욕도

감수해겠다는 의지로 그들은 참았다. 창씨개명을 하라고 하자 그들은 

우리성을 그대로 등록했었다. (예를 들면 김씨는 '가네'로 장씨는 '하라'로

등록하는 곳에서 화를 내면, 일본의 인명중 그런 성이 있음을 주장하여,

그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신사 참배도 갔었고, 친일파와도 친하게

지내려 했다. 물론 불만이 많은 분 들도 있었고. 그런게 보기 싫어 행사에도

불참하는 분들도 있었다. 한 번은 이극로 박사가 한글날 기념식에 안창호

선생에게 축사를 부탁한 것이 문제가 되어 종로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박사는 그 자리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대일본 제국을 두고 딴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며 빌어 파국을 막았다.

어찌보면 박사는 심지가 없는 분 같이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저명한 기독교계 지도자 한 분이 모든 종류의 회의에 참석하며, 후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극로 박사는 그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박승빈의

조선어학 연구회에 가담 조선어 학회의 반대파가 되었다. 이를 본 회원이

이극로 박사에게, 왜 다른 친일 거물에게는 친하게 대하면서 이 기독교계 인사

를 이용하려 하지 않는가 물어 보았다. 박사는 " 내가 부탁하면 그가 응해 줄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독립 협서의 주동적 인물이던 그가 변절하여 친일 거두가 된

사람이니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문제의 인물은 일제 말기에 친일 사절단에 끼어 일왕을 만나고 왔다.

그는 나이가 많아 병을 핑계로 가지 않을 수있었는데도 총독부의 앞잡이가 되었다.

굽혀야 할때 최대로 굽혔던 이극로 박사도, 변절자에게는 일말의 동정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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