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gul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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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30일 금요일 오전 01시 16분 51초
제 목(Title): 고종석/한국사람의 이름 


[고종석에세이] 한국 사람의 이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은 
명예심이 인간의 커다란 욕망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사람은 대체로 
생전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고, 사후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며,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름답지 못한 일에 이름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이름좋은 하눌타리”라거나 “이름난 잔치 배고프다”는 속담은 이름과 실상이 
꼭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우쳐주지만, 그런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름에 
초연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이름 석 자'라는 말이 가리키듯, 한국 사람의 성명(姓名)은 대체로 세 음절로 
이뤄져 있다. 성(姓)만이 아니라 이름도 대체로 한자를 써서 짓는다. 성이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또 전통적으로 항렬자라는 것이 있으니, 외자 
이름이 아니더라도 한국인의 이름에서 그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 고유한 것은 
대체로 한 음절뿐이다. 예컨대 현대 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여러 자제들은 이름에 
모두 `몽'이라는 돌림자를 지니고 있어서, 마지막 글자로만 성명이 구별된다. 
`정'이라는 성과 `몽'이라는 돌림자는 정회장의 2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제들도 모두 이름에 `홍'이라는 
돌림자를 지니고 있다. 한국 사람들 가운데 동명이인이 그렇게도 많은 것은 성의 
가짓수가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돌림자라는 제약이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전화번호부의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동명이인이 수두룩하게 발견된다. 물론 
봉건적인 문중(門中) 의식이 흐려지면서 자식 이름을 지을 때 항렬자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또 지금은 그 바람이 한 풀 죽었지만 음절 수의 
제약 없이 고유어로 이름을 짓는 풍조도 우리 사회 일각에 있다. 북한에서도 
어린이들의 이름을 될 수 있으면 고유어로 짓는 것이 좋겠다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1966,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나갈데 대하여>) 이후에 고유어 
이름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성과 항렬자를 포함한 한자 석자 
이름이 한국인의 전형적인 이름이다. 

이것은 일천 수백년 전에 중국에서 건너온 관행이다. 그리고 `이름 석자'라는 
표현도 봉건 시대에는 신분적으로 중간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고 1909년의 민적법(民籍法) 시행으로 그 이듬해에 
민적부(民籍簿)가 완성되기 전엔, 하층민의 대다수에게 성이 없었다. 민적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국인 가운데는 성이 없는 사람들이 성이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그러니까 지금의 한국인 가운데 반수 이상은 아주 가까운 조상이 성 없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통혼의 신분적 제약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상 지금의 한국인 대부분이 부계쪽으로든 모계쪽으로든 
20세기초까지 성이 없었던 조상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신이 
`상놈'의 후손, `천민'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족보'라는 것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그 족보들이 그리고 있는 것은 
죄다 명문거족이다. 성이 없던 조선조의 민중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집단적으로 단종(斷種)을 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후손이 우리들 가운데도 
분명히 있을텐데, 그 성없는 민중의 후손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종친회라는 
것이 공직자 선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만큼 활발히 움직이는 사회, 
`보학(譜學)'이라는 것이 노년층에선 아직도 학문의 대접을 받는 사회가 한국 
사회다. 성에 대한 집착도 대단하다. 웬만한 어린이도 제 본향을 알고 있다. 
서양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인의 성은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일생동안 
변하는 일이 없다. 굳은 맹세를 하면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성을 
갈겠다”라고 말하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성을 바꾸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국인에겐 최고의 치욕으로 여겨진다. 이름의 경우는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 다소 번거로운 재판절차를 거치면 바꿀 수가 있다. 

지금은 이름을 하나씩 갖는 것이 관례지만,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여러 개의 이름을 
지녔었다. 막 태어나면 막되게 부르는 아명(兒名)을 붙이고, 성인이 되면 문서 
같은 데에 정중히 사용할 관명(冠名)을 지었다. 죽은이에 대해서 말할 땐 관명을 
휘(諱)라고 한다. 또 윗사람이 부르는 자(字)와 친구들끼리 쉽게 부르는 호(號)가 
있었다. 호를 아호(雅號)라고도 한다. 죽은 뒤에 생전의 공적을 기려 임금이 
추증하던 시호(諡號)라는 것도 있었다. 16세기의 유학자 이이(李珥)의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끝>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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