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gul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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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6일 토요일 오전 06시 05분 07초
제 목(Title): 인물과사상/이현우 한국어의 계급성을 타파


한국어의 계급성을 타파하자/이현우
 
 

한국어는 사회 갈등을 야기하는 계급적 언어

 

세계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다. 그 언어들은 민족마다의 정신과 사상을 담는 의사 
표현의 수단이 된다. 언어는 표현의 수단이지만, 언어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고차원적인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독점적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삶을 속박하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학자들은 각 언어의 밑바닥에 깔린 각종 
기제들을 분석해 어느 민족의 정신·사상적 특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우리는 한국어라는 우리만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한다. 한국어에는 많은 특징이 
있지만 나는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특징에 주목한다. 나는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 
말이 일본어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디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는 계급적이며 
권위적인 언어라고 단정한다. 강자 또는 상위자가 약자나 하위자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우월함을 세뇌시켜 무의식적인 복종과 순응을 강요하려는 게 존댓말과 
반말의 생성 의도라고 보는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는 엄청나다. 그것은 누구나 대화를 나누는 상대와의 서열을 정해 
그 높낮이에 맞는 수직적 관계를 받아들이게 한다. 또한 사회 성원들간에 사건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는 말 자체의 문제로 인한 갈등과 대립을 부추긴다. 그 결과 말 
자체가 자연스럽게 사회 성원들에게 수직적이고 계급적인 사고를 주입해 평등 
개념의 정착을 어렵게 한다. 우리 말을 쓰는 한 누구도 그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이런 존댓말과 반말의 구별이 없어져야만 외형뿐이 아닌 진정한 평등 
사회가 이루어질 거라고 단언한다. 또한 대다수가 싫어하는 권위주의라는 악마도 
사라질 것이다. 권위주의란 계급과 권력에 기생하는 것이기에, 언어 자체에 
계급성이 있는 한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사회 전반에서 
예의를 중시한 조상들이 스스로를 일컫고자 바랐던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보다는 '동방계급지국'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예의라는 게 대부분 강자보다 약자에게 부과되는 상향적 복종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네 어른을 보고 인사를 않는 연소자에게 따라붙는 게 무례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른이 먼저 인사를 안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예의는 항상 
약자나 하위자가 먼저 챙겨야 한다. 강자나 상위자는 약자나 하위자가 보이는 
예의를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평가를 내리면 된다. 강자나 상위자가 지켜야 
할 예의를 지키지 않을 때는 예의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윗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느냐고 한다. 현실적인 역학 관계 탓도 있겠지만 강자의 잘못에는 꽤 
너그럽다. 그런 건 어느 사회에서나 일정 부분 통용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방예의지국'을 운운하며 존댓말과 반말이 갖는 심각한 문제점을 미화시키려 
드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왜 우리 말에는 다른 언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극과 극의 존댓말과 반말이 
존재할까. 우리 말이 발생되면서, 또는 얼마간 역사가 흐른 뒤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를 살펴볼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사고 
방식이 상당히 권위적이고 계급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곳이든 신분 
사회는 분명한 계급적 차별 장치를 마련하고 그 차별을 체제 유지의 발판으로 
삼는다. 조선 시대에 신분별로 집의 칸수를 제한하고, 양반이 아니면 도포를 
입거나 큰 갓을 쓰지 못하게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전에는 어느 사회나 그런 비슷한 규정들이 있었으며 우리 조상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벙어리가 아닌 이상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언어에 높낮이를 
둠으로써 그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주거지는 그곳을 떠나 있을 때는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 주지 못하고 옷은 바꿔 입으면 역시 변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상에서 쓰는 말이 의식과 사고를 지배한다는 걸 알고,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의 우월한 계급과 지위와, 무조건의 복종만이 남겨진 상대의 비천한 처지를 
각인시키는 반말과 존댓말을 고안해 사용함으로써 사회의 신분적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상위 계급에게 늘 존댓말을 쓰던 사람은 알게 모르게 그 
계급을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심리적 습관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말에 계급성을 
부여한 탓에 우리는 민주 사회라는 현재에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엄청난 
계급적, 권위적 관념들을 지닌 채 살아 가고 있다. 

 

먼저 서열을 정하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건 타인과 만날 때는 사용할 말을 먼저 정해야 한다. 상대의 
신분, 나이, 성별, 초면 또는 구면 여부에 따라 그에 맞는 말의 격을 정해 
존댓말이나 반말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을 때는 흔히 
존댓말을 쓰고 낮을 경우 낯익은 사이가 아니라면 존댓말을 쓰지만 어영부영 
존댓말 반말을 섞어 쓰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많은 연장자가 연하자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생판 초면이 아니라면 별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구면이면 서로 사용할 
말이 정해진 경우가 많지만 초면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흔히 존댓말을 쓴다. 
그러나 그건 오래 가지 않고 대부분 차츰 만나면서 서로 쓸 말의 격을 정한다. 
만약 그런 격을 정하지 않으면 어딘지 겉돌고 불편한 느낌이 들어 격을 정하게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인정하는 모든 위계 질서가 동원된다. 

그렇게 한 번 말의 상하가 정해지면 그 상하는 이변이 없는 한, 그들의 관계를 
규정짓는 게 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런 관계는 언어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까지도 결정해 버린다. 말을 올리는 사람은 낮은 계급이, 반말을 하는 사람은 
높은 계급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처럼 상하간 계급과 서열을 매기는 데 있어 
말의 격을 정하는 것보다 쉬운 게 없다. 사람들은 반말과 존댓말에 도사린 그런 
계급적 기저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잘 알기 
때문에 남의 말투에 상당히 민감하다. 

잠시 다른 언어의 존대법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요즘 필요 이상 중요성이 부풀려 
있는 영어의 경우, 우리 말과 같은 하늘과 땅 차이의 존대와 하대가 없다. 
평서문에서는 아예 신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은 형태의 말을 쓴다. 대화를 
나누는 화자들이 그 상황에 맞게 받아들일 뿐이다. 다만 공손한 표현이란 게 
있는데 그것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거나 어투를 부드럽게 
하는 형태이다. 이를테면 의문문에서 현재 시제인 조동사를 과거 시제로 
바꿈으로써 존대의 뜻을 나타낸다.

상하 관계도 동사의 어미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구분하는 우리와 달리 호칭 
자체만으로 표현하는 말의 평등화가 보장되어 있다. 계층에 따른 언어 표현 방식은 
그들의 교육이나 생활 수준에 따라 은연중 묻어나고 그걸로 신분적 배경을 알 수는 
있겠지만, 우리처럼 대놓고 높이고 낮추는 그런 언어는 아니다. 신분 상하에 
관계없이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상사와 부하가 공히 같은 형식의 말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도 말의 형식을 정하는 데 필요한 서열을 따질 것 
없이 동등한 입장에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서로를 격의없이 대한다. 그들 사회가 
권위주의와 거리가 먼 것은 그들 언어의 상호 평등성과 무관하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서구 대부분의 언어가 그런 식이며 중국어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와 비교해 우리말은 존대어와 평어와 하대어가 엄청나게 분화, 발달되어 있다. 
명령어로 간추리면 '하시겠습니까' '해요' '하지' '해라'쯤이 되겠지만 그 
사이에도 의미가 미묘하게 다른 존대와 하대의 표현이 몇 개씩은 더 있다. 그걸 
익히는 데 드는 노력과 오용의 사례는 그만두고라도,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왜곡이다. 이 말들은 평등해야 할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만다.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쓰는 것과 상대와의 수직적 높낮이를 따져 말을 가려써야 
하는 데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부터 각자 자신이 존댓말을 쓰는 사람과 반말을 
쓰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돌이켜보시기 
바란다. 우리는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절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이 
반말을 하는 사람에겐 별로 존중심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역으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에겐 반말을 하기 어렵고, 낮춰 보는 사람에겐 힘이 뒷받침되는 한 
반말을 한다는 얘기다. 

 

존대는 '예의'가 아니라 '힘'의 논리

 

우리 사회는 그런 존댓말과 반말이 빚어내는 상하 관계의 그물망이 모든 
인간관계에 걸쳐 있는 무한정한 계급 구조로 짜여 있다. 가장 기본적인 가족관계를 
보아도 그렇다. 부모는 자식에게, 형은 아우에게 당연히 반말을 한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에게 존댓말을 쓰고 그게 옳다고 배우며 그것은 사회적으로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부모-자식이나 형-동생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하 
관계가 되는 게 옳은가. 

부모가 부양을 책임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부모는 자식에 비해 많은 권한을 갖고 
있고 자식의 삶은 그 혜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각 
개체의 독립성으로 보면 부모나 자식이나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자식이 부모의 몸을 빌려 나왔다는 것 하나만 빼면, 그 사실은 남들과 비교할 
때처럼 분명하다. 그럴 때 부모가 자식에게 반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은 당연한 
예의가 아니라 사실 힘의 관계 때문이 아닐까? 부모가 자식에게 반말을 해도 
자식은 그에 대항할 힘도 없거니와 그것이 사회적 합의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경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기가 태어나 자라면서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말을 
배우는 아기는 부모가 자신에게 쓰는 말을 그대로 배운다. 대부분 부모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니까 반말을 배우지만 존댓말을 쓰면 존댓말을 배우게 되어 있다. 반말을 
배운 아이는 나중에 존댓말을 쓰라는 부모와 사회의 교육에 의해 존댓말을 쓰게 
된다. 또한 자라면서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꼭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억압적 
질서를 체득하게 된다. 

부모에게 경어를 쓰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아이의 어른 말 
따라하기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언어의 평등성과 그것이 사회의 기층 
구조 속에서 왜곡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 준다.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경어와 반말의 심층에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구조가 
전제되어 있다. 연장자와 연하자, 직장 상사와 부하, 교사와 제자, 선배와 후배, 
남편과 아내, 그 모든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경어와 반말의 밑바닥에는 
'예의'가 아닌 '힘'의 논리가 깔려 있다. 말이 가지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심각한 
사회 불평등적인 요소가 깔려 있는 것이다. 연하자가 연장자에게, 제자가 
교사에게, 부하가 상사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아마 연장자나 교사, 
상사는 당장 '싸가지'를 들먹이며 멱살을 잡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보복을 하려 들 것이다. 선·후배나 부부간은 친한 정도에 따라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에 길든 사람들은 심심찮게 시비를 할 것이다. 이처럼 경어와 
반말은 인간마다에게 끊임없이 상하 관계를 확인시키며 순응을 강요한다. 

 

폭력의 악순환과 경쟁력 저하

 

이런 언어적 계급 구조는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을 불러온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인관계에서 쓰는 말과 일치하는 계급적 지위를 찾아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언어의 폭력과 여타의 권위적인 태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강자에게 기분이 나쁜 약자가 자기보다 더한 
약자에게 반말을 하려고 하게 되고 이것은 인권과 심각하게 결부가 된다. 

이렇게 악순환으로 굴러내려오는 언어 폭력의 맨바닥에 위치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일 수밖에 없다. 범죄자들에게 막말을 하며 함부로 다루는 형사들의 
의식에는 그들이 대항할 수 없는 약자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직원들에게 반말을 하는 고용주는 그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아내에게 높임말을 강요하고 자신은 반말을 하는 남편은 자신의 주먹이 
더 세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말에서 상하 관계가 정해지면 다른 기본적인 권리의 침해와 그를 정당화하는 
수직적 경직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반말을 하려 하고 
그렇게 무시한 약자의 언어적 권리를 시작으로 더 많은 것들을 유린하려고 한다. 
언어부터 제압하고 나면 다른 것은 쉽다. 그러면 당한 사람도 본전 생각에 자신이 
당하는 만큼 아랫사람에게 화풀이하려는 것도 필연이다. 그런 언어 폭력은 나중에 
진짜 폭력으로 둔갑되어 행사되기도 한다. 누군가 이 순응을 거부할 경우는 많은 
사회적 보복이 따른다. 그것은 단순한 존댓말 반말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그런 거부는 정당한 
것이라 받아들여질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보복의 칼날이 기다린다. 
윗사람이 반말 좀 한다고 대들다니 버릇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관료 사회나 다른 모든 사회 구조가 권위주의적인 것은 특별히 의식이 
못돼먹어서가 아니다. 계급적이고 권위적인 존댓말, 반말의 차이가 빚어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권위적인 사람일수록 말투가 공손치 못하고 반말을 
잘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반대로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억눌려 지내던 사람이 
상하 관계를 파기하고 반기를 들 때 맨 먼저 꺼내는 말이 이제는 반말하지 말라는 
외침이다. 이처럼 경어와 반말이 분화, 발달된 우리 말은 인권과 평등을 지향하는 
현 사회에 큰 걸림돌이 된다. 생각을 만들어내고 결정짓는 그릇인 언어 자체가 
권위적인데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사고가 어떻게 평등을 담아낼 수 있겠는가. 

존댓말과 반말의 사용이 빚어내는 문제는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화합과 경쟁력을 좀먹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말에서부터 시작된 수직적 관계는 
그것의 위치가 뒤바뀔 경우 당사자들에게 큰 당혹감을 안겨 준다. 

가령 밑에 있던 부하가 자기보다 먼저 출세해 높은 지위를 갖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는 둘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예고한다. 전에는 함부로 대했던 
부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당장 말투부터 반말을 하려면 꺼림칙하고 존댓말을 
하자니 그 굴욕감이라니 이건 더 죽을 맛이다. 지금껏 반말을 하는 사이에 그 
부하는 자신보다 낮다는 인식이 은연중 뇌세포에 박혀 있던 탓이다. 그렇게 
자기보다 못한 졸개가 자기를 능가하는 자리에 올랐으니 그걸 인정하기가 어렵다. 
반면 높은 자리에 오른 그 부하는 이제 전의 상사를 쉽게 대한다. 전에 당한 
수모를 떠올리는 듯 미친 척 반말도 한다. 그리고 어쩌다 결정적인 꼬투리라도 
잡히면 모욕적인 말도 한다. 그래도 예전의 상사는 어쩌지 못한다. 그 부하는 이제 
우월한 자리에 있고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가장 가깝고 서로 도와야 할 주변의 동료나 부하들이 가상의 적군이 
된다. 윗사람들이 싹수가 보이는 사람들을 제대로 키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기 밑에 있던 사람이 높아지는 것보다는 아예 생판 모르는 
사람이 높아지는 게 편하다. 최소한 말의 상하가 뒤바뀌는 껄끄러움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독려하고 도와야 할 가까운 사람들이 말의 높낮이가 바뀌는 
게 싫어 서로를 저해하는 결과를 빚어내기도 한다. 

물론 꼭 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뒤바뀐 권한의 행사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이 더 큰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서 비롯되어 파인 감정의 골은 쉽게 
무시할 게 못 된다. 관료 사회나 군대에서 고시 출신의 젊은 사무관과 젊은 장교가 
뱉어내는 반말에 상처를 받은 연장의 하급자와 하사관들이 갖게 되는 미움과 
비협조적인 태도들은 우리 말의 높임말과 낮춤말이 야기하는 소모적인 갈등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말투다툼'이 불필요한 사회적 긴장을 유발한다

 

그러나 존댓말 반말은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일례로 교통 사고가 일어나면 잘못이 없는 쪽이 격앙되어 잘못한 
쪽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화가 나는 데다 자신은 당당하고 상대편은 
잘못한 약자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우리의 언어 기제는 반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편에서 잘못은 잘못이고 당신이 뭔데 반말을 하느냐고 따지고 나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아니 지금 뭘 잘했다고 대드느냐고 욕설이라도 한 마디 
튀어나가면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어진다. 그들이 시비를 가려야 하는 건 사고의 
잘잘못인데 그건 나중이고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반말 때문에 멱살잡이를 벌이는 
것이다. 

이런 건 교통 사고뿐만이 아니라 다른 다툼에도 흔히 볼 수 있다. 지난 4월에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조선일보 사장에게 반말을 했다가 그 신문으로부터 호되게 
보복을 당했다는 얘기가 회자된 적이 있다. 그들에게 다른 어떤 불편한 내막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처럼 시비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의 높임과 낮춤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대의 말투를 신경써야 한다. 그런 
비본질적인 문제가 종종 싸움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부를 수 있다. 
주변에서 반말로 인해 싸우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영어처럼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쓰는 사회라면 절대 발생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 

이처럼 존댓말과 반말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긴장을 유발하고 언제든 다툼을 
유발할 소지를 안고 있다.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단지 
반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피 튀기게 싸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잘못 오간 
말투 때문에 누군가에게 깊은 적대감을 품는 사람들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런 적대감이 불러일으키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불화와 불신으로 인한 
손실 비용은 얼마나 될 것인가. 다른 언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엄청난 폐단이다. 

말을 조심해 쓰면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다. 감정이 격앙되면 말을 조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말이 야기하는 이런 소모적인 시비와 투쟁의 소지를 
간과해 왔다. 오히려 존댓말은 웃어른에 대한 공경과 정중함을 나타내며 반말은 
아랫사람에 대한 사랑과 친근함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해악은 결코 무시하고 넘길 만한 게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되도록 모든 이에게 경어를 사용하자

 

그럼에도 유감스럽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온 국민이 나면서부터 젖은 
말과 생각을 고치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하다. 이걸 해결하려면 
존댓말이건 반말이건 어느 하나만을 쓰도록 대대적이고 끈질긴 교육과 계몽을 해야 
하는데, 짧은 시일에는 절대 이루어지질 않는다.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쓰자며 
그걸 실천했을 때 펄펄 뛸 사람들은 또 어디 하나둘인가. 이것은 실현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상이 되기 쉽다. 안타깝지만 어쩔 것인가.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개선의 가능성은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상황이 조금 나아질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되도록 경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반말은 분명히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가하는 폭력이지 당연히 써도 되는 좋은 말이 아니다. 무심히 반말을 
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생기지 않는다. 반면 존댓말을 하는 사람에겐 
자기도 모르는 존중심이 생긴다. 제자에게 경어를 쓰는 교사가 그 제자에게 
무지막지한 체벌을 가할 수 있을까. 말에서부터 존중받는 것을 배운 학생들이 같은 
학생들을 폭행하고 갈취할 수 있을까. 말에서 시작된 자그마한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여건상 그게 안 될 경우 완전한 반말인 '해라'보다는 '하게'나 '하지'를 
사용하는 게 좋다. 그게 옛사람들이나 쓰던 구닥다리 같지만 의외로 어감도 괜찮고 
정겨움이 느껴진다. 듣는 쪽에서도 그냥 '해라'를 하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느낌이 
덜 든다. 그리고 호칭에서도 '너'라는 말보다는 '자네' 또는 '그대'라는 말을 
쓴다. 같은 이인칭이지만 훨씬 더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친한 사이라면 너무 서열 
따지지 말고 '하게'나 '하지' 정도 선에서 서로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수직적인 
관계를 허무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서열은 호칭 자체에서 결정되고 적절한 호칭을 
부른다는 것은 그 지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아버님! 선배님! 하는 말 
속엔 이미 아버지나 선배가 누리는 적절한 지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 쪽만 말까지 높여 그걸 재확인시키는 것은 지나친 권위주의가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장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존댓말 반말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그러나 틀렸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많은 단체들이 사회적 제도적 차별과 불평등을 바로잡으려 노력해 온 덕에 지금 
우리는 예전에 누리지 못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깊이 
뿌리내린 언어의 차별적 요소를 극복하는 것은 그런 노력과 다르지 않으며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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