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18일 목요일 오후 01시 41분 21초 제 목(Title): [소설] 고종석/ 찬 기파랑 이번호 차례 | 과월호/DB 검색 | 홈페이지 ------------------------------------------------------------------------------- - 계간 문학동네 1997년 봄/제4권 제1호/통권10호/단편소설 찬 기파랑 고종석 육년륙년 기 파랑이 죽었다. 일월 오일자 『르 몽드』는 언어학자 기 파랑이 사일 새벽 두시 반께 파리 제이십구에 있는 크루아 생시몽 병원의 한 병실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기 파랑의 사인은 심근 경색이었다. 그렇지만 그 나이쯤 되면 사인이 중요하지는 않으리라. 아흔 넘어까지 산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자연사에 가깝다. 『르 몽드』가 제일면 오른쪽 머리의 스트레이트 기사와 두 면에 걸친 특집으로 그의 삶과 죽음에 호들갑스럽게 경의와 조의를 표하기도 했거니와, 기 파랑의 죽음은 예외적으로 품이 널렀던 어떤 육체와 정신의 소멸을 뜻할 뿐만 아니라 그 정신과 육체를 품었던 한 세기의 종말을 뜻하기도 한다. 그의 죽음이 한 세기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비유나 상징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실제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실제의 차원에서도 그렇다고 한 것은, 한 세기의 끝을 불과 세 해 남기고 마감된 기 파랑의 삶이 바로 이 세기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파리 교외 생망데의 배쟁 병원에서 태어난 것은 일천구백일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한 세기의 종말을 뜻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육체와 인위적 시간대의 그런 우연적 접촉을 훨씬 넘어서는 차원에서다. 이십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다. (하기야, 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아닌 세월이 있었으랴. 그러나 그 규모의 전면성에서 보자면 이십세기는 분명히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다.) 기 파랑의 삶은 그 혁명과 전쟁에 늘 연루돼 있었다. 그가 그 전쟁과 혁명에 늘상 전의에 불타는 투사로서 참가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이십세기의 숱한 전쟁과 혁명에 끊임없이 참견했다. 예컨대 중국과 알제리와 쿠바와 니카라구아의 혁명들, 그리고 스페인과 한국과 베트남과 유고슬라비아의 내전들에 그는 직접 입회했거나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공론화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든 과학이든 지적 유행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십세기는 또 마르크시즘과 프로이디즘의 세기였다. 기 파랑의 지적 삶이 마르크시즘이나 프로이디즘의 진앙에 자리잡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주변부에 자리잡지도 않았다. 마르크스 연구나 정신분석학의 가장 자세한 서지(書誌)에서도 기 파랑이라는 이름과 그의 저작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학자로서의 그의 전공 분야가 역사비교언어학이었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사회 계급이나 정신의 구조 같은 데로 조금만 확장되었더라도 그는 마르크시스트나 프로이디언으로 행세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렇게 행세하고픈 유혹을 받았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언어 연구를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정신분석학으로 환원하고 싶어했던 전위파 언어학자가 아니었다. 학자로서의 그를 매혹한 것은 언어들의, 그리고 언어들만의 역사였고, 그것들의 내적 구조였다. 그는 그런 점에서 이 세기의 역사비교언어학자들 가운데서도 보수파 또는 고전파에 속했고, 바로 그 점에서라면 그는 이십세기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십구세기 사람이기도 했다. 언어 또는 언어사에 대한 연구는 그가 보기에 자연 또는 자연사에 대한 연구와 다름이 없었고, 그런 방식의 언어 연구가 그에게 요구한, 또는 그가 자신의 언어 연구에 요구한 지적 엄밀성과 가혹한 실증성은 아주 추상적 수준에서만 어떤 이념체계들과 관련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 파랑이 이십세기의 이념적 주류에 몸을 띄우지 않은 것을 반드시 그의 전공 학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역사비교언어학자라는 것 이상으로 기 파랑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인·소설가·에세이이스트로서의 기 파랑을 평가해도 그를 어떤 종류의 마르크시스트나 프로이디언의 대열에 끼워넣을 수는 없다. 실상 그가 생애 후반부 내내 소설이나 에세이를 통해 비판한 것은 마르크시즘을 준거틀로 삼아 세워졌다는 사회들의 억압적 측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속류 프로이디즘의 개인주의적 숙명론이 그의 안식처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정신분석학적 인간관이라는 것이, 이십세기에 살을 얻었다가 이내 그것을 발린 어떤 마르크시즘 이상으로 인간을 왜소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르크시즘이든 프로이디즘이든 그것들은 인간의 자유라는 것에 적대적이라고 기 파랑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기다란 삶을 일관해서 이끈 것은 자유에 대한 신념이었다. 비록 구체적 사건들에 대한 그의 관점들이 때때로 흔들리고 변화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기 파랑을 적극적 반마르크시스트나 적극적 반프로이디언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가 이해한 바의 마르크시즘이나 프로이디즘의 해방적 측면을 주목했다. 그는 마르크시즘이나 프로이디즘의 어떤 원리들이 억압적 사회와 맞서 싸우는 데 때로는 효과적인 지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생애 후반기에 정력적으로 집필한 에세이들에서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옹호하고 인간의 존엄과 사회정의를 갈망하며 예컨대 빌헬름 라이히나 에리히 프롬 같은 마르크시스트나 프로이디언을 인용했던 것을 그 증거로 내세울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자신이 그런 글들을 쓰며 자신을 어떤 종류의 마르크시스트나 프로이디언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한 사람의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고자 노력했을 뿐이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시민적 책임감이 그가 이해한 바 마르크시즘이나 프로이디즘의 어떤 원리들에서 직간접적인 자양을 얻었다면 그를 마르크시스트나 프로이디언이라고 불러도 큰 망발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마르크시즘이나 프로이디즘이라는 것이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바에야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를 한 사람의 이데올로그로서는 절충주의자, 아마추어, 딜레탕트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절충주의자, 아마추어, 딜레탕트 따위의 말들이 좋은 함의를 지니고 사용되는 경우는 좀체로 없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지나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역사의 교훈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런 절충주의나 아마추어리즘이 대개는 광기에 맞서는 비판적 이성이나 양식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역사비교언어학자나 보수적인 문학평론가들이지, 사회과학자나 실천운동가들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사회과학자나 실천운동가들이 우선 언어학에 대한 그의 이론적 텍스트를 인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언어학 논문들은, 예컨대 『로만어의 격』을 평하며 클로드 아제주가 옳게 지적했듯, 그의 이론의 투명성만큼이나 투명한 프랑스어로 쓰여져 있지만, 그것들은 위에서 언급했듯 어떤 이념체계와 직접적 관련을 맺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그의 문학 텍스트들이 사회과학자나 실천운동가들에 의해 인용되지 않는 이유도 자명하다. 이념과의 관련을 이론적 텍스트에서보다는 더 표층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는 그의 문학 텍스트에는 그러나 이론적 텍스트에서만큼 그의 생각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투명하지 않은 것은 지표가 되기 어렵다. 그의 문학 텍스트의, 그리고 그것을 자아낸 그의 프랑스어의 불투명성은, 문학 텍스트라는 것의 고유한 특성일 수도 있을 것이고, 세계에 대한 기 파랑의 관점의 특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렇거나 투명하지 않아서 지표가 되기 어려운 문학 텍스트를, 직업적 문학평론가라면 몰라도, 사회과학자나 실천운동가들이 인용할 까닭은 없다. 그 사회과학자나 실천운동가들이 예외적으로 섬세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면 혹 몰라도 말이다. 기 파랑의 문학 텍스트들이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꽤 인용됐다고 해서 기 파랑을 위대한 문필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기야 위대하다는 형용사도 그 잦은 쓰임 때문에 그 말이 본디 지니고 있던 광휘를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예술가로서의 기 파랑은 연구자로서의 기 파랑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 그가 위대한 언어학자였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가 위대한 작가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의 소설이 공쿠르상을 탔고, 그의 어떤 시들이 내전기의 스페인이나 육십팔년 오월의 파리에서 구가됐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이십세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그의 자리를 예컨대 사뮈엘 베케트나 폴 발레리의 자리에 견주기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만용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글쓰기가 반드시 위대한 삶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이십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데에는 아마 꽤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고, 그의 철학과 나찌즘 사이에 어떤 필연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이데거의 삶이 위대했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 파랑의 삶이 위대한 삶이었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그랬듯, 이십세기에도 위대한 삶은 많았다. 더군다나 그 세기가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다면 이십세기가 위대한 삶들을 낳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 파랑이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반드시 위대했대서가 아니다. 그가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맞닿은 이십세기 내내 그가 이 세기의 특징적 사건들에 비판적으로 간여했고, 그의 쉬임 없는 비판적 간여가 이십일세기를 위한 하나의 전망을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그가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사실 어쩌면 이 이유가 더 클지도 모른다. 언어학자 기 파랑은 한국어에 관한 아주 중요한 책을 남겼고, 문필가 기 파랑은 그의 한국 체류기를 일부로 포함하는 에세이를 남겼다. 프랑스 애호라는 것이 문화계 일각에 깊이 뿌리내린 나라에서 그 두 책이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기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앞의 책은 지금도 국어사학계가 넘어서지 못한 기념비적 저작이고, 뒤의 책은 이십년대 말의 조선 사회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그러나 이런 것을 떠나서라도 그는 개항 이래 조선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사랑한 서양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의 가장 커다란 슬픔이 바로 이 땅과 관련이 있는데도 말이다. 파리 동쪽에 우거져 있는 뱅센 숲의 언저리에 생망데라는 코뮌이 있다. 이 작고 아름다운 교외 도시와 파리를 잇는 길, 즉 파리 거리에 일천팔백오십오년, 큼직한 병원이 들어섰다. 이름하여 베쟁 병원이다. 뛰어난 외과 의사였던 루이 자크 베쟁(일천칠백구십삼년에 태어나 일천팔백오십구년에 돌아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병원은 주로 군인이나 군인 가족들이 이용한다. 말하자면 군인 병원이다. 베쟁은 한 생애를 프랑스 군대에서 보내며 수많은 군의관들을 길러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군인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러니, 이 군인의사의 이름을 딴 병원이 군인 병원이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이 병원이 민간인 환자들을 안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이런저런 혜택을 더 줄 뿐이다. 가족 가운데 직업 군인이 아무도 없었던 기 파랑이 이 군인 병원의 한 산실에서 태어난 것은 일천구백일년 일월 이십이일이다. 그날은 우연히도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의 여제로서 지구의 사분의 일을 통치하던 빅토리아가 향년 팔십일 세로 등하한 날이었다. 그 우연은 우리의 기 파랑에게는 약간의 행운이기도 하고 커다란 불운이기도 하다. 그것이 약간의 행운인 것은 여왕의 죽음과 그의 생일이 겹치는 바람에 뒷사람들이 그의 생일을 쉽게 기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것이 커다란 불운인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천구백일년 일월 이십이일이 결코 기 파랑의 생일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날은 무엇보다도 빅토리아 여왕의 기일이었고 또 지금도 그리 기록되고 있다. 당연하다, 육십삼 년 동안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끈 인물과 생애의 대부분을 학교와 난장 주위에서 맴돌며 약간의 이름을 얻은 인물을 비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기 파랑이 일천구백일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여왕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그의 연보를 기억하기 쉽게 만든다. 그의 나이와 연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은혜라면 은혜인 이런 행운을 잡은 사람들 가운데 뒷날 약간의 이름을 얻은 사람이 기 파랑만은 아니다. 그가 일천구백일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가 쿠바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영화 배우 클라크 게이블과 게리 쿠퍼,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만화가 월트 디즈니,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삼세 같은 사람들과 동육년륙년갑이라는 뜻이다. 이 가운데 지난 일월 사일 새벽까지 살아 있던 사람은 오직 기 파랑뿐이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이 예견되던 사람은 레오폴드 삼세뿐이었다. 레오폴드 삼세는 벨기에 국왕 알베르 일세의 태자였으므로 그가 별 사변이 없는 한 뒷날 벨기에를 통치하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누구나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미리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어른이 된 기 파랑도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막 태어난 아이에게 미래는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뒷날 이름을 얻게 된 기 파랑의 동갑내기들 가운데 레오폴드 삼세로 불리게 될 아이를 빼고는 그 누구의 탄생도 거국적으로 축복받지 못한 이유다. 흔히 들리는 농담이지만, 신문은 위인의 죽음은 기록하지만 위인의 탄생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기 파랑이 태어난 일천구백일년은 이십세기의 첫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일천구백년대라는 것과 이십세기를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십세기의 첫해라는 이미지는 노벨상이 수여되기 시작하고 스무 살의 파블로 피카소가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일천구백일년보다는, 파리에서 만국박람회와 올림픽이 열린 일천구백년에 더 두텁게 입혀져 있다. 니체가 사망한 해인 일천구백년에는 자크 프레베르, 쿠르트 바일, 헬레네 바이겔, 에리히 프롬, 루이스 암스트롱, 쥘리앵 그린, 토머스 울프, 마거릿 미첼, 아나 제거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같은 이름의 아이들이 기 파랑의 자치동갑으로 태어나 뒷날 시인으로, 배우로, 작곡가로, 사회학자로, 트럼펫 주자로, 소설가로 이름을 얻었다. 만국박람회의 부대행사 가운데 하나로 준비도 없이 엉망으로 치러진 그 해의 제이회 올림픽과 기 파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기 파랑의 친인척 가운데 체육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해두는 것이 좋겠다. 기의 이종사촌, 즉 어머니 카롤린 파랑(그녀의 처녀 때 성은 뷔샤르였다)의 이질인 조르주 뷔샤르는 유명한 펜싱 선수였다. 그는 일천구백이십팔년 암스테르담 올림픽과 일천구백삼십이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프랑스 대표로 출전해 두 번 다 개인 에페 부분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스물세 살 때 기 파랑과 결혼해서 클레르 파랑이 된 클레르 샤르팡티에는 일천구백삼십륙년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 일백 킬로미터 사이클 개인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로베르 샤르팡티에의 누이다. 기 파랑의 유일한 손녀인 아를레트 파랑(올해 사십칠 세인 그녀의 지금 성은 기욤이다. 그녀의 남편 미셸 기욤은 사회당 소속으로 파리 제이십구의 구청장이다. 또 미셸 기욤의 종조부는 기 파랑 못지않은 언어학자로서 ‘심리체계론’이라는 독특한 언어이론을 창안해낸 귀스타브 기욤이다)도 프랑스의 여자 마라톤을 대표해 일천구백칠십륙년 몬트리얼 올림픽에 나갔다. 비록 그녀가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얻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비행사를 일종의 운동선수로 쳐줄 수 있다면, 기 파랑의 두 살 터울 형인 올리비에 파랑도 운동선수였다. 학창시절엔 축구 선수의 꿈을 지니기도 했던 올리비에 파랑은 초창기의 국제항공로를 개척한 항공우편 비행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프랑스의 초창기 항공회사 가운데 하나인 콩파니 제네랄 아에로포스탈에서 우편기 조종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일천구백삼십삼년 프랑스 정부의 주도로 이 회사가 다른 항공회사들과 합병돼 에르 프랑스로 되태어난 뒤에는 에르 프랑스의 비행기를 몰았다. 반면에 예술에 재능을 지닌 사람은 파랑 집안에 거의 없었다. 한 사람의 예외가 기의 종질인 클로드 파랑이다. 일천구백이십삼년생인 클로드는 철학자 폴 비릴리오와 함께 건축 원리 그룹을 창시한 이래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성 양식에 도전하며 이론과 실제에서 이십세기 프랑스 건축의 한 귀퉁이를 받쳐온 건축가다. 원래 파랑 집안은 십칠세기 초 이래 인쇄업에 종사했다. 인쇄노동자였던 기의 조부 베르나르 파랑은 일천팔백칠십일년 파리 코뮌 당시 노동자군의 한 지도자였다. 그는 그해 오월 이십팔일 벨빌 거리에서 칠백여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베르사이유의 정부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다. 기의 아버지 장피에르 파랑도 파리의 중앙시장 근처에서 조그마한 인쇄소를 경영했다. 몇 세기 동안 내려오던 가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그의 두 아들 올리비에와 기였다. 학교생활을 축구로 채웠던 올리비에와는 달리, 기의 성장기는 책 속에 파묻혀 지났다. 그리고 그의 교육과정은 자기 집안의 전통과는 달리 전형적인 파리 부르주아의 그것이었다. 기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의 예비반을 거쳐서 한 번의 실패 뒤에 파리 윌름 거리의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스물한 살때였다. 졸업 후 역시 한 번의 실패 뒤에 고전문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파리의 앙리 사세 고등학교와 고등사범학교에서 잠시 가르친 뒤 동아시아로 건너갔다. 귀국 뒤에는 고등연구 실천학교에서 가르치는 한편으로 소르본에서 국가박사 과정을 밟았다. 서른여덟 살에 국가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뒤 은퇴할 때까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 스트라스부르 대학, 소르본 대학에서 로만어 비교언어학과 동아시아 언어들을 가르쳤다. 고등사범학교 시절과 고등연구 실천학교 시절 사이의 동아시아 체류에 대해서는 좀 자세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위에서도 비쳤듯 그것이 기 파랑의 삶에서 특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대목이기도 하다. 기 파랑은 일천구백이십팔년부터 일천구백삼십삼년까지 네 해 반 남짓 현지 언어 연구를 위해서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 체류했다. 기 파랑의 전공은 본디 로만어였지만, 그는 곧 그것을 동아시아어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그는 이십세기의 프랑스 언어학자들 가운데 아마 클로드 아제주를 빼놓고는 가장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한 세대 이상 뒷사람인 아제주에 대해서는 생전의 기 파랑도 한 심포지엄 석상에서 “그는 나보다 두 배 이상의 언어를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실은 그보다 한 세대 전에 에밀 벤베니스트가 기 파랑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하다. 기 파랑보다 한 살 아래로 고등연구 실천학교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했던 에밀 벤베니스트는 이십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도유럽어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그 벤베니스트조차도 일천구백삼십칠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취임하며 그 취임연설에서 “기 파랑은 나보다 두 배 이상의 언어를 알고 있고, 기 파랑의 이론은 내 이론보다 두 배 이상 정치하다. 그러나 지금 나 대신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그 사람은 스페인에서 총을 들고 싸우고 있다. 나는 펜으로도 총으로도 내 친구에 미치지 못한다”고 기 파랑에 대해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일천구백이십륙년에 결혼한 아내 클레르와 함께 기 파랑이 북경에 도착한 것은 일천구백이십팔년 사월이다. 장개석이 북벌을 재개한 시점이다. 당시 클레르는 임신중이었다. 그보다 한 해 전에 장개석은 상해에서 이른바 사일이 반공 쿠데타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유혈 진압했다. 일천구백이십사년 코민테른의 주선으로 손문이 이뤄낸 연소용공 부조농공의 제일차 국공합작이 와해된 것이다. 장개석은 이로써 북쪽의 군벌과 그를 조종하는 일본군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뒤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도시 폭동 노선을 강화했다. 그해 팔월 일일 홍군 이만여 명은 남창에서 봉기해 혁명위원회를 수립했고 국민당군이 남창을 압박하자 그해 십이월에는 노동자들과 연대해 광주에서 무장봉기해 노농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광주 코뮌도 국민당의 무차별 살륙작전으로 삼 주 만에 무너져버렸고,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자들은 도시 폭동 노선을 폐기하고 농촌을 먼저 장악해 도시를 포위한다는 모택동 노선으로 선회했다. 모택동과 주덕의 지휘로 정강산으로 들어간 홍군은 국민당의 포위와 거칠기 짝이 없는 의식주 속에서도 이른바 삼대 규율, 팔대 주의, 유격전술의 사대 원칙으로 정신을 무장하며 반격의 채비를 갖췄다. 천하대란이라는 말만큼 당시의 중국 상황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었다. 일본과 서유럽 각국, 미국, 소련 등의 열강과 국내의 각 정치·군사 세력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국의 진로에 가탁하며 합종연횡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북경에 도착한 지 두 달이 조금 못 되는 일천구백이십팔년 유월, 기 파랑은 장개석군의 북경 점령을 목격했다. 바야흐로 장개석의 북벌은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넉 달 후인 시월 팔일에 장개석은 남경에서 국민당 정부의 주석에 취임했다. 그때 기 파랑은 이미 일본에 있었다. 그는 그보다 석 달 전인 그해 칠월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그가 조선을 거쳐서 일본에 도착한 것이 시월이었으니 그는 조선에서 두 달 반 가량을 체류한 것이다. 사실 그 당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이 중국과 일본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므로(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일천구백삼십이년 이월이었다) 그가 조선을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는 말은 그때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는 올바른 말이 아니기는 하다. 조선은 그때 일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기 파랑은 일본군이 조종하는 북양군벌의 최후 잔당들이 장악하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에서 중일 국경을 지나, 일천구백십년부터 법적으로 일본영토가 된 조선반도를 비스듬히 관통한 뒤, 해로를 통해 혼슈우로 간 것이다. 기 파랑은 그 이듬해, 즉 일천구백이십구년을 온전히 조선에서 보내며 조선어를 연구하게 되지만, 그가 처음 들른 서울에 두 달 이상이나 머무른 것은 이 나라의 언어, 정확히는 일본의 조선반도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가 동아시아 체류를 계획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국의 여러 언어들과 일본어에 대한 연구였다. 그러니 그가 조선반도에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얼마간 머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 클레르가 해산을 해야 했던 것이다. 파랑 부부가 일천구백이십팔년 팔월, 당시 이름이 케이조오였던 서울에 도착했을 때, 기 파랑은 만삭의 아내와 함께 토오쿄오까지의 여행을 강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해산을 하고 몸을 추스를 때까지 서울에 머물기로 했다. 그는 이종사촌인 조르주 뷔샤르가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서울에서 들었다. 클레르는 그달 말, 서울의 한 병원에서 그들 부부의 유일한 아들 장프랑수아를 낳았다. 앞질러 얘기하자면 장프랑수아 파랑은 뒷날 자기 부모보다 훨씬 먼저 객사했고, 그것이 그들 부부와 조선이라는 나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클레르가 몸을 푼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일천구백이십팔년 시월 초에 파랑 부부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 현해탄을 건넜다. 파랑 부부가 일본에 오래 머문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 말했듯 실상 기 파랑이 동아시아에까지 오게 된 것은 당초 일본어와 중국어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는 했다. 일본어와 중국어의 걸음마를 겨우 뗀 파랑으로서는 동아시아로 가서 현지 학자들과 교유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일방 여러 방언들에 대한 필드워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해산 때문에 우연히 이뤄진 두 달 남짓의 서울 체류가 당초의 계획을 변경시켰다. 그는 서울에서 일단의 조선어학자들을 만났고, 조선어학자들만이 아니라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산을 보았다. 그것이 그의 일생을 통해 이어진 한국 사랑의 시작이었다. 조선과 조선어에 대한 그의 첫 만남을 그의 동아시아 체류기 『봄 샐러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내가 태어났을 때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이 나라는 일본제국에 병합됐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영국과 에이레의 관계와 비슷하다. 에이레가 영국의 식민지라기보다는 해외 영토의 일부이듯이(물론 최근에 에이레 남부가 자유 에이레로 자치권을 얻었으니, 이제 해외 영토의 일부라는 말은 정확히는 얼스터의 여섯 개 카운티에만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남부마저 아직 완전한 독립을 얻은 것은 아니고, 과거를 조금만 거슬러오르면 에이레 전체가 조선과 닮은 점이 여러 가지이므로, 우리의 비교가 특별히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조선도 일본의 식민지라기보다는 해외 영토의 일부인 것이다. 영국인과 에이레인들을 외모로 구별하기가 힘들듯이,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얼른 보고 구별하기가 힘들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렇지만 에이레의 작가들이 이제 거의 영어로만 작품을 쓰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작가들은 조선어로 작품을 쓴다. 병합의 역사가 아직 짧다는 사정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만약에 조선인들 대부분의 뜻과 어긋나게 병합의 역사가 앞으로 길게 계속된다면, 조선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일본어의 문화적 압력에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영어와 게일어보다 일본어와 조선어가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이 오히려 조선어의 미래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조선어와 일본어의 닮음은 놀랍다. 유형론적으로는, 얼핏 독립된 어휘부를 지닌 단일언어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그것이 긴 시간 동안의 접촉과 간섭의 결과인지, 두 언어 사이의 친족관계의 결과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두 언어 사이의 친족관계는 증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증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동원어(同源語)라고 할 수 있는 낱말들을 두 언어의 토착 어휘부에서 찾아내기는육년륙년정말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두 언어 사이의 접촉과 간섭이 아무리 긴 세월 동안 긴밀히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어휘부가 아니라 문법 유형이 그 정도로 닮게 되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사는 두 언어 사이의 접촉과 간섭이 조선어와 일본어와 같은 정도의 유형론적 상동을 낳은 예를 아직 기록한 바 없다. 어휘부에서도, 일본어가 야마토코토바 또는 와고라고 불리는 토착어와 캉고라고 불리는 중국계 어휘로 양분되듯이, 조선어의 어휘 역시 토착 어휘와 중국계 어휘로 양분된다. 조선어든 일본어든 이런 중국계 차용어가 어휘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할 나위 없이 중국어가 두 언어에 대해 긴 세월 동안 행한 간섭의 결과다. 그리고 두 언어의 서로 상응하는 중국계 어휘들은, 비록 다소 다르게는 읽히고 있으나, 동일한 중국어 형태소로 이뤄져 있고, 대체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양상은 일본의 조선 병합 이후에 일본어가 조선어에 대해 행한 간섭 때문에 더 강화되고 있다. 두 언어 사이의 이런 닮음은 두 언어의 화자가 상대 언어를 배우기 쉽게 만든다. 이를테면 조선사람들은 유럽어보다 훨씬 더 쉽게 일본어를 배울 수 있고, 실제로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일본어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역은 사실이 아니다. 어쩌면 일본사람들도 유럽어보다 쉽게 조선어를 배울 수 있겠지만, 나는 조선과 일본에서 체류하는 동안 조선어를 할 수 있는 일본 지식인을 겨우 세 사람 만났을 뿐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 두 사람은 조선어학자였으므로 말할 거리도 못 된다. 그리고 지식인들이 이럴진대, 일본의 일반 민중이 조선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예컨대 조선어의 음운구조가 일본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서 조선사람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보다는 일본사람이 조선어를 배우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우리라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문화적 압력이다. 일본제국의 문화가 "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호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듯이 " 케이조오가 아니라 토오쿄오에 중심을 두고 있는 이상, 그래서 문화활동 전반이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로 이뤄지는 이상, 더구나 일본열도의 교육과정에 조선어가 포함돼 있지 않은 이상, 조선어를 굳이 배우려는 일본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일본어를 알게 될 조선인들은 앞으로 점차 늘어날 것이다. 더구나 조선반도의 교육과정에는 일본어가 필수과목이 돼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두 언어가 그리도 닮았다는 것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일반적 적개심에도 불구하고(일천구백십구년 봄 케이조오를 비롯해 조선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일 봉기는 조선사람들의 독립 염원이 에이레 사람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장기적으로는 일본어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감을 눅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조선에서의 조선어의 운명이 에이레에서의 게일어를 닮게 될 수도 있다. 그걸 염려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 조선어연구회라는 민간단체의 젊은 학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견결한 민족주의자들이다. 케이조오의 거리엔 일본사람들과 조선사람들이 뒤섞여 걸어다니고 있었다. 나의 경우, 처음엔 그들을 생김새로 구별할 수는 전혀 없었다. 옷차림새나 거동이나 말투를 세심히 관찰하고 나서야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케이조오에서 몇 주일을 보냈을 때, 나는 사람들의 표정만으로도 그들이 일본열도에서 온 사람들인지 본디 조선반도에서 살던 사람인지를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 짐작이 항상 들어맞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은 표정이 다르다. 묘하게도 일본사람들의 표정은 뭔가 어둡고 비장한 데 견주어 조선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낙천적이다. 그 거꾸로가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영국인과 에이레인의 표정에 대한 내 관찰과도 일치한다. 그런 낙관주의 때문에 나라를 잃게 된 건지, 아니면 나라를 잃은 아픔을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낙관적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과는 무관한 일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프랑스인들이나 심지어 앵글로색슨계 미국인들의 표정도 영국인들의 표정에 비하면 대체로 밝고 낙천적이니까. 그 인과관계가 어찌 되었든, 내가 에이레 사람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듯이 나는 조선사람들을 금방 좋아하게 돼버렸다. 장마가 끝난 케이조오의 하늘은 매일 푸르렀다. 한 점의 구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케이조오의 여름 햇빛은 파리의 여름 햇빛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좋게 살갗을 간지럽힌다. 나는 이따금 남쪽의 목멱산을 산책했다. 짙푸른 나무들 속에 처박혀 책을 읽는 맛이란. 뷔트쇼몽을 거기에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나라에 얼마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그래서 그는 토오쿄오와 쿄오토에 잠시 머문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쿄오토에서의 그의 행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히로히토 천황의 대관식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 전 천황 요시히토가 죽은 것은 그보다 두 해 전인 일천구백이십륙년 십이월 이십오일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날부터 히로히토는 일본제국의 새로운 천황이었지만, 대관식이 늦었던 것이다. 일천구백이십팔년 십일월 십일에 있었던 그 대관식에 외국인들로서는 몇몇 국가 수반과 일본 주재 외교관들만 초대가 됐는데, 스물여덟 살의 이름 없는 언어학자가 거기 끼일 수 있었던 것은 좀 뜻밖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다니엘 갈리에니의 아들 마르셀 갈리에니가 기 파랑과는 루이르그랑과 고등사범학교의 절친한 동기동창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기 파랑은 다니엘 갈리에니를 학창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직업 외교관의 애국심과 부르주아적 관대함을 존경하고 있었고, 갈리에니 대사 역시 자기 아들의 친구가 지닌 학문적 재능을 일찍부터 전해듣고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공화주의자 기 파랑은 일종의 호기심으로 천황의 대관식을 보고 싶어했고, 그것을 갈리에니 대사가 어렵사리 주선해주었다. 자기가 보고 싶어했던 광경이기는 했지만, 천황의 대관식이 기 파랑에게 그리 큰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인상을 주기는 주었으되 나쁜 쪽의 인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당시의 인상을 『봄 샐러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 “히로히토는 일본의 일백이십사대 천황이라고 한다. 일본어에는 반세이익케이『万世一系』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같은 혈통이 영속된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자기들 황실에 대해서 이르는 말이다. 이천오백 년 동안 황실이 한 핏줄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이 개명한 이십세기에 아직까지 핏줄에 대한 그런 신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더구나 일본 같은 문명사회에. 히로히토는 세계 평화의 유지를 위해서 모든 나라와 친선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지난 세기 이래 지속적으로 전쟁을 추구해온 나라라는 걸 생각하면 그 연설이 참 얄궂다. 정치가들은 " 만일 천황도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면 " 지구 위 어디에서든 죄다 똑같다. 수치심이 없는 인간들인 것이다. 오후 두시에 시작된 대관식은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오후 세시가 조금 지났을 때 타나카 남작이라는 사람이 일어서서 천황 부부 앞에서 반자이를 세 번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따라했다.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까지 일본의 국가 이기주의가 조선사람들이나 중국사람들에게 저지른 범죄 행위를, 기 파랑의 조국인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의 열강들이 아시아 사람들에게 저지른 범죄 행위보다 더 크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 파랑이 일본 천황의 대관식을 참관하며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고 말할 때, 듣는 사람에 따라선 그 말이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남을 무섭게 대한 자신에 대한 반성이, 유럽인으로서의 반성이 거기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본 같은 문명사회라는 말도 듣기에 따라선 우스운 말이다. 일본이 문명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의 문명화 여부와 신화의 존속 여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십일세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도 온갖 종교적 근본주의, 고삐 풀린 민족주의가 지구 곳곳을 피로 물들이고 있지 않은가? 신앙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이라는 신화가 말이다. 더구나 프랑스 식민주의가 인도차이나를 사나운 발톱으로 할퀴고 중국까지 넘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약진을 거듭하던, 즉 문명화가 가속화되던 제삼공화국 시기였다. 그 제삼공화국 민주주의의 화신이었던 쥘 페리는 식민주의의 화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체류기인 『봄 샐러드』에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구체적 반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기 파랑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어떤 책에다가 자기 생각을 모두 쏟아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설령 『봄 샐러드』를 쓰던 당시에 기 파랑의 반식민주의가 철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철저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책의 군데군데에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철저한 반식민주의자라는 것을 뒷날 다른 많은 글들과 무엇보다도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 파랑이 느꼈던 그 무서움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삼십년대 이후 일본의 침략전쟁들 직전에 생긴 것이라는 점에서 그 무서움은 직관과 통찰로 가득 찬 무서움일 수도 있다. 어쩌면 기 파랑은 천황의 대관식에서 뒷날 남경학살과 생체실험과 종군위안부 따위를 가능케 한 일본 정신의 한 자락을 어렴풋이 엿보았는지도 모른다. 일천구백이십팔년 말 파랑 부부와 어린 장프랑수아는 서울로 돌아왔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증권 시세가 폭락해 대공황이 시작되던 검은 목요일의 해, 일천구백이십구년을 기 파랑 가족은 아침의 고요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던 땅에서 보냈다. 기 파랑의 이 두번째 서울 체류는 그의 학문적 이력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체류 때문에 그의 동아시아어 연구는 중국어나 일본어 중심이 아니라 한국어 중심으로 이뤄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에 머물며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의 오구라 신페이 교수를 비롯한 강단의 학자들과 친교를 맺기도 했지만, 그가 더 애써 사귀고 어울린 것은 조선어연구회에 포진하고 있던 조선인 재야 언어학자들, 국어운동가들이었다. 그들과의 교유는 단순히 학문적 수준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정서적 교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 파랑은 이미 그 전해인 일천구백이십팔년 여름의 서울 체류 당시 조선어연구회 사람들을 포함한 몇몇 조선인 국어 연구자들과 안면을 익힌 바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이다. 기 파랑은 두 차례의 서울 체류 기간 동안 자기보다 두 살 아래인 홍기문과 가장 가깝게 사귀었던 모양으로, 그의 『봄 샐러드』에는 홍기문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 가운데 일부를 보이면 이렇다 : “내가 홍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조선어를 거의 몰랐고, 그는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어나 일본어 또는 영어를 통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중국에 체류한 경험도 있고 토오쿄오에서 유학을 하기도 해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숙했다. 그의 영어는 아주 서툴렀지만, 내 중국어와 일본어가 달릴 때 그것을 보충할 정도는 되었다. (……) 조선인으로서 조선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 홍도 견결한 민족주의자다. 그는 자신이 조선어 연구에 뛰어들게 된 것이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일본어로 읽고 나서라고 말했다. ‘한 나라가 노예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 언어만 보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아멜 선생의 말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수업"을 읽은 것은 일천구백십구년 삼월에 있었던 조선인들의 전국적 반일 봉기가 일본인들에 의해 처절하게 진압된 직후였다고 한다. (……) 그는 내가 케이조오에 처음 들르기 한 해 전인 일천구백이십칠년 『현대 평론』이라는 잡지에 "조선문전요령"이라는 논문을 연재했는데, 나는 그 텍스트를 매뉴얼로 삼아 조선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논문을 보완해서 책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다른 사회운동에 바빠 내가 중국을 떠날 때까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조선을 떠나 중국에 머무르면서도 그와 이따금씩 문통이 있었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정치적인 일로 바빠 언어학 연구에는 짬을 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재능이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조국의 현실이 안타깝다. (……) 그는 신간회라는 좌우 통일전선단체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그의 민족주의는 좌파 민족주의라고 할 만하다. (……) 그의 부친인 홍명희는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교육자이자 문필가다. 나는 홍기문과 함께 그의 집에 두 차례 초대된 적이 있는데 그는 중국사람과 다름없는 중국어를 구사했고, 그 박학과 논리적 언변이 감탄할 만했다.” 홍기문은 뒷날 『향가 해석』 『고가요』 등 국어학, 국문학 쪽의 기념비적 저서를 냈고, 북한의 『조선왕조실록』 번역 작업을 주도했으므로 결국은 기 파랑의 안타까움을 쓰다듬어준 셈이 되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민족해방운동에 통째로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의 양과 질이 지금과 사뭇 다를 수는 있었겠지만 말이다. 반면에 홍기문의 바로 그런 헌신적 실천활동 때문에 그의 학문적 업적들이 더욱더 도두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기 파랑의 경우도 비슷하다. 물론 운동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서 기 파랑을 홍기문에 비유할 수는 없겠지만, 기 파랑 역시 자신의 학문적 야망을 위해서 자기 주위의 현실에 눈감지는 않았다. 학문적 야망이 일순위였다면 그가 뒷날 중국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국제 여단의 전사로서 스페인으로 달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 파랑과 홍기문의 문통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봄 샐러드』에서는 기 파랑의 중국 체류 때까지 두 사람의 문통이 계속됐다는 게 확인되지만, 그 이후의 책에서는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홍기문이 뒷날 북한에서 사회과학원 원장, 최고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등 학계와 정계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한 것이나, 거기에 비견할 지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기 파랑 역시 언어학계의 거물이 되고 프랑스 지식인의 상징적 인물이 된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서로의 소식을 전혀 몰랐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자주는 아니더라도 편지를 주고받았을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 편지 교환이 칠십년대 이후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 체제에 대한 기 파랑의 입장은 칠십년대 이후에 상당히 비판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 파랑은 물론이고 홍기문 역시 삼십년대 중반 이후의 공간된 글에서 옛친구에 대한 언급이 없는 만큼 그 문제에 대해서 속단하기는 어렵다. 두 사람의 유품들이 완전히 정리되고 공개된 이후에야 거기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겠는데, 일천구백구십이년에 사거한 홍기문의 유품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확인할 길이 없고, 기 파랑의 유품들을 간직하고 있을 아를레트 기욤 여사 쪽에서 혹시 어떤 단서가 나올지는 모르겠다. 홍기문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어연구회에 관련된 사람들과 기 파랑의 교분은 꽤 두터웠던 듯하다. 이 단체에 대한 언급이 『봄 샐러드』에 길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루 알다시피 조선어연구회는 일천구백이십일년 십이월 삼일 휘문의숙에서 창립됐다. 당시 휘문학교 교장이었던 임경제, 그 학교의 교사였던 권덕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최두선, 보성학교 교두였던 이규방, 그 학교 교사였던 이승규, 조선일보 문화부장이었던 장지영 같은 사람들이 창립회원들이었다. 대개는 한힌샘 주시경의 제자들이었다. 창립 당시의 규약 제일항에서 설립 목적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시피 이 재야단체는 기본적으로 학술단체였지만, 그들의 조선어 연구는 강한 민족주의적 지향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어연구회는 매년 사월에 총회를 열고, 매월 한 번씩 연구발표회를 열어 조선어의 연구와 지도, 보급에 힘썼다. 이 연구회는 일천구백이십륙년 십일월 사일, 음력 구월 이십구일을 가갸날로 선포했고, 일천구백이십팔년에는 이를 한글날로 개칭했다. 기 파랑의 『봄 샐러드』에도 거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 “문자의 제정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민족은 아마 지구 위에서 조선인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에 동화되는 걸 끔찍이 두려워하는 조선인들은 바로 그들의 이 고유한 문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 문자는 유럽인들의 눈에는 한자와 비슷하게 보이겠지만 한자와는 조직 원리가 전혀 다른 표음문자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탄생일이 명확히 밝혀진 유일한 문자일지도 모른다.” 조선어연구회가 음력 구월 이십구일을 가갸날로 정한 것은 그날을 한글이 반포된 날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제일백십삼권 세종 이십팔년 구월 이십구일자 뒤에 “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뤄졌다『是月訓民正音成』”는 기록이 있어서, 구월의 마지막 날인 이십구일에 훈민정음이 반포된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조선어연구회는 가갸날이라는 이름을 한글날로 바꾼 뒤에도 계속 음력으로 이를 기념해오다가 일천구백삼십이년에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시월 이십구일을 새 한글날로 정했다. 그러다가 일천구백사십년 칠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었고, 그 책 끝의 정인지 서문에 “정통 십일년 구월 상한(正統十一年九月上澣)”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훈민정음이 일천사백사십륙년 음력 구월 상한에 반포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당시는 기 파랑이 『봄 샐러드』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 즉 일본어의 문화적 압력만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정권 차원의 조직적인 조선어 말살 정책이 추진되고 있던 터여서 한글날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없었고, 해방 뒤에야 구월 상한의 마지막 날인 구월 십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시월 구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일천구백사십륙년 시월 구일부터 이날에 한글날 기념행사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어연구회는 일천구백삼십일년 일월 십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었고, 일천구백사십구년 구월 오일에는 다시 한글학회로 개칭했다. 한글학회라는 괴상망측한 이름이 탄생한 것은 물론 조선이라는 말이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지니게 된 이데올로기적 함의 때문이다. 그때는 이미 기 파랑의 절친한 친구였던 홍기문이나, 일제하 조선어학회를 이끌어왔던 이극로 같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넘어간 뒤였다. 기 파랑의 소설들과 에세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사람은 민족주의나 프롤레타리아 혁명 같은 투명하고 순결한 관념을 늘 의구심으로써 대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알제리나 쿠바나 베트남에서의 혁명이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쟁점이 될 때마다 늘 또렷한 제삼세계주의, 민중주의의 편향을 보여왔는데, 우리는 그것이 기 파랑의 조선 체험, 그리고 그 직후의 중국 체험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의 강한 언어민족주의가, 일종의 보편주의적 믿음을 어려서부터 주입받은 뒤 지구의 반을 여행해온 이 벽안의 언어학자에게 어떤 열광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기 파랑은 조선어연구회 사람들의 때로는 편협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민족주의 속에서 족쇄에 묶여 있는 한 민족의 해방을 향한 갈망과 몸부림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갈망과 몸부림을 이해했을 것이다. 조선어연구회 사람들말고도 그는 은밀히 또는 공개적으로 조선공산당 사람들이나 카프 문인들과도 친교를 맺었는데, 그들의 생각을 그가 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집안의 노동자적 전통, 파리 코뮌 때 죽은 그의 조부의 피가 그의 마음을 조선의 투사들에게로 끌어당겼는지도 모른다. 『봄 샐러드』를 다시 한번 펼쳐보자 : “프랑스인으로서 나는 때때로 내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프랑스는 세계의 중심이니까 말이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주입받아온 선민의식 같은 것이었다. 프랑스적 가치는 보편적 가치라는 거만함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프랑스적 가치라는 건 무엇인가?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걸까? 나폴레옹 전쟁 이래 프랑스의 팽창주의는 그 보편적 가치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프랑스인들의 자기희생적 무용(武勇)이었을까? 내 선조들은 노동자들이었다. 일천팔백칠십일년 봄 파리의 거리에 피를 뿌리며 자기들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싸웠던 그 노동자들 말이다. 그때 그 노동자들에게 프랑스 국가는 프로이센 국가와 크게 달랐던 것일까? 나는 한 제국주의 국가의 시민이면서 노동자의 후예다. 제국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나는 이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노동자의 후예로서 나는 이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느낀다.” 기 파랑의 조선 체류가 그 자신의 학문이나 삶에만이 아니라, 조선에서의 조선어 연구와 조선어 운동에 일정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겠다. 일천구백삼십삼년 시월 조선어연구회의 후신 조선어학회가 발표한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이 그것이다. 조선어 철자법의 통일, 즉 한글맞춤법의 통일은 일제하 우리 국어운동사의 가장 커다란 획을 이룬다고 할 만하다. 조선어학회의 통일안이 조선어 신문들에 의해 채택됨으로써 비로소 그때까지 한글 표기가 겪었던 극심한 혼란상이 극복됐기 때문이다. 지금 남과 북의 국어 철자법은 그 당시의 통일안을 다소 손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이 마련되는 과정에 기 파랑이 직접 간여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기실, 권덕규 김윤경 박현식 신명균 이극로 이병기 이희승 이윤재 장지영 정열모 정인섭 최현배의 십이 인 위원으로 철자법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기 파랑 일가가 서울을 떠난 뒤인 일천구백삼십년 말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조선에 체류하던 당시에 조선어연구회 회원들과 숙의 끝에 만들어낸 기 파랑 식 한국어 로마자화 안은 철저한 형태음소주의를 취하고 있어서, 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 또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형태음소주의와 거의 완벽하게 조응한다. 이를테면 그보다 십 년 뒤에 언어학적 소양이 전혀 없었던 두 사람의 미국인 즉 매큔과 라이샤워가 급조해내 영어권의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널리 보급된 한국어의 음성 표기 즉 엠아르 시스템과는 한 자리에서 거론하기가 민망할 만큼 그 그 수준과 안목이 천양지차인 것이다.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안은 일천팔백삼십이년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가 제안한 어설픈 음소 표기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에 의해서 수십 가지의 안이 제기돼왔지만 그 가운데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철저한 음성표기인 엠아르 시스템과 기형적 음소 표기인 대한민국 교육부 안 두 가지다. (말이 나온 김에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가 한국어 문법 기술에 남긴 선구적 업적은 기록해두는 것이 좋겠다. 독일계 네덜란드인인 지볼트는 일천팔백이십삼년부터 일천팔백삼십년 사이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나가사키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일본 문화를 연구한 의사다. 그는 네덜란드로 귀국한 뒤인 일천팔백삼십이년 『일본을 기술하기 위한 문헌』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제칠장에서 조선의 언어와 문자를 개관하고 있다. 그는 나가사키에 억류돼 있던 조선인 조난자들로부터 조선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 기술의 수준을 떠나서 지볼트의 그 책은 조선어에 대한 서양인의 학술적 관찰을 포함하고 있는 최초의 책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한국어의 음운 조직 원리를 고려하면 국어의 표기는 당연히 형태음소적 표기가 돼야 한다. 조선어 소리의 자율적 단위는 대부분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음성도 아니고, 대부분의 언어와 달리 음소도 아닌, 형태음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엠아르 시스템의 음성 표기는 단순한 음성 전사일 뿐, 하나의 문자체계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일천구백삼십삼년에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을 만들었던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았던 것이고, 바로 그 전에 자기 나름의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안을 만들었던 기 파랑도 그걸 알았던 것이다. 엠아르 시스템의 음성주의는 철저한 읽기 중심, 즉 외국인외국어 중심이고, 대한민국 교육부 안의 기형적 음소주의는 읽기와 쓰기의 어정쩡한 타협안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자체계라면 당연히 쓰기 중심이 돼야 하고, 한국인한국어를 중심에 놓고 고안돼야 한다.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이 그렇고 바로 기 파랑의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이 그렇다. 그로부터 이십사 년 뒤인 일천구백오십사년에 예일대학의 새뮤얼 마틴 교수가 『한국어 형태음소론』을 저술하며 제시하고, 그로부터 다시 십삼 년 뒤인 일천구백륙십칠년 마틴과 이양하 교수가 공저한 『한영사전』에 적용됨으로써 영어권 학자들 사이에 보급되기 시작한 예일 시스템은 그런 당연한 원칙에 따라 형태음소주의를 취하고 있다. 한국어의 전문가들이 점차로 예일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는 데서 이 시스템의 정당성이 입증되고 있기는 하지만, 기실 예일식이란 기 파랑식에 사소한 수정을 한두 가지 보탠 데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모음 ?와 ?의 처리에서 차이를 보이는 외에, 기 파랑이 한국어의 ? 음소를 r로 대표시켰던 것에 견주어 예일 식은 그것을 ℓ로 대표시킨 정도이다. 그러니 그것을 굳이 예일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 기 파랑식이라는 이름을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음소를 예일식으로 ℓ로 대표시키는 것이 옳은 방향의 수정도 아니다. 어차피 그것이 형태음소적 표기를 하고 있다면 ?음소의 대표값은 ?, ?, ? 음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폐음절에서가 아니라 개음절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 음소는 r로 표기해야 한다. 이십사 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기 파랑의 표기법을 세부적으로 개악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평가도 나올 만하다. 사실, 일천구백삼십삼년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그 실용성에서만이 아니라 이론적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것이다. 그런 이론적 획기성이란 다름 아니라 위에서 지적했듯 모든 형태소가 그것의 기본형으로 선정된 단일 형태에 의해 표기되는 형태음소론적 표기라는 점에 있다. 한국어의 음운 조직 원리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그 형태음소 표기는 그로부터 삼십 년 이후에야 미국에서 출현할 생성음운론의 기저형 표기와 이론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특히 일천구백삼십년대에 서유럽의 언어학 이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놀랍게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이 기 파랑에게 영향을 끼쳤든 반대로 기 파랑이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에게 영향을 끼쳤든, 바로 그 시기에 연구회 주변에 있던 한 유럽인 학자에게도 동일한 아이디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 파랑은 그 뒤로 삼십 년 뒤에야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지만, 일천구백이십년대 마지막 해의 서울 체류는 이 밖에도 그의 전공 저서 목록에 한 권의 중요한 책을 보탰다. 그 책은 그가 스트라스부르 대학 비교언어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일천구백오십년에야 나오게 되는 『한국어의 기원』이다. 이 책은 그보다 십일 년 전에 핀란드의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트가 헬싱키에서 출간한 『한국어 문법』과 함께 서양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가장 수준 높은 한국어 관련 저술이다. 더욱이 람스테트의 책이 일찍이 국내 학자들에 의해 극복 지양된 데 견주어 기 파랑의 책은 지금도 한국어학계의 극복을 기다리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다. 기 파랑은 이 책에서 람스테트와는 달리 한국어의 알타이어 설에 회의의 눈길을 보내며, 만약에 알타이어족이라는 것이 존재하더라도 한국어는 일본어와 함께 알타이어족의 외부에 자리잡고 있고, 한국어와 일본어와의 관계도 그 친족성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 파랑에 따르면 현대 한국어는 적어도 네 개 이상의 기층언어 위에 얹혀 있는 복잡한 구성물이고, 그 기층언어의 하나 또는 둘이 알타이어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어를 알타이어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유컨대 스페인어가 아랍어와 서고트어를 중요한 기층어로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를 햄셈어나 게르만어로 분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뒤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어도, 『한국어의 기원』을 능가할 만한 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한국어사 연구자들의 부끄러움이기도 하지만, 기 파랑 학문의 실증적 치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천구백삼십년 이월 기 파랑 가족은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기 파랑이 북경으로 간 반면 클레르와 장프랑수아는 파리로 돌아갔다. 아내와 아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기 파랑에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가족과 함께 있기에 중국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초 기 파랑은 중국에 한 해 정도 머물 생각이었다. 이것저것 자료를 뒤지고 방언을 녹취한다고 하더라도 한 해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또는 운명은, 기 파랑을 그리 쉽게 중국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지 언어학자의 관심으로 도착한 중국에서 그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보았다. 그해 여름에 중국 전국에 걸쳐 서른 개가 넘는 소비에트가 수립되고 그에 맞춰 국민당군의 공세가 강화돼 내전이 날로 격화하는 것을 본 기 파랑은 그 포연과 살륙의 현장을 피하기보다는 거기 입회하기 위해 자신의 중국 체류를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유조구 사건이 터지고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일본이 본격적인 대륙 침략의 시동을 건 것이다. 중국 전역의 큰 대학들에서 항일 구국회가 결성되고 대학생들은 국민당에 대해 내전의 종식과 항일을 위한 대동단결을 촉구했지만, 장개석은 일본과의 싸움을 주저하고 국제연맹의 개입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일본보다 공산주의자들이 더 큰 적이었기 때문이다. 항일투쟁을 촉구하는 대학생들에게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가 내놓은 답변은 이랬다 :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고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는 정부가 져야 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워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 또한 정부가 져야 한다. 이 큰 어려움을 당해 국민이 정부를 신임하지 않고 비난만 일삼는다면 건강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장개석의 이 후안무치에 대한 기 파랑의 논평을 읽기 위해 다시 한 번 『봄 샐러드』를 펼치자 : “이것은 왕실 사이의 결혼동맹이나 국가간의 왕위계승 전쟁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한 정치 영역 내 주민집단의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다. 국민적 정체성이 세계 어디에서보다도 더 명확하고 그 국민의 대다수가 일본에 대한 극히 정당한 항전을 주장하고 있는 이십세기 중국의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천명한 입장이다. 정치라는 것은 이다지도 비합리적이다. 아니, 이렇게 무섭도록 합리적이다. 장개석이 취한 이 입장은 내가 중국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어느 자리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할지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만주와 몽고를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해 괴뢰정부를 세운다는 일본의 계획이 구체화되고 국제연맹의 무기력 속에 일본의 상해 공격이 시작됐을 때야 장개석은 일본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청조 마지막 황제 부의를 앞세운 일본의 만주괴뢰정부 수립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일천구백삼십이년 이월 십팔일에는 일본 관동군의 조종을 받은 만주지역의 옛 군벌들과 재력가들이 만주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 사이에도 내전은 쉴 새 없이 계속되었다. 일천구백삼십년대 초에 중국 중남부의 여러 성에 들어선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모택동은 이듬해 십일월 강서성의 서금을 수도로 삼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장개석은 만주의 독립이라는 굴욕적 조건으로 만주사변을 마무리지은 뒤 항일전의 총부리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려 대대적인 토공전(討共戰)을 전개했다. 전세는 나날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 불리는 기 파랑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난 뒤 대장정이라는 멋진 이름의 길고 참혹한 퇴각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제일차 세계대전과 제이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우연히 기 파랑은 징집 연령을 피해 있었던 터여서, 그가 프랑스 군복을 입고 싸운 적은 한번도 없다. 그 뒤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수행한 제국주의 전쟁 때는 나이도 나이이거니와 그가 격렬한 평화주의자, 제삼세계주의자적 면모를 보일 때라서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그러면 그가 삼색기나 프랑스 군복과 상관없이 전투원으로서 싸운 적은 있는가? 어쩌면 한 번이고, 어쩌면 두 번이다. 기 파랑이 중국에서 실제로 총을 들고 싸웠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기 파랑이 중국에서 전투행위에 참가했다면 그는 일생을 통해 두 번의 전장을 겪은 셈이다. 뒷날의 스페인 내전과 함께 말이다. 중국에서의 체험을 기초로 바로 그 현장에서 집필해 귀국 직후 발표한 소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에 숱한 전투 장면, 테러 장면이 출몰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소설일 뿐이다. 어쩌면 그는 그 소설이 묘사한 어떤 장면에서 실제로 총이나 폭탄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십년대 말에서 삼십년대 초까지의 그의 동아시아 체류를 기록하고 있는 에세이 『봄 샐러드』는 저자가 서금의 중화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 편에서 코민테른 사람들이나 외국 기자들, 적십자 단원들의 통역을 포함한 행정업무를 보았다는 것만 언급을 하고 있을 뿐, 자신이 직접 참가한 전투나 봉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 파랑이 일천구백삼십일년 십이월부터 일천구백삼십이년 말까지 일 년 남짓 서금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가 겸손해서 자신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무용담을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의 겸손에 대한 억측으로 중국에서의 그의 활약을 창조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가 중국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국제여단의 단원으로서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것이 그가 일생에 전투원으로 참가한 유일한 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전투원으로서 총이나 폭탄을 들고 싸워야만 싸우는 것은 아니다. 『봄 샐러드』의 기록만 가지고도 그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중국 민중의 편에 서서 헌신적으로 싸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소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의 행간에서는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끈끈히 묻어난다. 이를테면 저자 자신을 어느 정도 투영하고 있을 화자의 이런 한탄을 보자 : “도대체 세월이 미쳐버린 게 아닐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하지만, 중국에서 죽음은 그렇지 않다. 빈자의 죽음과 부자의 죽음은 그 죽음의 방식이나 장례 절차에서만이 아니라 우선 죽는 곳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빈자들의 죽음의 장소는 적토다.” 그러나 더욱더 미쳐버린 세월이 유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화자는 알고 있었을까? 아무튼 일천구백삼십이년 말까지의 중국 체류 동안 그는 참여적 관찰자로서 이십세기 역사의 가장 격동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중원을 놓고 영웅호걸들이 출몰했고, 일본군은 상해에 입성했고, 만주국이라는 것이 세워졌다. 그 사이에 전 세계 지식인의 희망, 어둠의 삼십년대를 가르는 단 한 줄기의 빛, 그 위대한 소련에서는 참혹하기 짝이 없는 정치재판이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일천구백삼십삼년 기 파랑은 파리로 돌아와 가족과 합류했다. 유럽의 정치 기상도에는 먹구름이 그득했다. 사실 바로 그해는 유럽의 역사에서 어두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해였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이월 일일이었는데 바로 그 전날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은 원인 모를 화재를 만났고 이를 빌미로 독일 공산당은 가혹한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바로 그날 조국을 떠났다. 다시 그로부터 한 달 뒤, 다하우 근처에 첫 강제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이어 오월 십일에는 ‘비독일적인’ 책들이 금서목록에 오르며 공개적으로 소각됐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형제, 아르놀트 츠바이크와 슈테판 츠바이크 형제, 막스 브로트, 에곤 에르빈 키슈, 아르투르 슈니츨러의 책들이 독일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소각됐고, 노벨상 수상자 구스타프 헤르츠와 제임스 프랑크를 비롯해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파울 틸리히, 알프레트 칸토로비츠 같은 큰 학자들이 대학에서 쫓겨났다. 모든 것이 ‘정상화’라는 이름의 비정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해 노동절 다음날인 오월 이일 히틀러는 전국의 모든 노동조합의 자유활동을 금하고 이들을 어용적인 독일노동전선으로 통폐합했다. 이어서 나찌당 이외에는 정당활동이 금지되고 그해 시월 독일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고, 이와 함께 양심적 지식인들의 망명이 잇따랐다. 유럽 정치의 균열이 본격화되던 그해에 기 파랑은 소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와 에세이 『봄 샐러드』를 동시에 출간한 뒤, 고등실천연구학교에서 동아시아 언어들을 가르치며 소르본에 등록해 국가박사 학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소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그해 십일월 공쿠르상을 수상해 그에게 이름과 돈을 주었다. 그해부터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는 일천구백삼십륙년까지는 기 파랑이 오로지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던 기간이었다. 기 파랑의 중요한 언어학 관련 저서들이 출간되기 시작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제이차 세계대전이 끝난 일천구백사십사년 이후지만, 실상 그 저작들은 일천구백삼십구년 전쟁 발발 이전의 여섯 해, 더 정확히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전의 세 해 동안의 작업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논문 생산량은 한 해 평균 열 편을 넘어서고 있다. 일천구백삼십사년 오스트리아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찌당원들에 의해 피살되고 독일에서 히틀러가 대통령과 수상의 기능을 한 손에 쥔 퓌러가 됐을 때도, 그 이듬해에 독일에서 유태인을 겨냥한 인종차별법이 의회에 상정되고 이탈리아가 이디오피아 침공을 개시했을 때도, 다시 그 이듬해 오월 프랑스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해 파리 코뮌 이래 최초의 좌파 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기 파랑의 일상의 궤적은 파리 제십삼구의 아파트와 소르본과 고등연구실천학교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이 시기에 발표한 논문들의 목록을 대충 훑어보자 : "언어 기호의 동기화에 대하여" "조선어 음운론에 대한 몇 가지 관찰" "접촉과 간섭 :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 "기호는 자의적이 아니다" "비교문자론 : 한자, 한글, 카나" "중국어는 단음절어가 아니다"(이상 일천구백삼십삼년); "조선어, 알타이어?" "동사의 시제 :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루마니아어에서의 관용구 파생동사" "중세 프랑스어에서의 완곡어법" "스페인적 존재 : ser와 estar"(이상 일천구백삼십사년); "라틴어의 동사상 명사 재론" "바스크어의 능격에 대하여" "희랍어 아오리스트 재론" "현대 조선어의 경어 체계" "프랑스어 en과 이탈리아어 ne : 그 다름과 같음" "조선어하다와 일본어스루 : 그 다름과 같음" "라틴어 형식소상 동사 재론"(이상 일천구백삼십오년); "조선어하다의 의미론을 위하여" "현대 조선어의 격"(이상 일천구백삼십륙년). 그의 관심이 유럽어와 아시아어에 고르게 퍼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천구백삼십륙년 칠월 십팔일 프랑코가 이끄는 모로코 주둔군의 반란으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을 때, 자신이 투표로써 지지했던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가 자신이 심정적으로 지지했던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고 스페인 내전에 대한 불간섭을 선언했을 때, 스페인 전역이 피로 물들여지는 가운데 베를린에서는 올림픽이 치러지고 있었을 때, 기 파랑은 더이상 강의실과 연구실과 가정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처남이 베를린 올림픽의 사이클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냈다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했다. 모택동의 대장정이 완료된 지 한 해가 지난 바로 그해 가을, 중국에서 끓었던 그의 피는 다시 끓었고, 그는 스페인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현지 언어 조사가 아니라 총을 들고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일천구백삼십륙년부터 일천구백삼십구년까지의 스페인 내전은 프랑스 지식인들을 분열시키며 새로운 지식인상을 창조했다. 프랑스 우파의 대부분은 군부의 쿠데타를 지지했지만, 폴 클로델과 조르주 베르나노스 같은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는 파시즘과 스페인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나섰다. 당초에 프랑코군의 반란에 호의적이었던 프랑수아 모리악도 결국은 공화파 정부 지지로 돌아섰다. 좌파의 분열은 더 심각했다. 그들이 공화파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이 내전 상황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들이 달랐다. 평화를 우선시하는 측과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는 측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는 측에서도 예컨대 트로츠키스트는 스페인 공산당 내지 공화파 정부가 스탈린에 경도하고 있다고 생각해 지원을 망설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스페인 내전을 통해서 프랑스 지식인은 자신의 대의를 토론장과 펜을 통해서만 추구하던 전통적 이미지를 버리고 직접 총을 드는 행동의 지식인으로 변했다. 참여의 의미가 변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열매가 국제여단이었다. 기 파랑은 일천구백삼십륙년 십일월 구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국제여단의 선발대 육백여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의 싸움이 후방에서의 싸움이었다면, 스페인에서의 싸움은 전방에서의 싸움이었다. 그는 열심히 싸웠고 스페인에 도착한 지 오 개월쯤 되었을 때 바스크 자치정부의 수도인 게르니카 이 루노에 있었다. 사월 이십륙일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고, 기 파랑은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는 그 폭격 때 왼쪽 어깨를 바스러뜨렸고, 후송된 병원에서 삼 개월 동안 병상을 지켜야 했다. 그러고는 불편한 몸과 패잔병 의식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왔다. 스페인 내전은 기 파랑의 정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비록 그가 내전 전에 특별한 이념을 신봉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은 내전 후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과 어깨를 겯고 싸운 바로 그 내전을 통해서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루이르그랑을 다닐 때부터 이미 공화주의자를 자처하기는 했지만, 가톨릭은 한편으로 어린 시절 이래 그의 신앙이었다. 그가 열심히 교회를 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가톨릭의 보편주의라는 것에 막연한 희망을 걸고 있었고, 성경은 그가 가장 애독하는 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스페인에서의 경험이, 포화와 시쳇더미 사이에서 보낸 얼마간의 삶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가 보기에 프랑코군에 대한 스페인 가톨릭 교회나 프랑스 가톨릭 교회 일반의 지지는 가톨릭 교회의 일부 잘못된 분파의 탈선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반동성의 현현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생각은 뒷날 나찌즘에 대한 바티칸의 침묵에 의해서 더욱더 강화되었다. 둘째는, 볼셰비즘에 대한 그의 불신이 이 내전을 통해서 싹텄다. 기록되는 역사는 늘상 너무나 커다란 그물코를 지니고 있어서 인간의 삶의 구체적이고 미세한 부분을 잡아내지 못한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공식 역사도 마찬가지다. 파시스트가 자행한 살륙에 대해선 더 말을 보탤 것이 없지만, 좌파도 지선(至善)은 아니었다. 그들도 우익을 박해했고, 그보다 더욱더 심각하게는 좌파끼리 서로를 적대시했다. 스탈린주의자는 트로츠키스트를 적대시했고, 트로츠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를 적대시했다. 사정은 국제여단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여단이라는 것이 내전 시기 세계 양심의 상징이었다는 것 때문에 좌파 공화주의자들의 입장에서 국제여단의 활동을 비판하는 것은 금기처럼 돼 있지만, 실상은 국제여단 안에서도 끊임없는 갈등과 길항이 있었다. 코민테른은 국제여단 안에 요원을 잠입시켜 트로츠키스트들을 조직적으로 거세했고, 그래서 등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희생된 자유의 전사들도 있었다. 기 파랑은 이 모든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때의 심경이 뒷날의 에세이집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에 드러나 있다 :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이 때로는 옳지 않은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스페인에서 알았다. 그것이 권력이든 도덕률이든 신앙이든 이념이든 국가든, 커다란 것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왜소화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에서의 그 쓰디쓴 경험이 기 파랑을 정치적 허무주의로 내몬 것은 아니었다. 기실 거기에 기 파랑의 위대함이 있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순결의 철학이 아니라, 가장 나쁜 것에서도 좋은 것을 발견해내고, 가장 좋은 것에서도 나쁜 것을 발견해내는 그 중용과 균형의 철학 말이다. 그것을 절충주의라고 부르든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부르든 딜레탕티슴이라고 부르든, 바로 그런 균형과 중용의 세계관이야말로 기 파랑의 삶을 일관했던 미덕이었고, 우리가 상속받아 다음 세기로 이월시킬 값어치가 있는 철학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직후에도 기 파랑에게 허무주의적 제스처가 없었다는 데 대해서는 제사공화국 시절에 총리를 지내기도 한 좌파 정치인 피에르 맹데스프랑스의 증언이 있다. 기 파랑보다 여섯 살 아래로 삼십삼년 기 파랑의 귀국 얼마 뒤 그와 알게 돼 일생 동안 우정을 유지한 맹데스프랑스는 그의 일천구백륙십팔년 저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에서 그때부터 삼십 년 이전에 있었던 기 파랑과의 어떤 대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기 파랑은 카페 라 로통드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힘이 없어 보였다. 마흔이 안 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의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몸보다 더 아픈 것은 그의 마음인 것 같았다. 그는 내게 가톨릭 교회와 볼셰비즘에 대한 환멸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의 내전 불간섭 정책을 되풀이 힐난했다. 그는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가 도대체 어떤 원칙과 신념에 기대어 정책을 수립하는지를 내게 계속 다그쳤다. 나 역시 프랑스나 영국이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풋내기 국회의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러니 기 파랑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나는 내 무력감을 느꼈지만, 그 무력감에는 그가 느끼고 있다고 내가 생각했던 무력감까지 포개져 나는 한없이 우울했다. 얼핏, 스페인에 갔던 걸 그가 후회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쓸쓸하게 물었다 : ‘기, 스페인이 당신을 정치적 허무주의자로 만들었군요?’ 그는 웃으며, 그러나 단호히 내게 대답했다 : ‘절대 그렇지 않아, 피에르. 나는 알고 있네. 모든 정치가 더러운 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모든 행동이 헛된 건 아니라는 걸.’” 몸을 추스르며 국가박사 학위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던 기 파랑에게 들리는 소문은 우울한 것뿐이었다. 일본의 중국 침공 개시, 뮌헨의 퇴폐 미술 전시회,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 모든 것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국제여단이 스페인을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온 일천구백삼십팔년 유월 이십팔일 기 파랑은 국가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소르본에 제출했고, 개학이 돼 논문발표회를 가지면서 뮌헨회담의 결과로 히틀러가 주데텐을 병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학위 획득은 기쁜 일이었다. 그의 학위논문은 "로만어 역사음운론"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통속 라틴어에서 현대의 여러 로만어에 이르기까지의 음운체계의 변천 과정을 추적했다. 그때까지의 로만어 역사비교 언어학이 갈로로만어, 이베로로만어, 이탈로로만어들에만 주의를 집중시키느라 발카노로만어들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에 견주어, 기 파랑의 학위논문은 루마니아와 그 인근에서 사용되는 여러 로만어들의 역사적 변천을 추적하는 데 세심한 공을 들였다는 미덕이 있다. 흔히 루마니아어로 불리는 네 개 언어, 즉 다코루마니아어, 이스트로루마니아어, 마세도루마니아어, 메글레노루마니아어의 음운사를 개별적으로 추적하고, 다시 다코루마니아어의 세 개 방언인 몰다비아어, 발라카어, 트란실바니아어의 음운사를 독립적으로 기술한 뒤 이를 비교해보는 작업은 기 파랑 이전에는 없었다. 달마티아어의 모음체계가 발카노로만어들과 이탈로로만어들 사이에서 어떻게 동요했는지를 따져본 것도 기 파랑이 처음이었다.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이 로만어 강좌 교수로 그를 초대했을 때 그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전운이 감도는 유럽을 뒤로 하고 가족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간 그의 행위에 대한 평가는 여럿일 수 있겠지만, 아무튼 시의적절했던 컬럼비아측의 초청으로 그는 전장에서 떨어져 강의와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가 뉴욕에 도착한 이튿날인 일천구백삼십구년 팔월 이십일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어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을 경악하게 했고, 그로부터 열흘 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이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조국이 독일에 점령되어 있는 동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기의 그는 띄엄띄엄 발표하는 로만어 관련 논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필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뉴욕에 있던 시절,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와 『봄 샐러드』를 포함해서, 그의 문학작품 전부가 프랑스 점령 독일군 사령부의 금서 목록, 이른바 오토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두기로 하자. 일천구백사십사년 프랑스가 해방되자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이 비교언어학 교수로 그를 초빙했다. 거기서 그는 로만어 비교언어학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언어들의 대조 언어학도 강의했다. 일천구백륙십년 소르본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르며 정력적으로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그 집필의 영역은 그 자신의 전공 분야인 로만어 언어학과 동아시아어 비교대조 언어학만이 아니라 소설, 시, 에세이 등 다양하다. 그는 또 이 시기에 베트남을 재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의 정책을 비난하고 알제리의 독립과 쿠바의 혁명을 옹호하는 일단의 지식인 대열에 합류한다. 그가 자기보다 네 살 아래인 사르트르에 견주어 프랑스에서나 외국에서나 더 유명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집필활동이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거의 사르트르와 비슷한 빈도로 서명과 시위에 참여하며 세상사에 간섭했다. 이 시기의 기 파랑의 삶을 기술하며 한국과 관련해 두 가지 사실을 누락시킬 수 없다. 첫째는 그의 외아들인 장프랑수아가 군의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사월혁명 이후의 한국에 한 달 가까이 체류했다는 것이다. 일천구백오십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기 파랑이 명확히 한쪽 편을 들지 않는 반전평화주의의 입장에 서면서도 상대적으로 북과 소련보다는 남과 미국에 더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정치적 입장을 알고 있었을 장프랑수아가 왜 굳이 한국에 가기를 지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걸 왜 기 파랑이 허락했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장프랑수아는 당시 막 결혼한 상태였다. 아마도 장프랑수아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자기가 태어난 도시, 서울이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태어난 곳이 전장으로 변해 있을 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료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풋내기 군의관으로서의 사명이자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 파랑 역시 아들이 어차피 의료진으로 가는 것이니 전쟁의 성격을 떠나 그것 자체가 훌륭한 대의가 될 수 있고, 상대적으로 덜 위험할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장프랑수아는 중국군의 반격이 최고조에 이르던 일천구백오십일년 이월 오산 근처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기 석 달 전에 그의 유일한 딸 아를레트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잃고 기 파랑이 느낀 슬픔은 그 사건을 소재로 삼은 듯한 단편소설 "쇠약"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 “프랜시스 베이커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죽었다. 인도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죽은 영국인들은 숱하게 있었다. 베이커가의 친인척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적이 없다. 서울의 영국인이라는 표현은 뭔가 어색하다. 그 어색한 일이 그러나 이제는 조금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누대를 런던에서 살아온 그의 선조들과는 달리 프랜시스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태어나 자기가 태어난 도시에서 죽은 것이다. 에드워드 베이커는 아들을 서울에 빼앗긴 것이다. 에드워드는 젊은 시절 자신이 머물렀던 그 도시에 대한 애증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기 파랑은 사월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일천구백륙십년 칠월부터 팔월까지 서울을 방문했다. 이번에도 클레르와 함께였다. 자식이 태어나고 죽은 땅을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땅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풀려났으니 더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삼십 년 전에 알았던 친구들은 대개 북으로 올라갔거나 사망했지만, 그래도 그는 몇몇 국어학자들과 해후해 경주와 부여를 둘러보았다. 바로 그해에 소르본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칠십년 은퇴할 때까지 몇 권의 소설과 언어학 관련 서적을 더 남겼다. 은퇴한 해에 그가 아내 클레르를 잃었고, 그 이후 독신으로 지내왔다는 것을 기록해두기로 하자. 또 은퇴하기 두 해 전인 일천구백륙십팔년 오월의 학생시위 때, 그가 소르본에서 학생들의 대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극소수의 교수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도 기록해두기로 하자. 관리사회, 경찰국가에 대한 혐오만큼이나 무정부주의에 대한 거리낌을 숨기지 않았던 그가 육십팔년 오월에 아무런 유보도 없이 학생들 편에 섰다는 것은 좀 의아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그런 일시적 무정부 상황이 없이는 드골주의의 갑각에 균열을 낼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일천구백칠십년 이후의 그의 집필활동은 뜸했다. 아주 띄엄띄엄 언어학 논문을 몇 편 발표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그의 활동이 운동량을 잃었다고 해서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활동도 수그러든 것은 아니다. 그는 칠십년대 이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자문위원으로서 한국의 김지하와 김대중을 포함한 전 세계 수많은 정치범들의 석방 탄원서에 서명했고, 베트남의 보우트 피플과 팔레스타인 사태와 최근의 유고 내전과 인종주의에 관련한 집회를 포함해서 무수한 집회와 시위에 직접 참가하거나 지지성명을 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녕 대단한 것이었다. 우파 정부든 좌파 정부든 역대 프랑스 정부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어떤 국가훈장도 못 받았고, 그 이유로는 아니더라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도 못 되었지만, 죽기 바로 전까지도 프랑스 지식인들의 좌장이었다. 육체의 나이로는 당연히 그랬고, 아마 정신의 나이로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가 어떤 국가훈장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곰곰 따져보면 사실이 아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국가훈장을 하나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 정부로부터가 아니라 스페인 정부로부터였다. 그 훈장을 받기 위해 그는 최후로 나라 밖 여행을 했고, 최후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가 최후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일천구백구십륙년 십일월 구일 국제여단의 스페인 내전 참전 육십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였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보자. 스페인 내전에서 반란군측의 승리가 굳어지던 일천구백삼십팔년 시월 어느 날, 당시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 후안 네그린은 외국에서 온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전쟁이 끝나면 국제여단 생존자 모두에게 스페인 국적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내전이 프랑코측의 승리로 끝났으므로 당연히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던 일천구백구십오년 스페인 의회는 만장일치로 오십팔 년 전의 이 약속을 지키기로 결의했고, 그 결의에 따라 스페인 정부는 그 이듬해 십일월의 행사에 국제여단 생존자 전원을 초청해서 국적을 부여하기로 했다. 기 파랑은 스페인 정부의 초청을 받아 마드리드로 간 사백여 국제여단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 스페인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가 이 자유의 투사들에게 올린 감사에 말에 대한 답사를 옛 전우들을 대표해서 했다. 그때 그가 한 말은, 비록 의례적인 말일지라도, 겸손과 연대로 무르익은 어떤 정신의 경지로서 기록해둘 만하다 : “고마워할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입니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들은 파시즘과 싸울 기회를 얻었고, 참다운 국제주의를 배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들 가운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옛 전우들과 스페인 사람들을 눈물범벅으로 만든 기 파랑의 그 답사는 그가 오십팔 년 전에 피에르 맹데스프랑스에게 한 말을 다시 연상시킨다 : “모든 정치가 더러운 것은 아니다. 모든 행동이 헛된 것은 아니다.” 기 파랑은 페르 라셰즈묘지에 묻혔다. 언젠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논문들이 수합돼 그의 전집이 출간되겠지만, 그가 생전에 출간한 책들을 보이자면 언어학 분야 저작으로 『로만어학의 문제들』(1) (2) 『언어학 에세이』 『중세 프랑스어』 『로만어의 격』 『로만어 역사음운론』 『한국어의 기원』 『동아시아의 언어들』, 장편소설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중앙시장』 『비아리츠의 사람들』 『두 갈래 길』 『제일현』, 단편소설집으로 『쇠약』, 시집으로 『찬가』 『겨울의 노래』, 일반 에세이집으로 『봄 샐러드』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있다.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