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18일 목요일 오후 12시 50분 31초 제 목(Title): 고종석/ 명교에게 이번호 차례 | 과월호/DB 검색 | 홈페이지 ------------------------------------------------------------------------------- - 계간 문학동네 1994년 겨울/제1호/통권1호/산문 명교에게 고 종 석 겨울의 한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그날 밤의 낙원동을 잊지 않고 있다. 무슨 발작처럼 주기를 타고 이곳 생활이 마뜩치 않아질 때,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자주 그날 밤의 기억에 의 지해서다. 네겐 단지 먼길 떠나는 친구에 대한 ‘자동화된’ 의례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내겐 그날의 술자리가, 그 술자리의 기억이, 누추한 삶이나마 그것을 굴러가게 하는 연료가 되고 있다. 시간의 바퀴에 실린 내 感情點의 사이클로이드가 삶의 지표에까지 추락했을 때, 그것을 새로운 2πr의 탄도로 밀어붙이는 그 낙원의 기억…… 우리가 전혀 몰랐던 그 화가의 방 기억나니? 낙원 상가의 미로 어느 구석에 숨어 있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가 밤새 울려퍼지던 그 방 말이 다. 삶의 꼴이 야릇하고 기괴하다고 그 포르투갈 여자가 울부짖던 그 밤에, 내 감상주의는 이윽고 밝아올 날에 대해 잠시나마 얼마나 저항적이었던지…… 어떤 형태의 생산과도 인연이 없는 삶을 연명하고 있다. 내 無恒産은 선언이 아니라 고백이고 기 술이다. 거기엔 위악의 제스처가 없다. 내가 부끄럼타는 것은 그 無恒産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無恒産이 無恒心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다. 문지의 김선생님은 내가 떠나기 전 어떤 게으른 삶에 대한 내 선택을 황송스럽게도 격려해주셨고, 나 역시 미상불 그런 게으른 삶에 대한 바람에 실려 이곳까지 날아왔지만, 한심도 하지, 내 마음의 약삭빠름이 내 몸의 게으름에 좀체로 동조해주질 않으니 말이다. 내 노력으로 겨우겨우 이뤄낸 몸의 게으름이, 내 노력으로 어쩔 수 없 는 마음의 조바심으로 망가질 때, 나는 하릴없이 내 됨됨이를, 내 크기를 깨닫는다. 그래, 그릇은 오직 한 번 빚어진다. 일단 빚어진 그릇을 본때 있게 다시 손질할 도리는 없다. 무리하게 손질하 려고 했다간, 그릇 자체가 깨지고 말 거다. 그러나 이런 교활한 합리화가 내 부끄럼을 탕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게 내 옅은 슬픔이다. 서울이 끔찍하게 더웠다던 지난 여름에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와 스위스엘 다녀왔었다. 직장이 없다는 것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여름휴가의 순번을 놓고 동료와 협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하긴, 나의 이런 格物致知가 너처럼 팔자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에겐 애초부터 生而知之이기도 하군!) 그다지 유쾌한 여행은 아니었다. 로마에선 작은애가 배탈을 심하 게 앓아 마음이 스산했고, 취리히에선 팔을 벌에 쏘여 몸이 따끔따끔했다. 파리로 돌아왔을 땐 벌 써 가을 기운이 서늘했다. 그리고, 아주 낯선 언어에서 벗어나 조금은 덜 낯선 언어로 잠입했다는 것이 안도감을 주었다. 묘하지, 내가 악으로 아무리 오래도록, 머리를 싸매고, 열과 성을 다해서, 불란서말을 공부한다고 해도(결코 그럴 리도 없겠지만), 내가 그 언어에 대해 느끼고 있는 난감한 이물감은 그다지 묽어지지 않을 텐데, 그런데, 국경을 넘어 여행을 했다가 불란서로 돌아오면, 웬 지 마음이 놓이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그 안도감은 묘한 안도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제넘은 안도감이로구나. 지난해 봄에 이틀 동안 기차에 실려 베오그라드에서 파리까지 기어온 적이 있었다. 기차가 독-불 국경을 막 넘어 스트라스부르 역에 도착했을 때, 파리까지는 네 시간 이상을 더 가야 했음에도, 불란서말로 된 간판들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었던지. 그래, 그러고보니 동유럽의 한 수도에서 서유 럽의 한 수도를 향해 그려졌던 그 여정은, 우연히도, 나의 경우엔, 지리적 소격의 점층이 언어적 소격의 점층에 상응했던 그런 여정이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멀어질수록 도시들에 대한 내 ‘문화 적’ ‘언어적’ 서먹서먹함도 조금씩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발음 자체도 얼른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키릴문자의 베오그라드가 내게 안락함을 주지 않았던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그 불편 한 정교회의 세계를 떠나 부다페스트 역에 도착하자, 비록 마자르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보다 더 익숙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낯선 언어를 담은 낯익은 로마문자가 약간의 안도감을 주었다. 그 뒤의 여정도 지리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순항이자 순행이었다. 여전히 낯설지만 그래 도 마자르어나 세르보-크로아트어보다는 분명히 덜 낯선 비인 역의 독일어가 안도감을 추가했으 며, 다시 한번 여전히 낯설지만 그래도 이전까지의 다른 언어들보다는 아마도 덜 낯선 스트라스 부르 역의 불어가 다시 한번 안도감을 보탰다. 국경을 넘어서 여행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고, 자연언어들 의 그 다채로움에 짜증이 나게 된다. 동유럽의 슬라브어 사용자들 대개 그렇듯, 스페인 사람과 포 르투갈 사람들도 서로 자기 모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지만(실제로 그렇다는 걸 내 눈과 귀 로 확인하기도 했었다), 역시 지난해에 기차로 세빌리야에서 리스본까지 여행했을 때, 아주 뛰엄 뛰엄은 들리던 어떤 언어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 또다른 언어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있다는 걸 내 몸으로 확인했었고, 낭패감을 느꼈었다. 그럴 땐, 한순간(그런데 요샌 그런 한순간들이 너무 잦다) 세계어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그 세계어가 영어든 에스페란토든 말이다. (물론 반드시 익숙한 언 어만이 안도감을 주는 것은 아니지. 때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 상황 속에서의 단절감이 실은 어떤 푸근한 안도감일 수도 있으니. 그 낯선 언어의 방벽에 의해 세계의 적의로부터 단절돼 있다는 안도감. 적의는 때때로 낯선 것에보다는 익숙한 것에 담겨 있 을 수가 있으니. 지난 초여름, 발터 벤야민과 관련된 전시회 하나를 퐁피두 센터에서 본 적이 있 는데, 독일어로 계속 나오는 안내방송 속에서 아주 이따금씩 어떤 의미가 간취될 때, 바로 그 순 간, 물론 한순간일 뿐이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던 낯선 것의 보호막이 깨져나가며, 익숙한 것의 적의가 날 위협하고 있는 것 같은, 어떤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엔, 낯선 언어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사람을 낯선 언어에 노출시키는 상황 자체가 대체로 그 사람에게 낯선 데에도 그 이유의 한 가닥이 있겠지만.) 이런 생각에 문화적 폭력의 씨앗이 심어져 있을 수 있다는 조건반사적 반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반성은, 그것이 조건반사적인 만큼, 사실 별로 반성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께 여름에 ‘책의 미래’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출협 주최로 춘천에서 열렸었다. 발제자 가운데 한 사람 이었던 복거일 선생은 그 자리에서, 그이 자신이 이미 그 전에 어떤 글을 통해서 명확히 밝힌 입 장대로, 영어가 일상언어로서의 세계어 구실을 할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긍정적으로 묘사했 다. 복선생이 그렸던 미래는, 영어를 제외한 대다수의 언어가 학술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대학이나 연구소에 유폐되거나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의 의사소통수단으로만 기능하게 되는 그런 시대였다. 요컨대 대부분의 언어가 이미 죽어버린 언어가 되는 그런 시대. 시인·작가들 여럿이 토론자로 참가하고 있던 그 자리에서 모국어의 운명에 대해 불길한 점괘를 내보인다는 것은, 더구나 그 점괘에 대해서 의연한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자 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예견됐던 대로 복선생의 진단과 처방은 그 자리에 있던 시인·작가들의 십자포화를 받았다. 그러나 복선생의 입장을 비판했던 이들이 모국어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이 질 긴 끈으로 연결돼 있는 시인·작가들만은 아니었다. 이론적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도 그이의 입장을 격하게 비판했으니까. 그 심포지엄의 소박한 방청객이었던 나는, 내심 복선생의 입장을 그럴듯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한순간 그이의 입장을 엄호하는 발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마음만 먹었다면 누가 내 자격을 문제 삼아 내 발언을 제지할 것도 아니었지만, 침묵함으로써 다 수의 편에 섰다. 결국 그 자리에서 복선생의 입장은 ‘과학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오 류라는 다수의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과학사와 정치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다수에 의해서 지지받 는 견해가 반드시 과학적으로(그리고 심지어 도덕적·정치적으로도) 옳은 견해인 것은 아니지. 그 리고 그 자리에서 그려졌던 현란한 말들의 풍경 속에서 어쩌면 복선생의 발언만이 반성을 거친 발언이고, 지적으로 독립된 정신을 드러내는 발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발언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 미만한 어떤 집단주의 정서-그것이 민족주의적인 것이든 아니면 ‘생명사상’에 끈을 대 고 있는 것이든-가 강요하고 있는 모종의 조건반사에 대해 완강히 저항적이었다는 점에서, 반성 적이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복선생의 견해에 대해서 쏟아져나온 비판들은, 비록 그것이 논리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분히 정서적이었다. 민족주의라는 근원정서에 이끌리고 있었다 는 말이다. 그런데 나 같은 근본 없는 자가 보기엔, 모든 물신이 그러듯, 민족이라는 물신도, 인간 을 미욱하고 몰상식하게 만들 뿐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누려왔던 어떤 독점적 지위가, 그러니까 국제정치의 가장 확고한 단위로서의 그 지위가, 하룻밤 사이에 폐기되지야 않겠 지. 그러니만큼 민족어의 기능이라는 것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겠지. 그러나 민족이든 민족어든 그것들도 하나의 역사적 산물일 뿐 어떤 불멸의 이데아가 아 니라면, 그리고 그것들의 기능이 자주 역기능으로 전화되는 시기를 우리가 맞고 있다면(물론 그 점에 대해선 좀더 섬세한 관찰이 필요하겠지만), 복선생의 견해는 그것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진 지하게 검토해볼 만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에, 자발적 동의에 의해서든 탐탁지 않은 강요에 의해서든 하나의 유효한 세계어라는 것이 채택되거나 탄생한다면, 외국어 교사나 외국문학도의 지위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되겠지. 세계어의 탄생이 그것들을 궁극적 소멸의 길로 내몰 민족어들을 통해서 작업을 해왔던 문필가들의 운명은 더욱더 그럴 테고. 아마도 그들은,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한 언어가 담아온 문화와 세계관의 고유한 특질 운운하며,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세계어운동의 ‘획일주의 ’, 그 문화적 ‘밴덜리즘’을 격렬히 비난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결코 실용주의자라고 자처 하지는 않지만 실용이라는 가치를 허투루 볼 만큼 대담하지도 못한 나로서는, 한 언어에 담긴 세 계관의 고유한 특질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구실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때때로 분 쟁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 어느 선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문화의 다양성은 자 연언어의 다기함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걸까? 또 도대체 한 언어에 담긴 세계관의 고유한 특질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요컨대 우리는, 벤저민 리 워프가 자신있게 내뱉었듯, 우리의 모 국어가 지령하는 대로 자연세계를 분단하는 것일까? 너도 잘 알고 있듯, 언어가 인간의 사고방식, 나아가서 세계관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이런 언어 물신론자들은 예컨대 한국어나 불란서말에서는 ‘눈’이나 ‘neige’처럼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표현하는 ‘雪’이라는 시니피에를 에스키모들은 여남은 개의 시니피앙으로 표현한다는 걸 근거 로 내세워 에스키모는 한국인이나 불란서인이 보지 못하는 다른 종류의 눈을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자기 모국어가 구별하는 무지개 빛깔의 수만큼만 무지개 빛깔의 수를 육안으로 변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들에 도무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테지 만, 그것들은, 세계관의 언어종속성을 정당화하기엔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닐까? 물론 또다른 예도 찾을 수 있다. 바로 네 글에서도. 집요한 논리와 가벼운 상상력을 이음매 하나 없이 결합시켜내는 네 한국어에 나는 늘상 반해 있지만, 너의 그 정치하고 아름다운 한국어가 그 것에 대한 비판자들이 지적하듯 때때로 서유럽적 교양에 침윤돼 있다는 걸 너도 인정하겠지? 예 컨대 네가 “대부분의 징후가 그러하지만, 그것들은 비판적이다. 다시 말해 위기를 동반하고 있다 ”라고 말할 때, 유럽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것에 의지해 ‘비판’에서 ‘위기’로 건너가기 엔 ‘다시 말해’라는 다리는 사실 너무 허약해 보인다. 잠깐, 나는 지금 네 한국어가 때때로 유 럽어에, 그러니까 유럽어가 ‘담아온’ 문화와 상상력에 침윤돼 있다는 걸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언어와 세계관 사이에 일정한 연루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는 애기를 하고 있 는 거다. 그러나 그것은 사피어-워프 가설과는 전혀 무관한 애기다. 유럽의 어떤 언어들이 ‘비판 ’과 ‘위기’를 연루시켰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비판’과 ‘위기’가 연루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로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비판'과 ‘위기'가 연루됐기 때문에, 유럽인 들의 언어에서 ‘비판'과 ‘위기'가 연루됐을 테니까. 요컨대 언어가 인간의 기본적인 지각의 범 주와 인식작용을 일정하게 반영은 하겠지만, 그것들을 규정하는 원인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내 말은. (사실 내 말인 것도 아니지만.) 그 말은, 근본적인 지각의 범주와 인식작용은 언어의 구조와 는 독립적인 어떤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말이고, 언어와 정신이라는 것이 서로 규정하고 규정되 는 것이겠지만, 이 경우에 독립변수는 정신이고 언어는 다만 그 정신의 함수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여전히 너의 그런 ‘서유럽적' 말투에 대한 옹호자인 셈이고, 기왕이면, 그리고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기능적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세계어라는 것도 생각해볼 만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셈이다. 한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거라면, 그 세계어로도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질 테고. 그 말은, 중요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자연언어가 아니 라, 그 자연언어를 작동시키고 가멸게 하는 정신의 날쌤과 힘참이란 말이다. 물론, 무리해서라도 세상의 모든 자연언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내가 용감하지 는 않다. (왜냐하면 자연언어들 사이의 차이와 차별을 참아내지 못하는 그런 획일화의 논리는 통 일언어 이후에도, 그 언어 안에서의 차이와 차별을 참아내지 못하고,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의 법 제화를 시도해, 끝내는 앙상하리만큼 간결한 문법과 빈약하고 건조한 표준어휘만을 남겨놓을 테 니까.) 그러나 나는 또 단지 문화적 다양성의 이름만으로-더구나 그런 문화적 다양성이 자연언어 의 가짓수와 별 깊은 관련이 없다면 더욱더 " 최소한의 사회통합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주장할 만큼 용감하지도 못하다. (피부빛깔이나 신분적·계급적 귀속보다도 더 강력하게 사람들의 정체 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닐까? 물론 여기서 언어란 독일어니 일본어니 하 는 자연언어의 갈래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한 자연언어 내의 다양한 사회적 층위를 포함하는 넓 은 개념이고, 그러니만큼 그 언어라는 것이 신분적·계급적 귀속과 아주 긴밀히 조응할 테지만.) 사실, 획일화와 구별되는 보편주의의 욕망은 양식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얼마쯤은 내재해 있는 특성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인 힘이다. 너의 서유럽어식 문장도 그렇지만(네가 이해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여기서 ‘너'의 외연은 나와 그들, 우리 모두에 게까지 뻗어 있다. 사실, 개항 이후 한국어 문체의 변화란 서유럽어 문체로의 점진적 또는 급진적 접근이었다. 가장 토착어다운 문체를 구사한다고 주장되는 우리의 몇몇 뛰어난 작가들의 문장 역 시 서유럽어 문체와 문법의 틀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아니, 한국어 문법의 체계확립 자체가 서 유럽어 문법에 의지한 것이었다. 그것이 라틴어 문법에 기초한 전통적 규범문법이든, 구조주의 시 대의 기술언어학이든, 그 구조주의의 미국판 변종인 변형-생성문법이든 말이다. 그것의 별 달갑지 않은 결과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조차-국어학자들을 제외하고 말이지 " 한국어에 대해 언급할 때, 좀 엉뚱하다싶은 서유럽어의 문법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다. 한 국어의 형용사가 서유럽어에서는 형용사보다는 차라리 자동사의 범주에 가깝다는 걸 많은 사람들 이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그만두고라도, 예컨대 우리 문학작품에 대해서 언어학적으로 접근한 다면서 ‘소유형용사'니 ‘접속사'니 하는 유럽어 전통문법의 품사명을 남발해 자신의 글의 논지 자체를 어설퍼 보이게 하는 문학평론가들이 네 주위에만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교정 해야 한다는 우리의 의지는 분명히 밝혀두기로 하고, 그런 현상 자체는 보편주의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현 선생의 말마따나 우리가 서 유럽의 문화와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서유럽에서 온 것이라는 걸 모른 체한다면, 그 건 비겁한 짓이다), 유럽어 안에서도 예컨대 17세기 파리의 귀족들이 그때까지 치경음으로 내던 r 소리를 목젖떨림소리로 내기 시작한 뒤로 그것은 프랑스 문화의 위세에 힘입어 독일과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전파되며 이제는 유럽의 중심부를 장악해버렸다. 영어나 남유럽어가 아직 이 목젖떨 림소리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지만, 사회언어학자들은 이 소리가 아직 전파를 끝내지 않았다고 보 고 있다더라. 또 ‘영어를 매개로 한 미 제국주의의 침투'에 맞선 투쟁을 선언하며 올 들어 불란 서의 우익 정치인들이 호기롭게 제정한 불란서말사용법이라 물건이 결국 그 나라 헌법위원회 에서 위헌판결을 받은 것도, 내게는, 보편주의가 중세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가치 (그 현재와 미래를 누구처럼 ‘새로운 중세'라고 부르더라도 말이다)라는 걸 알리는 희미한 신호 등으로 비친다. 굳이 내 정체를 드러내자면, 보편주의라는 것이 새것 콤플렉스와 지적 허영을 자 양으로 삼는 문화침투와 천한 유행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사실은 자주 그렇지!), 그것의 부작용이 견딜만한 것이라면(순수주의자·토착문화옹호자들이 과장하는 만큼 그것의 부작용이 크 지는 않다!), 그리고 심지어는 순간순간 견디기 힘든 것일지라도 어차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라 면(나는 그렇게 생각해!), 우리의 마음을 그쪽으로 열어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요즘 내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을 요즘 떠올리는 것은 사실 내 불란서말이 너무나 보잘 것없다는 걸 순간순간 절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불란서말을 하게 될 때 내 혀가 겪는 하염없는 더듬거림은 그만두더 라도, 짤막한 편지 한 통을 쓰려고 해도 라루스를 옆에 놓아두지 않으면 진도를 전혀 나갈 수가 없다. 낱말과 낱말 사이의 거리가 그야말로 망망하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써낸 조각글들을 다 시 읽어보아도, 이게 제대로 쓴 건지 말이 안 되는 건지를 알아낼 수가 없다. 재작년에 여기서 저 널리즘 연수를 받으며 할 수 없이 불란서말로 기사를 써야 했을 때의 애긴데, 내 기사에서 대명 동사가 발견되면 데스크는 그걸 ‘etre 수동태'로 고쳤고, 그래서 내가 다음번에 아주 유사한 문 맥에다 바로 그 동사의 ‘e tre 수동태'를 박아놓으면 데스크는 그걸 대명동사로 고쳤다. 나는 아 마 악으로도 영원히 그 둘을 적절히 변별해서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구별이야 견 강부회격의 문법적 진단으로라도 어떻게 설명이 될 테지만, 낱말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뉘앙스 악에서는 정말 두 손을 번쩍 들 수밖에 없다. 수세기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갈고 닦여져 그 미세한 뉘앙스의 무늬가 켜켜이 새겨진 낱말과 낱말 사이를, 전혀 느낌 없이 오 직 사전에 의존해서 건너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런 글쓰기론 개념을 전달하기도 힘든 것 일 텐데, 하물며 느낌을 전달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 만들어놓은 조 각글을 보고 있노라면, 국어사전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아주 어렵사리 찾아낸 것이 틀림없는, 이 미 오래 전에 잊혀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경하고 독자들에게 전혀 감응을 불러일으킬 수 없 는 먼지 쓴 낱말들을 군데군데 박아, 순수하기는 하지만 맛없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문장 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건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질 테지.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어떤 사람도, 격조사 ‘이' ‘가'와 보조사 ‘는' ‘은'을 적절히 구별해서 한국어 체언의 주격을 표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동사 ‘하다'나 ‘∼하다' 가 붙은 용언들도 마찬가지지. 벌써 십여 년 전 애긴데, 그 ‘하다'를 주제로 한 서정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으며, 우리에겐 너무나 명확하고 익숙한 ‘하다'와 ‘∼하다'류 용언의 문법을 외국인들은 결코 내면화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아니 내면화는커녕 어설 졀 익히기도 몹시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언어가 정신의 인화지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나의 경우엔, 그런 느낌과 생각들로부터, 그 인화지를 규격화했으면 좋겠다는 실용적 바람이 생기고 있는 것이지. 예전의(또는 지금의) 문자학자들·문헌학자들·역사비교언어학자들·어원학자들·어휘통계학자들 은 자기들 생업의 지주였던 그 낯선 텍스트들 악에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장-프랑수아 샹폴리 옹을 로제타석의 고대 이집트문자로 이끈 것은, 윌리엄 존스를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라틴어 사이의 비교분석으로 이끈 것은, 프란츠 보프를 인도-유럽조어라는 낭만적 구상으로 이끈 것은, 야콥 그림과 칼 베르너를 인도-유럽조어와 게르만어 사이의 자음대응원리의 추적으로 이끈 것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인도유럽어의 서로 다른 a'로 이끈 것은, 구스타프 람스테트를 알타이어 연구로 이끈 것은, 양주동 박사를 향가 연구로 이끌고 이기문 교수를 고구려어와 고대 일본어 사 이의 비교연구로 유인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음소를 비교하고 진화를 더듬으며 그들이 이 룩하려 한 알 수 없는 언어의 재구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trayas와 treis에서 drei와 three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더듬으며, is와 ist와 est와 esty에서 출발해 esti와 asti에 이르는 기 다란 시간여행 끝에 esti를 재구해냈을 때 그들이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수의 신 비학이었을까? 그들을 아득한 과거로 이끈 것은 아마도 존재의 부리찾기에 대한 욕망이었을 것이다. 뉘앙스는커 녕 거친 개념조차 짐작할 수 없는 앙상하고 기괴한 낱말과 형태소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이 생각 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인류로서의 정체성이든,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든 말이야. 평생을 몽고어 연구에 몰두하며 알타이어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가 유럽인들 가운데서도 다름아닌 핀란드 사람이라는 점은 그런 지레짐작을 조금은 정당화해준다. 독일의 인도유럽어학자 는 현대의 동아시아어에보다 수천 년 전의 어떤 알 수 없는 언어에 더 귀속감을 느꼈을 것이고, 한국의 알타이어학자는 현대의 유럽어에보다는 역시 수천 년 전의 어떤 알 수 없는 언어에 더 귀 속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지구 반대편의 동시대인들에게보다는 알 수 없는 옛 조상들에게 더 귀속감을 느끼듯. 그런데 사실상, 설령 그들의 모국어가 그들의 그 옛 언어와 무슨 혈연이 있 다고 하더라도(그러기나 한 것일까?), 그 혈연이란, 단지 최근 몇 년 동안의 (상호) 수혈을 통해서 그들의 모국어가 지구의 다른 편의 언어와 맺게 된 혈연과 비교해도, 말 그대로 새발의 피에 지 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流湧 정신을 (심지어 육신까지도) 빚어낸 것은 그 알 수 없는 그들의 조상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동시대인들인 것이 아닐까? 나로서는,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 도저히 그려볼 수 없는, 그러나 어쨌든 피를 통해 나와 연결된다 고 생각되는 나의 어떤 옛 조상들에게보다는, 나의 궁핍한 실존이 스치고 맞닥뜨린 지구 이편과 저편의 내 동시대인들에게 더 귀속감을 느낀다. 조심스러운 말이기는 하지만, 내가 고대 한국어에 보다는 차라리 현대 영어에 더 귀속감을 느끼듯. 지금까지 네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게 완전한 私信이라면, 어떻게 좀더 질질 끌며 가닥 을 잡아보겠다만, 편지의 길이를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잡지 편집자다. 청탁 매수를 벌써 많이 넘긴 것 같다. 그러니, 이만 쓴다. 잘 살아라. 94년 9월 6일 파리에서 종석 추신 좀 망설이다가 이 추신을 덧붙인다. 몇 달 전에 ‘김현문학전집' 제4권 『문학과 유토피아 " 공감의 비평』을 처음으로 펼쳐보았는데, ‘편집자의 말' 끄트머리 부분을 보고는 얼굴이 화끈 거렸다. 김현 문체의 진화과정에서 『문학과 유토피아』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부 분이었는데, 내가 지난해 말에 소설이랍시고 내놓은 책에다가 그 편집자와 너무나 똑같은 소리를 해놓았거든. 나는 반사적으로 전집 제4권의 간행 날짜를 살폈고, 그것이 내 소설보다 1년 반 전에 나왔다는 사실을 다시(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확인했다. 얼른 보아도 내가 한 말이 편집자가 한 말의 판박이인 것은 너무 분명해서 내 변명이 별 설득력은 없겠지만, 내가 내 책에 다 써놓은 말은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김현 선생이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는 혹시라도 내가 그 이전에 전집 제4권을 들춰보았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심리학자들이 레미니선 스라고 말하는 어떤 무의식적 재현에 의해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아닌가 하고 곰곰이 돌이켜 생 각해보았지만, 내가 불란서로 다시 오기 전에 전집 제4권을 펼쳐보지 않은 건 확실하다. 너무나 사소하고 쓸데없는 변명이라는 안다. 다만, 네게 말을 해놓고 나면, 찜찜함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아서, 적었다. 고종석 소설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장편소설 『기자들』을 출간하였다. 현재 한겨레신문 파리 특파 원으로 프랑스에 체재하고 있다.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