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27일 화요일 오전 11시 02분 31초 제 목(Title): 한21/영어공용은 열려라 참깨? 영어 공용은 ‘열려라 참깨’? 경제 위기 빌미로 민족어 살해 위협…실속 없는 소모적 논쟁으로 치달아 (사진/일부에서는 영어공용의 대안으로 조기영어 교육을 내놓기도 한다.) 국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심지어 한글을 고집하면 배타적 민족주의자로 치부될지도 모르는 양상이다. 문자를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안겨준 한글이 ‘박물관 언어’로 명맥을 유지할 상황이 닥칠 것이라는 씁쓸한 예언마저 떠돌고 있다. 영어에 나라말의 자리를 내주고서. 소설가 복거일씨가 지난 여름 갑작스럽게 ‘영어 공용화론’에 불을 지폈을 때, 대개는 반짝 타오르다 사라지는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불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속도를 내며 곳곳에서 타올랐다. 물론 영어 공용화 논쟁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으로 여겨 경계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게 사실이다. 영어 공용화론의 선두에 있는 복거일씨는 산문집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 지성사)를 통해 인류 사회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다며 민족어의 사멸을 예견했다.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은 마당에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으면 손해일 뿐이다. 중기적으로 영어와 민족어가 공존하는 상태를 지나면, 영어가 단 하나의 국제어로 남게 될 것이다. 반면 민족어는 갈수록 활력을 잃어 학자들에 의해 보존되는 ‘박물관 언어’로 남아 차츰 사라질 것이다.” 그가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데는 다분히 경제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생존을 위한 결정적인 기술로 작용하는 영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정책적 지원에 따른 투자의 효율을 높이자는 것이다. “영어는 생존의 무기, 효율성 높이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어가 생존의 전략으로 자리잡을 상황인가. IMF 지배체제 이후 우리의 정치경제적 슬로건은 세계화, 정보화 등으로 표현되었다. 한반도를 넘어서는 시야의 확대와 새로운 차원의 경제적 활력을 얻고자 하는 데 까닭이 있다. 경제국경이 무너진 상황에서 한국경제를 되살리는 유일한 처방이 지식경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경제라는 게 결국 언어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것을 무모한 세계주의자의 돌출발언쯤으로 여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IMF를 극복하고 국제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고차방정식의 해법이 복씨에겐 ‘영어 공용’으로 귀결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복씨의 ‘영어 공용’ 해법은 우리 사회를 더욱 심각한 정체성 위기로 몰고간다는 측면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총체적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민족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가져올 게 분명한 때문이었다. 서울대 한영우 교수(한국사)는 “극단적 경제논리에 따른 위험한 처방”이라며 “기본적으로 한국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위기가 온 것은 영어가 짧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정체성도 모른 채 분수없이 세계를 향해 날뛰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국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복씨의 우국충정을 헤아린다. 하지만 그의 발상은 미국의 시장주의를 한국에 이식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에 대한 한국사회의 일방적 적응만을 강조하는 복씨의 서구주의는 민족주의의 매우 특이한 변종일지도 모른다.” ‘영어 공용’을 의제로 설정한 복씨는 <조선일보>를 통한 격렬한 논쟁에서 몇몇 우군을 만나기도 했다. 연세대 함재봉 교수(정치학)는 민족문화의 변화·진화를 전제로 복씨의 주장을 거들었다. “영어를 주체적으로 도입한 뒤에 생겨나는 새로운 문화의 변형도 한국의 것일 수밖에 없다. 한국어와 한글, 한자와의 지속적이고 균형잡힌 사용과 발전이 이뤄진다면 영어의 도입으로 한국인의 인식의 지평을 세계적인 차원으로 넓힐 수 있다.” 하지만 민족어의 사멸로 이어지는 복씨의 ‘영어 공용’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옹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현재 초등학교 3학년부터 이뤄지는 영어교육을 좀더 앞당기자는 제안이 눈길을 모은 정도였다. 영어 공용화 논쟁은 표면적으로 ‘국익’이라는 실리와 ‘민족’이라는 명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사그라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복씨의 제안이 나름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을지라도 실증적인 효과를 담아내지 못한 때문이다. 영어 공용의 득과 실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영어 교육을 강화하는 방법을 얼마든지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상명대 유기환 교수(불문학)는 “영어 공용화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알맹이 없이 선언적으로 내세우는 것부터 잘못이었다. 영어 공용의 경제적·역사적 효과를 충분히 검증해야 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지배 체제가 영속적이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생산적인 논쟁을 바랐다면 학계의 중지를 모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게 옳았다”며 영어 공용화 논란의 맹점을 지적했다. 실리와 명분 오락가락… 구체적 실사 필요 그런 의미에서 영어 공용을 실시하는 나라에 대한 사례분석을 제안하는 패러다임 기획가 김용호(<몸으로 생각한다> 지은이)씨의 지적은 논쟁의 ‘제2라운드’를 예감케 한다. “격렬한 논쟁이었지만 남긴 게 아무 것도 없다. 서로 명분에 사로잡힌 채 폼만 잡아 소모적으로 흘러갔다. 영어 공용을 실시하는 필리핀, 인도, 싱가포르 등에서 토속어와 전통문화 등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글로벌 네트워크 시대에 토속어와 영어의 호환체계는 어떤 식으로 달라질 것인지 등 무궁무진한 연구과제가 있다. 지금이라도 그런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시킨다면 머지않아 생산적인 논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국익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민족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는 한글을 보존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소중한 민족문화 유산을 사멸로 이끄는 국익이라면 논쟁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민족어에 수난을 안기는 영어 공용보다는 민족의 세계화를 위한 영어 교육 강화가 절실하다. 그렇지 않은 ‘영어 공용’ 논쟁은 한갓 지식인 사회의 소모적인 말싸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수병 기자 soob@mail.hani.co.kr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