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 Liszt (장 진 웅) Date : Sun Nov 15 11:56:55 1992 Subject: 소나기(15년 후): Part 4 그가 다음날 개울가에 도착 했을때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보지를 못했다. 소녀를 다시 개울가에서 본 것은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퇴근을 하고 개울가에 도착하니 소녀가 개울가에 앉아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 징허게 많이 뚜드려 맞았다. 아부지한테... 처녀가 밤낮 싸돌아 다닌다고... 그리고 몸도 원래 아팠고...'' ``그날 소나기 맞은 것 때문에 더 심해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녀의 얼굴은 아부지에게 맞은 상처와는 다르게 병색이 완연했다. ``이거 멋있니?'' 소녀가 웃도리를 벗자 불그스름하게 물이 든 난닝구가 그녀의 하얀 속살 사이에 걸쳐 있었다. 그가 벗어 준 난닝구였다. ``이거 입으니까 영화 `에이리언 II'의 시고니 위버 같아 보이지? 그치? 그치? 그치? 그치?'' 남자 난닝구를 여자가 입으면 더욱 요염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는 눈동자를 아래로 깔았다. 그녀의 불룩 나온 가슴을 계속 보기가 민망했다. ``이거 먹어봐!!!'' 소녀가 주머니에서 탐스런 고구마를 하나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그때 15년 전에 그애는 알이 굵은 대추를 내게 주었었지...) ``그리구... 저, 우리 이번에 얼마 안있다가 집 내주게 됐다. 또 이사 가야 한다...'' 청년은 소녀네가 이사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 박초시가 서울에 벌여놓은 사업에 실패해서 고향집까지 날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초시는 원래 노름꾼이었다. 그는 서울에 가서 화투판에 뛰어들어 광만 팔아서 재벌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광을 팔아도 똥광만 팔았다. 가끔 비가오는 날은 비광도 팔고 기분내키면 8광이나 3광도 팔았다.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어 끗발이 없는 날이면 개평이라도 뜯어서 왔다. 돈을 어느 정도 벌자 도박판을 떠나 회사를 차렸었다.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준 화투짝 이름을 따서 `비광 실업'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자회사로 `개평 인터내셔널'이란 무역회사도 만들었다. 그의 회사는 일제 화투짝을 수입해서 국내 백화점 및 구멍가게에 납품하는 회사였는데 일제 좋아하는 국민성을 노린게 적중하여 나날이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가 수입한 상품은 칼라 모니터로 유명한 일본의 NEC사에서 만든 `NEC 3-D 멀티씽크 화투짝'이라는 것으로 화투에 혁신을 가져온 것이었다. 이 상품은 기존의 딱딱한 플라스틱 화투와는 달리 화투를 초소형 TV나 전자 계산기에 쓰는 칼라 액정화면을 써서 초박형으로 만들어 잡기 편하고 속임수를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NEC에서 만드는 상품은 전부가 그렇듯이 이것도 멀티 기능(다기능)과 인공지능을 넣었는데 어두운 곳에서도 야광이며 색맹인 사람이 칼라 구별을 못해서 잘못 칠 것을 대비해서 사용자 칼라지정 기능이 있었고 자동 알람 기능이 있어서 고스톱을 칠때 피껍데기가 모자라 피박을 쓰면 자동으로 경고음이 울려서 판을 먹은 사람이 승리에 도취하여 피박값을 못받는 것을 방지하게 해 주었고 흔들고 칠 때는 상대방에 빵빠레가 울려 한층 화투판 분위기를 살려주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따따블에 오광과 피박을 동시에 하면 화투짝안에 내장된 스피커에서 `람바다'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제품들도 의외로 자세히 살펴보면 큰 허점이 있었다. 제품에 큰 하자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내장 태양열 밧데리 문제였다. 내장된 밧데리에 방전이 되는 결함이 생겨서 몇개월을 사용하고 나면 화투를 치는 도중에 찌릿찌릿 전기가 통해 화투장을 낙장을 했으며 (낙장불입이라 하여 내민 화투장은 다시 바꾸어 칠 수 없음) 8광 화투에 둥그런 달 모양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하여 광을 세개나 먹고도 ``기본 3점 났다... 아니다 달모양이 없으니 2.5점이다''라면서 큰 시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정적인 결함은 또 하나 있었다. 액정화면으로 플라스틱 화투판을 대신해서 다기능이고 고성능인 화투를 만든 것은 좋았으나 전파가 흐르는 이제품에 전자 유해파 방지장치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노름꾼들이나 잔치집, 병원 영안실 같은데서 수십벌 씩 구입해간 이 화투가 처음에는 국내 시장을 거의 잠식하여 국산 업자들이 대부분 도산을 하였으나 전자파 탓으로 밤새도록 계속 이 화투를 사용하면 눈이 아프고 뒷골이 땡기며 구토와 설사 증세가 수반되었다. 심할 때는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팔다리에 마비 증세가 일어나고 혀가 마비되어서 끗발이 한참 오르는 판에도 ``고!''를 부를 수가 없었다. 고스톱 판에서 혀가 굳어서 고! 를 부를 수 없다면 그것은 토큰을 넉넉하게 들고 지하철에 탄거나 마찬가지였다.(사는데 도움이 안된다는 이야기임) 연일 반품 사태가 일어나고 손발이 마비된 사람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으니 처음에 기세좋게 성장하던 그의 회사는 부도를 내고 도산을 하였다. 그리고 빚에 쪼들려 시골에 남은 집마저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전에 없이 소녀의 까만눈에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청년은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청년은 소녀가 준 고구마를 먹으며 목이 메었다. 떫은 고구마가 목메게 한건지 아니면 소녀가 목메게 한건지 그는 몰랐다. 그날 밤 청년은 몰래 재순이 할아버지네 사과 밭으로 갔다. 낮에 봐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보아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15년 전에는 그 소녀를 위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따러 갔었지...) 청년의 기억은 다시 15년 전을 생각했다. 근동에서 제일 무섭다고 소문난 재순이 할아버지네 사과밭이어서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사과밭 끝머리의 집에서 재순이네 할아버지가 달빛아래로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조심했는데도 들킨 모양이었다. ``어떤놈이 남의 사과를 훔쳐가는 것이야!!! 어떤놈이야!!!'' 청년이 매달린 사과나무로 재순이 할아버지가 달려오는데 손에 작대기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가만이 보니 그것은 작대기가 아니라 사냥 총이었다. 재순이 아버지는 서울서 총포상을 하고 있다고 하더니 사과밭을 지키느라고 사용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혼비백산을 한 청년이 사과 몇개를 급히 쑤셔넣고 나무에서 내려와서 울타리를 넘어 도망을 쳤다. ``파앙!! 파앙!! 탕! 탕! 이 사과 도둑놈아 게 섰거라!!!'' 총을 쏘며 재순이네 할아버지는 노인네 답지않게 엄청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으악!!! 세상에.. 아무리 시골 인심도 변했다지만 사과 훔친다고 총을 쏘면서 쫓아오다니... 걸음아 나 살려라!!!) 집으로 들어가면 눈치를 채고 잡힐 것 같아 청년은 다른 동네에서 온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동구밖길로 나서서 도망을 갔다. 한참을 도망갔는데도 재순이네 할아버지는 노인네가 지치지도 않는지 소리를 지르면서 사냥 산탄총을 쏘아대면서 쫓아오고 있었다. 밤중에 도망가는 것이라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에구... 오늘 잘못 걸렸다... 저 노인네 지치지도 않네...) 청년이 있는 힘을 다하여 동구밖 길을 벗어나 은냇골을 지나 봉서산을 끼고 돌 때까지 재순이 할아버지는 지치지도 않고 쫓아왔다. (달리기 귀신이 씌었나... 요즘은 계속 달리는구나...)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 샘골로 들어서도 계속 쫓아오자 늦여름에 벌써 서리가 내리는 무지막지하게 높은 운악산 꼭대기까지 도망을 가자 노인네는 그제서야 지쳤는지 산등성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겨우 쫓아오는 것을 멈추었다. 얼마전에 서울서 내려온 남자 하나가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이 운악산에서 절벽 근처에서 바람을 맞고 혼자 있으려니 청년은 공포와 추위로 덜덜 떨었다. 수십리 길이나 떨어진 집으로 터덜 터덜 힘없이 돌아가던 청년이 아차 했다. 소녀더러 몸이 좀 웬만해지거들랑 개울가로 나와 달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같으니라고... 바보같으니라고... 왜 내가 하는 일은 이 모양인가...)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