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wha ] in KIDS 글 쓴 이(By): purunsan ( 강철 새잎걯) 날 짜 (Date): 1997년05월19일(월) 15시08분54초 KDT 제 목(Title): 밥과 빵. 현재 이보드에서 문제되고 있는 여대에 대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글을 쓴다. 맑스주의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는 지적은, 소위 사회주의권의 붕괴이후, 전혀 비 맑스적인 사람에게서도 이용어가 아주 쉽게 나온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반도에서는,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라는 '용어'가 당당히 복권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주로 비맑스주의자 내지는 반맑스주의자에 의해서. 아니면 동요하던 지식인들에게서. 지난 날 자신의 동요를 정당화할 필요에 의해서였든, 새지주에게 확신을 주기위해서였든. 그 이전에는 [막스베버]조차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될만큼 맑스는 철저한 금기였다. 내 비판이 가동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변절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사회과학적 담론의 이상 기류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변절임을 밝히고 싶다. 청산주의의 유령과 신앙고해의 물결이 판치던, 그것을 가리켜 변절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가령, 이념적 혼란기에 우왕좌왕하던 사람이 자신의 진로를 포스트로 고정시켰다면 이것은 변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병천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포스트 좌파들은 변절이외의 다른 이름이 붙여질 수 없고, 내가 보기엔 그와같은 마녀사냥과도 같았던 청산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병천의 고해가 한겨레신문에 실리던 91년의 어느날. 그 변절의 기억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맑스주의에는 여러가지 이의가 제기될 수 있으며, 치명적인 결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수용해왔던 것이 맑스주의이다. 고전파경제학의 분배이론에도 계급이라는 범주가 도입되었었다. 그러나 이후 주류경제학으로 불리는 입장들은 계급자유를 역설했다. 주류의 입장에서 계급을 몰아낸 것은 중대한 오류였다. 맑스주의는 계급을 [학식과 덕망]을 통해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안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이 잉여가치를 설명해낼 수가 없어서이다. 잉여가치라는 말에 의심을 보낼 필요는 없다. 잉여가치의 현상인 이윤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실제로 주류경제학은 이윤을 어떻게 많이 만들어 내는가에 집중했고, 그 이윤을 누가 만드는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정당한 분배도 관심밖이다. 이러한 밥과 빵을 기본으로 한 분석틀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것을 부인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입장의 철회는 정치영역에서의 투항 내지는 변절이다. 가치생산자를 대신하여 가치분배의 임무를 떠안겠다고 공언해 온 당과 국가들이 그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한 현실사회주의권의 경험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맑스주의를 폐기해야할 근거보다는 그것을 한층 강화할 근거로 작용한다. 공공연히 [반이성의 기치]를 표방하는 후쿠야마같은 이데올로그들은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역사에 종언을 선언한다. 이성으로서의 역사에 사형선고를 내리고자 한다. 그러나, 물론,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성의 역사가 강화되어야하는 이유는, 밥과 빵의 분배에서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