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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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날 짜 (Date): 1996년04월22일(월) 19시56분07초 KST
제 목(Title): 말씀이신 그리스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1,2)

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권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렇게 사 복음이 있읍니다만 요한복음은 앞에 있는 세 복음서와는 상당히
다르게 그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읍니다.
다른 세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사건적 추적을 하
고 있다면, 요한 복음은 그 내용과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성경보다도 어려운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앞에 있는 공관복
음(마태,마가,누가)보다 요한 복음은 훨씬 어렵고, 뒤에 기록된 사도 바울
의 서신이나 요한 계시록보다도 요한 복음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은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복음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요한복음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려고 집요하게 추적한 말씀도 없을 것입니
다.
그것은 그의 약속들이나 그가 하신 일들이나 그 예언들이나 그의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관한 묘사를 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다른 ㅂ고음서를 살펴보면 사건 기록이 많은데 비해서 요한복음은 예수님
의 탄생이나 세례나 시험에 관한 기사가 없고 변화산의 기사나 최후의 만
찬이나 겟세마네의 기사도 없고, 수많은 비유나 이적담들이 없는 대신에
예수님께서 친히 자심을 설명하시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7장 등 어느 장이나를 막론하고 사건이 잠시 나온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 사건을 하나의 주제로 삼으시고 그것을 근거로해서
말씀을 펼치시는 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상당히 어렵고 깊고 풍성한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설명하는 대목부터 공부를
시작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깊음과 오묘함은 아무리 살펴 보아도 고갈
되지 않고 부족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 관한 묘사는 참 많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묘사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전능하시다, 거룩하시다, 사랑이시다, 영원하시다, 의로우시다,
자비로우시다, 오래 참으신다 등등의 여러 가지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많은 표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한 복음에서는 왜 하나님께 대한
묘사를 말씀이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18 말씀을 찾아 봅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은 우리 가운데 하
나님을 충분히 이해시킬 만큼 묘사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까 하
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이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우리에
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고 있
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말씀이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지금 제가쓰는 단어에서는 하나님, 예수님 하는 것이 혼용되고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종종 이런 문제가 야기되고 있읍니다. 하나님이 몇 분 계시냐고 물으면 적
당히 얼버무릴때가 있읍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우리는 몇 분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
읍니까? 세분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고 하나님은 보
좌에 계십니다. 벌써 두분입니다.
흔히 말하는 한 분이라는 뜻은 수자상으로 한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
품과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똑같으시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2:6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됩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원래 하나님과똑같은 본체입니다.본체라는 말은 수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다는 의미의 하나닙니다. 즉 두사람을 보고'저 사람ㄷㄹ은 하
나야, 한 마음이야'할때 그것은 둘이 똑같다는 뜻이지 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빌립보서 2:9을 봅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나님은 예수님께 뛰어난 이름을 주셨읍니다. 벌써 두 분이 아닙까? 혼자
서 하나님도 되었다 예수님도 되었다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기도를 하시면서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신 것만을 보더라도 분명히
하나님이란 대상을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도신을 한 번 외워 보십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분명히 두 분이므로 따로 따로 이야기
를 합니다.
"...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발라도에
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
시다가...."
여기에 이의가 있으면 질문을 해보십시요. 이 부분은 우리가 상당히 오해
를 많이 하는 부분입니다. 성령님음 또따로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
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표적으로 부를 때는 성부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신'이
라는 뜻입니다.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요한 복음 1:2로 갑시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함께 계셨고".
천국에 가면 우리는 분명히 성부하나님과성자 하나님(예수님)과 성령하나
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 세분은 똑 같이 다 거룩하시며, 전능하시며, 영광을 받으실 존귀하신
분입니다. 경배를 받아 마당하신 분입니다. 세분은 능력이나 영광에서 차
이가 없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일하시는 순서가 있을 뿐이지
누가 더 높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2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그 이유를 지금
부터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치고 설득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
중 한 사건인 요한복음 14:6로 가보십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14:6한 절만 외우면 안되고 14:6을 외우시려면 그 사건에 연결
되는 말씀까지 기억하셔야 됩니다.
계속해서 빌립의 이야기인 7절을 봅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
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주의하여 봅시다.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
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다음을 잘 보십시요. "너희가 나
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왜 말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신지 아시겠읍니까? 말이라는 것
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읍니다만 '말씀'이라는 단어의1차적인 의미는 그
것이 설명용이라는 뜻입니다. 말은 뜻을 설명하기 위해서나 전달시키기 위
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라는 별명을 가지시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우
리에게 전달시키고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조금 전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서가 성경에 네 권이나 기록된 이유가 여기 있읍니다. 예수님께 모든
초점을 모으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사건 등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
도록 한 것들입니다. 하다 못해 예수님이 손수건을 흘리셨다 해도 거기에
는 반드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의 말씀,
사건, 행위 어느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셨느느데 빌립이 뭐라고 질문을 했읍니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너희와 함께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그 다음을 보십시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참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아무도 본 자가 없으시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를
나타내셨다는 말씀만큼 멋있는 말씀이 도 어디 있겠읍니까? 이렇듯 예수님
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언행들을 복음서에서 추적하는 것만큼 하나미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방법은없읍니다.
간음하다 붙잡히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뜻입
니다. 지금은 용서의때다, 구원의 날이다, 아직 심판의 때가 아니다, 그러
니까 지금 용서를 하니 너는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는 이런 죄를짖지 말라
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것을 표본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라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읍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여, 주의 모친과 형제들이 찾아왔읍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하나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내 형제니
라."
기가 막힌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륜을 어기고 인륜을 어
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우리에게무엇을더 중요하게 제시하
고 계시며 무엇을 더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이 그 말씀 ㅛ속에 그대로 살아
있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요구인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책이 있다면 복음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오셨읍니다. 그가 배고픈 자들을 만나셨읍니다.
"선생님, 이 사람들이 이미 두끼나 지났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배가 고파
안됩니다. ㅁ거을것을 목고 오도록 보냅시다."
"언제 가서 먹고 오겠느냐, 너희가 먹을것을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잘 아는 5병 2어의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계서
는 결단코 자신이 누구인가를 과시하기 위하여 그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읍
니다.오직 모두를 배불리기 위하여그 기적을베푸신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
시는 이유 중에 큰 부분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저희의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그게 누구의 마음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나사로의죽음을 보고 어떻게 하셨읍니까? 주께서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주
변에 있는 사람들도 '보라 저가 어떻게 그 나사로를 사랑했는가? 그가 눈
물을 흘리신다'라고 말했읍니다. 죄아래 노예가 되었음을, 사망의 권세 아
래 있음을 분히 여기시며 그러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
의 눈물을 보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얼마나 안타까와 하십니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내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
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얼마나 너희에게 이렇게 회개를 촉구했느냐?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너희에게 회개를 요구했느냐? 그러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한탄하며 탄식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난미의 마음인 것입니다.
복음서에 계시된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육신을입고 안타까와하시
고 분노하시고 목숨끼지 버려 우리를 사랑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사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 가시며,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벤 말고의귀를 다시 붙이시는 하나님을 여기서 발견하지 못하면
복음서를 읽는 보람이없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이 말씀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서운 내용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무서움이 있읍니다. 요한 복음 17:15-17까지 보
십시다.
"내가 비옵는 것은저희를 세상에서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그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
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흴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
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 가운데는 18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
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냄을 받았느냐 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
신 예수 그리수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신 것과 같이,
그리고 그의안타까움들과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수행시키는일을 위하여 예
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 같이 우리를 보낸다는 말입니다.
같이라는 말씀에 동그라미를 그리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냅니다," 이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일한 '말씀'인 것입
니다.
내 말뿐만 아니라 내 판단, 내 행위, 내 모양이 그대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셔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르셨읍니다. 이땅에서 많은 사역을 사셨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
게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피커 구실만을 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의 삶 전체를 말씀으로 사셨듯이 그는 걸어다니는 말
씀입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다 하나님에 대
한 설명이었읍니다. 우리가 세상에 그렇게 보냄을 받앗다는 사실을 아십니
까? 참 신자의 삶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밖에 나가서 생활해 보면 '내가 신자다'하는 것이
드러나는 날부터는 사실 무엇을해도 옆에서 다 쳐다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랑입
니다.
사람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는이유는 다 빛을
보라고 보이는 곳에 놓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러한 말
씀의의미를 충분히 아시겠읍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써 하나님을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시키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눈에 띄는 데 있어야 되빈다. 그런데 우리는 안
보이는 곳에 가기를 더 ㅅ원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자꾸 커지는지 아십니까? 숨기 좋아서 큰 교회를 다는
것입니다. 그저 헌금이나 바치고, 직분은 맡지 않고, 구역에는 안 모여도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또한 헌금을 냈는지 안냈는지 누가 알게 뭡니까? 5,000명, 6,000명이 모이
면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알게 뭡니까? 그렇게 적당히 때우려는 신자들로
인해서 큰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100명 미만쯤 모이는 데야
안 가면 금방 알거든요. 그래서 큰 교회로 숨어듭니다.
이런 모양은 마치 불을 켜서 됫박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놓은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 생애를 사시면서 으느 한 ㅁ라씀, 어느 한 행
위도 은혜롭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이 있었읍니까?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생명샘이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게 와서 먹고 마시라' 여러분이 바로 그러셔야 됩니다. '무거운 짐진자들
아 다 내게로 오라' 신자는그것을 위해서태너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짐을 여러분에게로 가지고 와야 됩니다. 그렇다고 구속
자가 될 수 없고 대속자가 될 수도 없읍니다. 그러나 그 문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일차적으로우리를 통과하여야 됩니다.
저와 제 아내가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전화받는 일입니다. 한시간도 받고
때로는두 시간을 받을때가잇읍니다. 아침을먹다가 전화를 받앗는데 점심을
먹을때까지 연장되는 수도 있읍니다. 때ㅔ로는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럴때
는 이런생각을합니다.저희같은 사람에게도 전화를 거는 일이 있다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감수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전화를 걸일이 없다면 저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의최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잘 믿을테니까 제발 귀찮은 사람 좀 안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게일반적인 소원입니다.
구역에도 좀 마음이 잘 맞는 사람끼리만 모아 주시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장로님의 기도가 짧게 해 주시고,목사님 설교도 짧기를 바랍
니다. 집에 그냥 있으면 끝도 시작도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구역에 나가서도 말도 안되는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감수하는
것은 그 상대방으로 하여금 얼마나 기쁨을 주시는지 아십니까? 인내함으로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가 막힌 인격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었읍니다. 중풍병자, 귀신 들린자, 소경, 앉은뱅이 들이었읍니다. 성한
사람들은 누구였읍니까?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 정도
였읍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유상종이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신자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들 틈
에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을증거합니다.
아무도 돋ㄹ보지 않는 사람에게 싸여 있는 사람, 그가 잘 하는 사람입니다.
있는 사람끼리 모이지 마십시오. 있는 사람끼리 모이면 없는 사람은 갈 곳
이 없읍니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속에 가서 끼기 쉽지만 없는 사람은
있는사람 틈에 끼지 못합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찾아 가야 됩니다.
있다 없다는 것은 꼭 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신앙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성장하고 난 다음에 제일 못 참는 것이 무엇입니까?
연약한 믿음의소유자가 엉뚱한 질문을 하면 너무나 냉정하게 대합니다. 무
식하게 저런 질문을 하느냐고. 그러나 올챙이적 시절을 기억해야 됩니다.
성장한 믿음의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키우는 토양을 만들어내
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읍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나는 말씀이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나
를보내신 것같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하는 말의깊은뜻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십시오. 물론 지치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우리끼리 모여야 됩니
다. 가끔 모여서 받아가야 됩니다.
신자기리 모여였다가 다시 힘을 얻어가고 또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위로받
고 흩어지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현장은 아닙니다. 영양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셨읍니다.
이 요한 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은 이런 훨씬 중요한 말로 클라이막스롤
이룹니다. 보시겠읍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의 독생자의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다."(14절). 이렇게 우리는
보냄을받아야 됩니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써 우리의영광을 취해야 됩니다. 지식과 능력이 아닙
니다. 은혜와 진리로 우리는 우리가 있는 일터에서, 혹은만나는 사람앞에
서 존재 가치를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그 사람을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예수를 믿는 자요 은혜와진리가 충
만하더라하는 것이 이 땅을 사는우리의 사명인 줄 알고 마음에 기억하고
목숨을다하여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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