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1996년04월22일(월) 18시03분22초 KST 제 목(Title): [한백설교] 부활절 설교 4월 21일(한백교회 부활주일(4.19 혁명과 가장 가까운 주일)) 설교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나선 사람들 김진호 준목/한백교회담임교역자 로마서 5장 3그뿐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 오히려 긍지를 가집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를 낳고 4인내는 단련을, 그리고 단련은 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5그리고 희망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선사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져 있기 때문 입니다. 마르코복음 12장에 보면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시비의 소재는 '부활'에 대한 이해의 문제였습니다. 당 시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평민 사이 에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활신앙은 '무식한' 평민들만의 현 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기성 종교체계의 틀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식인들 가운데서 어떤 부류는 부활신앙 을 신학화하려 했고, 또 어떤 부류는 부활신앙의 허황된 면을 비꼬는 논 거를 만드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거의 예외 없 이 부활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다만 유다교신학에서 어느 정도의 비 중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에서만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편 대지주이자 고위관리들이 주류를 이루던 사두가이들 가운데는 평민들의 이런 신앙행태를 존중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것을 한갖 무식쟁이들의 몽 매한 미신 따위로 무시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탓에 유다 종교 당국자들 사이에는 부활 문제가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는 미묘한 사 안이었고, 그렇기에 공식적인 신앙집회에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디만, 비공식적 모임에서는 상대방에 대해 원색적인 혹은 냉소적인 논전이 벌어 지곤 했습니다. 마르코복음 12장에서 사두가이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 께 부활 문제로 시비를 거는 장면은 바로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볼 ㎖ 이 집회의 주역인 예수라는 인물은 미신으로 백성 을 미혹하는 사이비 예언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 신앙의 허점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지적함으로써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려 백성 의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려 합니다. 그들의 질문 요지는 이렇습니다: 맏며 느리가 아들을 낳지 못한 상황에서 남편이 죽게 됐을 때, 형사취수혼 율 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자손을 낳아주는 경우, 부활의 때에 이 여인의 남편은 도대체 누구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들은 자신들의 논지를 명쾌하게 표현하기 위해 일곱 형제의 이야기로 상 황을 극단화합니다. 여기서 사두가이들은 부활 신앙을 내세론으로서 이해 하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 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들은 어긋나 도 크게 어긋나 있다"(27절) 요컨대 사두가이들은 부활신앙을 내세에 초 점을 두고 있고,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도 사두가이 식의 이런 부활 이해는 변함없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자'들 의 신앙은 '내세론'으로서의 부활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의 도에서 부활절 새벽 대규모 집회를 열던 기성의 교회도 이 점에서는 별다 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것은 동서양, 남북 세계 할 것없 이 교회가 서 있는 곳이라면 예외없이 드러나는 신앙유형이 되어 버렸습 니다. 심지어 신학사에서 예수님의 종말 선언의 내용을 두고 그것이 미래 적이냐 현재적이냐 시제 복합적이냐 등등, 복잡한 주장을 펼쳤던 '쟁쟁 한' 신학자들도 이 점에선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에게서 부활신앙은 한결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와는 무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한 후배가 엘리엇(T. S. Eliott)의 {쿠마의 무녀}라는 소설의 줄거리를 얘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기억이 나는 대로 이야기해 보면 다음과 같습 니다. 이 소설에 따르면,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이 기도의 응답 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되었는데, 이 기도에 '늙지는 말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를 빼먹은 탓으로 늙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병약하고 비참한 '영 생'을, 죽음보다 훨씬 저주스런 삶을 영원히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 영생'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굉장히 좋은 말처럼 들렸는데, 이 소설은 그런 우리의 느낌을 조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식의 냉소는 사두가이가 냉소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부활신학/신앙을 펼쳤던 그리스도 교의 어긋난 발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긋난 그리스도교'의 '내세론'은 역사 속에서 무시무시한 흉 계와 결합돼 있습니다. '천국 대 지옥'이라는 내세론적 도식은 죄를 조금 이라도 짓지 않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을 베푸는 교회의 권력에 승복하게 합니다. 이로써 세례를 베푸는 권한을 쥔 교권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 존재가 됩니다. 또 한 교회가 보증해 준 권력은 절대적 정당성을 보증받게 됩니다. 이로서 신은 권력이 행하는 모습에 따라 그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에 보호하는 존재가 됩니다. 또한 대중은 권력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순종이 신앙의 미덕임을 배우게 됩니다. '천국 대 지옥'이라는 도식은 중세에 이르면 보다 정교한 새로운 해석 의 길로 개척됩니다. 애석하게도 이 길 역시 어긋난 길이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중간단계가 설정됩니 다. 완전히 악한 이도 아니고 완전히 선한 이도 아닌, 중간 단계의 사람 들 -이 중간 영역에 자신을 귀속시킬 때 누가 감히 그 부당함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은 세레를 통해 죄사함을 받더라도 지었던 죄를 씻김받 는 '불의 정화 기간'을 내세에 받아야 하는데, 그 중간단계의 내세가 바로 연옥입니다. 자크 르 코프라는 역사학자가 저술한 세계적인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연옥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연옥'으 로 상징되는 신앙은 민간신앙에서 유래합니다. 그것이 12세기에 오면 하나 의 신앙으로 확립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교회의 인간 길들이기 전략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이 시기 갑자기 대두한 신흥 자산가 들인 부르조아지들, 특히 고리대금업을 일삼는 졸부들, 그들이 사악하게 벌 어들인 재산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교권의 전략이 연옥신학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통한 내세론적 상품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적절하게 변화하면서 상품성 있는 제품으로 변모했던 것입니 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신앙을 '산자들을 위한 신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내세론이 아닙니다. 죽은 뒤의 세계가 어떤 것이어서 그것을 현세에 준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의 삶, 부활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채워지지 못한 그 무엇을 향한 갈구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부활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예외 없이 고난의 상 황에서 발설됩니다. 거기에는 고통스런 현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력의 횡포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저항하기엔 벅찬 불의가 판치는 질서가 있습 니다. 또한 거기에는, 카인의 칼에 난자당한 아벨의 몸둥아리에서 터져 나 온 피가 호소하듯이, 무력한 사람들의 봉쇄된 입에서 새어나온 가느다란 비명 소리, 그러나 결코 끊어질 줄 모르는 질기디 질긴 희망의 소리가 있 습니다. 한평생이 온갖 고초뿐이었다고 술회하는 야곱, 이 말은 동시에 그의 아버지 이삭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한 가닥 보이지 않은 희망을 잡으며 목적지 없는 유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가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하지 않았느냐? 하느님은 . . .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긍지를 가집니다. [그것 은]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단련을, 그리고 단련은 희망을 낳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으나,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은 내세에 대한 약속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 사건은 '영원히 죽지 않 는 괴물'의 탄생을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세가 있다면 그 이야기는 내세에 가서 합시다. 물론 그때의 설명도, 마치 우리 가 이 세계에 살면서도 이 세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듯, 불완전할 것 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내세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활을 이야 기하는 것은 그때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염원 의 최대치를, 우리 바램의 극단을 강조하여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입 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서만, 즉 헤어날 수 없은 것같은 역사의 괴기스런 몰골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는 삶 속에서만 고백될 수 있는 언어 입니다. 그것은 '희망없음'이라고 판단하는 무슨 무슨 이론들과 전략들이 우리를 좌절시킬 때, 바로 그 때에야 우리의 가냘픈 숨의 내쉬는 기도를 따라 흘러나올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인내'하는 의지를 주며, 역경을 헤쳐나갈 '단련'된 강인함을 줍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제자들이 '좌절 골짜기'를 뛰어넘어 온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그분의 실천의 본질을 전하 는 삶을 살아갔듯이, 우리에게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나선 사람들, 한백의 동지들. 부활을 확인할 수 있 는 '그곳으로', 고난 속에서, 주검 속에서 더욱 강건한 생명으로 되살아나 는 '그곳으로, 그곳으로' 가리라 고백합시다.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