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 날 짜 (Date): 1996년04월01일(월) 16시07분33초 KST 제 목(Title): [한백설교]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96년 3월 17일 설교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김진호 준목/한백교회담임교역자 사도행전 2장 1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모두 한곳에 같이 있었다. 2그런데 갑자기 하늘 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린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 가득을 채웠다. 3그리고 불같은 혀들이 갈라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나 각자 에게 내려앉았다. 4그러자 모두 성령으로 가득차서 영이 그들에게 일러주 는 대로 여러 가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예루살렘에는 천하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모여온) 경건한 사람 들인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6그런데 그 소리가 나자 군중이 몰려왔고, 그들은 각자 사도들이 그들의 지방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 하였 다. 7그들은 넋을 잃고 놀라와 하면서 말하였다. 말을 하고 있는 이 사람 들은 보다시피 모두 갈릴래아인들이 아닌가? 8그런데 우리는 저마다 태어 난 제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 9바르티인들과 메대인들과 엘람인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유대와 가빠도기아, 본도와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 10프리기아와 밤빌리아, 에집트와 키레네 주변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 여기 체류하고 있는 로마인들, 11그리고 유대인들 과 이방인 개종자들, 그레데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인 우리는 사도들이 우리 지방말로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구나." 12그리하여 모두 넋을 잃고 당황하여 서로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말했다. 13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새 포도주에 흠뻑 취했군" 하며 빈정거렸다. 2호선 전철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옆에 서 있는 연인사이쯤 되보 이는 두 사람이 라디오 이어폰을 하나씩 귀에 대고 장난끼어린 모습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전철 소음 때문인지 그들은 볼륨을 매우 크게 조정해 놓았던 탓에 열차의 소음이 작아지는 정차구간에선 그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이따금씩 들리는 파열음에 책을 읽고 있던 저는 다 소 짜증스런 심정으로 책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객차 저편 끝부분에서 어떤 사람이 호령하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다소 쉰소리이긴 하지만, 유난히 찌렁찌렁한 음성이었습니다. 일제히 모든 사 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습니다. 먼져 팻말이 보입니다. '예수 천국'. 한숨 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제 책은 다 읽었군!' 그는 중년쯤 되보이는 남자 였는데, 전철 한 객차 안의 세 곳에 멈쳐서서 그 지점을 오락가락 하면 서 한참 설교의 말을 해댑니다. 여느 전도자처럼, 그의 말은 생명을 담보 로 하는 위협의 말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퍽 개성이 강한 전도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설교하는 중에도 온갖 것에 간섭합니 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큰 소리로 다가가서 고함을 질러 깜짝 놀라게 하고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데 졸아?" 라며 윽박지릅니 다. 다리를 꼬고 쑨아 있는 젊은 여자 앞에 가서는 단정히하라고 호통치 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에게는 집안 교육이 엉망이라고 삿대질합니다. 껌을 씹고 있는 어떤 학생을 보고는 "뱉어!"라고 소리치며, 그것을 종이 에 싸서 자기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말은 옆으로 세서 민주 주의가 문제라는니, 세계화되는 세상에서 더욱 예절 교육이 필요하다느니 하는 등, 종잡을 수 없고 앞뒤 없는 말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옵니다. 내 옆에 서 있던 두 연인도 그의 호령의 사정권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습니 다. 그의 호통 소리에 여자가 깜짝 놀라, 이어폰이 그녀의 귀에서 떨어지 고, 마침 신호대기 중에 있던 전철 안, 내가 서 있는 부근 몇 사람의 귀 에 그네들이 듣던 음악 소리가 뚜렷하게 들립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 이 전도자는 그네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 노랫말을 받 아서 소리지릅니다. "그래 내 말이 그말이야. 예수님이 네희들에게 부르고 있다고. '거기 누구 없나고' 말이야. 그러니 이따위 짓거리 그만하고, 생명의 말씀을 들으란 말이야." 그리고는 남녀칠세부동석 운운하며, 한참 을 호통치다가 다짜고짜 "그러니까 예수 믿어 천국가!" 라고 소리지릅니 다.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웃음을 참느라 애써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 전도자의 낙시밥에 걸려들지 않으려는 듯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천국가" 라는 소리가 끝나는 순간 이어폰에서 들리는 노래말 소리가 다 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박힙니다. "그냥 한번 불러봤―소!" 웃음을 참지 못해 여기저기서 킥킥 거립니다. 저도 웃음을 억지로 참다가 다음 역에서 내려버렸습니다. 덕분에, 한 정류장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 니다. 그 엉터리 전도자는 단지 우리시대의 한 사람의 돈키호테가 아닙니 다.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전도자의 모습이 그러하고, 또 교회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세상을 향해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라고 외칩니다. 세상살이에 시달리며 쉼을, 안식을, 구원을 갈구하는 사 람을 향해 부릅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진정한 편안함이 무엇인지 묻고 자 하는, 그러나 직장에서도, 가족에서도, 어떤 취미활동에서도 도무지 해 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한번쯤은 "어디 한번 말씀 좀 해보시오" 라고 묻는듯이, 사람들은 교회의, 전도자의 소리에 귀기울 여보기도 합니다. 그네들은 자신들의 삶의 구체적인 고독함에서, 상처의 아픔에서, 외로움에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의문을 전집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어디로 가는가, 어디에 희망의 원리가 있단 말인가 '. 하지만 교회는, 전도자는 엉뚱 한 말로 대답합니다. 아무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동문서답일 뿐입니다. 더욱이 '어쩌면 저렇게 세상살이를 단순하게 볼까, 어떻게 저 렇게 권위적인 말, 폭언으로 가득할까, 어떻게 저렇게 다른 사람의 수십 년의 인생을, 다른 문화의 수천년의 역사를 단번에 부정해버릴까' 등의 의 혹만을 새롭게 심어줄 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전도자들의 부름이, 교 회들의 부름이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합니다. 아니 도리어 약을 올리는 말처럼 들립니다. 기껏 불러놓고, 그 부름에 진지하게 돌아다보니까, '그 냥 한번 불러봤어'라고 말입니다. 1990년대가 되면서, 이른바 세기말이라는 것이 심감나는 시기가 되면 서 우리사회는, 아니나 다를까 정말, 세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 속도가, 그 변화의 폭이 너무나 커졌습니다. 예전의 가치 가 혼미해지고, 새로운 가치들이 갑작스레 우리 삶의 여기저기서 우리를 향해 호소력 있는, 매혹적인 소리를 던지면서 몰려옵니다. 흔히 말하듯 이 정말 '지구화' 시대가, 커다란 해일처럼 덮쳐오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와 때를 같이해서 우리 사회의 그리스도교는 정말 오랫만에 '교회의 위 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 팽창주의 또는 교회 패권주의의 위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전도가 잘 들어먹히질 않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냉소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선포에 코 웃음 칩니다. 심지어 '너나 잘해!' 라고 반문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제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됩니다. 특히 젊은 층의 교회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보수파건 진보파건 말입니 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해서, 각 교단들간의 경쟁이 심화됐습니다. 각 교단마다 몇천교회 운동, 몇만교회 운동 등의 슬로건이 내걸어지고, 신학 생수 불리기 운동이 앞다투어 벌어집니다. 마치 일반대학의 학생들이 입 학하자마자 취업 준비를 시작하는 것처럼, 신학교의 학생들도 입학과 함 께 취업준비를 시작합니다. 무슨 '이즘'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졌고, 세상의 체제에 대해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랩니다. 양적인 성공이 라는 기능주의적 사고에 체면된 채, 교회라는 '사업체'를 어떻게 창설 할까, '자본금'은 어떻게 댈까, '고객 유지 전략'은 어떻해야 하는가 등 등의 문제를 무엇보다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취업할 때쯤 되면, 더 나아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쯤 되면, 지연 학연 혈연 등, 온갖 줄타기를 이용할 줄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 그런 것을 못하면 '처세불능자' 취급을 받습니 다. 이른바 목회자 후보들은 치열한 경쟁의 마당에서 목회의 성공사례들을 연구하고, 그 모법에 준해서 자신의 미래를 기획합니다. 보수파건 진보파 건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네들이 보는 성공사례란 하나같이, 모습 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교회 팽창주의요 교회 패권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모습은 세상의 모습처럼 공격대상 과 공격지점을 설정하고는 그것을 정복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 다. 그 공격이 성공하면 하느님의 축복이고, 실패하면 하느님의 홀대를 받은 자처럼 좌절합니다. 이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리고 교회들이, 전도자들이 세상이라는 공격대상을 놓고 경쟁하는 카인의 후예가 됩니다. 자기가 드린 제물은 다른이들의 제물보다 더욱 하느님이 기뻐하는 것이라 는 확신을 즉각적으로 받고 싶어하고, 그러기 위해 경쟁합니다. 값싼 축 복의 구걸자가 됩니다.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면서 말입니다. 카인의 후예 들이 문명 발전사의 주역이 됐던 것처럼, 교회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대교 회들이 꽤나 세력이 거대해진 그리스도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 갖가지 권력을 행사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만큼이나 욕심 으로 가득하고, 이 세상의 누구 만큼이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 세상의 누 구 만큼이나 공격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른바 '교권 중심주의'입니다. 그 것은 또한 '교회 중심주의'로서 드러납니다. 신앙고백은 '오직' 교회의 부흥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하고, 신앙생활은 '오직'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어야 하고, 신앙의 척도는 '오직' 교회생활로서만 좌우된다 는 것으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신학도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만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하고서,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 "여보세오, 거기 누구 없소? 내가 당신들에게 복을 주겠소.," 하지만 이제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그 다음 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부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도리어 약만 올리는 부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부름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항복하겠다는 고백을 펼치는 사람을 빼고는, 자신의 신념을,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사회적 역 사적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개선해보려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부름 은 "그냥 한번 불러봤소" 라는 말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말씀은 이른바 성령강림절이라는, 교회의 4대 절기 의 하나의 배경이 되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부흥에는 언제나 성령에 대한 유별란 확신이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평가되 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여기서 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른 바 '교회의 위기'에 대해서 진보파든 보수파든 간에, 너나할 것 없이 내놓 는 대안이 '다시 성령에로!'라는 구호입니다. 그리고 이 구호는 신앙의 영 역에서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일차적으로 배제하고 견제합니다. 그리 하려면 신앙의 언어로 무장해야 하는데, 그것은 교회적 인 언어에 다름 아닙니다. 세속적인 생활에서의 언어는, 즉 교회 밖의 언 어는 신앙의 언어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성이라는 것으로 재무장하여야만, 영의 신비한 힘을 덧입을 수 있고, 그리함으로 써만 성과주의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 것입 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와는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낸 제자들은 다시 허탈 감에 빠집니다. 이제 삶의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으로 신앙의 축 을 삼을까? 어떤 가치로 살아야 할까? 그들은 이런 심정에서 골방에 모여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신앙의 정기를 회복하는 사건이 벌어 졌습니다. 여기서 사건의 초점은 무력함에서 강고한 신앙으로 변화하는 ' 신비한 현상'에 있지 않습니다. '신비함' 자체가 초점이라면 그것은 일종 의 '마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신비함 그 자체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어디로 변화됐느냐'를 말하는 데 초점이 있 습니다. 신비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변하를 말하는 수단의 하 나로 신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구성을 보면 간단하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이라는 한 특정한 도시에서 온 세상으로 복음이 선포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과 정에는 신비한 마술같은 현상도 있었고, 신비한 힘이 부재한 것처럼 무 력하게 고난당하는, 체포되어 구금되고 고문당하고 죽임당하기까지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요컨대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신비함의 체험 뿐 아니라 절망과 고난의 체험 속에서도 도도하게 전파되는 복음을 증거하 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절망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욕을 이 세상에 전파 하는 일에 온 몸을 바치게 됐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변화를 "성령 에 가득찼다"(4절)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성령에 참' 이라는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자들의 변화된 삶의 기축을 응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무엇에서 무엇으로 의 변화'라는 체험은 실제로는, 시간적으로도 길고 사람마다 다양한 체험 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본문은 이것을 한 폭의 그림으로 응축해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피카소가〈한국전쟁의 대학살〉(1951)에서, 기계처 럼, 로보트처럼 묘사된 산업문명의 주역들의 제국주의적인 무분별한 폭 력과, 인간의 원초적인, 벌거벗은 모습으로 묘사된 여인들과 어린아이들 의 희생을 대조하여 그리고 있을 때, 그것이 한국 전쟁을 통해 이곳저곳 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희생을,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희생을 한 폭의 그림 속에 응축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성령에 가득 찬' 제자들 은 골방에서 뛰쳐나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들이 무엇을 말했을까요? 물론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같은 저자의 책인 루가복음서 는 복음을 이렇게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 셨도다.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 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 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 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로다"(루가 4,18-19).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나, 교회의 부흥에 대해서는 한 마디 단서도 없습니다. 여기 서 말하는 바는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이의 해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가 세워져도 좋고 아니어도 좋지만, 초점은 교회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이 의 해방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핵심적인 것이 있습니다. '성령에 가득 찬' 제자들이 이런 복음을 어떻게 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방언으로 말합니다. 자기 자신들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비움을 상징합니다. 신앙체험에서 '방언'은 자기 자신의 말이 부재하고 그 자리에 다른 소리가 개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말하는 방언은, 제자 들의 자신들의 소리의 부재를 대체하고 나타난 소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 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방언이 아니라, 듣는 이들의 모국어로 들리는 소 리를 말합니다. 요컨대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의 채워짐 사건을, 제자 들의 소리의 부재로, 제자들이 비운 자기 소리의 자리에 듣는이의 소리, 즉 듣는이의 삶, 듣는이의 경험, 듣는이의 고난, 듣는이의 해방의 염원을 채워넣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성령이 채워 짐은 나 자신의 아집으로 똘똘 뭉친 신앙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자신의 자기 비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神이 차고 들어 앉아 권위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혹은 그 대리자인 성직자가 들어앉 아 신앙인의 권력의 주체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비워진 자리에 듣는 이의 해방 염원을 채워 넣는 것을 말합니다. 민중신학의 용어로 말하면, '민중의 눈으로 보는 신앙'이 바로 성령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체험으로서 성령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 은 나를 종교적으로 확고한 신념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 기를 죽임으로써 자기를 비운 것처럼, 나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에 고난 당하는 타자를 채워 넣는 것, 바로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든 우리 든 교회든 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 소외, 고통, 고독 속에 있는 세상을 향해 '여보시오 거기 누구 없소?' 라고 불러야 합니다. 왜 냐하면 그들에게 들려줄 복음의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들려줄 복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갖기 위해 기도하고 번뇌하고 공부하면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소리는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내가 상상하는 신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고통을 겪는 타자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나와야 합니다. 마치 화엄경의 말처럼 '(모 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인) 바다는 바다를 부정함으로써 바다가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성령 사건의 의미인 것입니다. ▣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