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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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
날 짜 (Date): 1996년04월01일(월) 16시08분34초 KST
제 목(Title): [한백설교] '신조 대리석' 예수 탈출기


96년 3월 31일 설교

                             '신조 대리석' 
                              예수 탈출기

                                 김진호 
                        준목/한백교회담임교역자

 마르코복음서 10장
  13그리고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어루만지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들을  나무랐다.  14예수께서 보시고는 언짢아하
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도록 그대로 두시오. 
그들을 가로막지 마시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입니다. 
15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16그러고서는 어린
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셨다.

   우리나라 고전 풍자  문학의 하나인《양반전》에는, 갑자기 거부(巨富)
가 된 사람이 늘어난   재산에 걸맞는, 이른바 '양반다운'  행동거지를 연
습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는 부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전의 마음
과, 말투와, 행동거지가 몸에  배어  있는 것에 심한  열등감을 느꼈던 것
입니다. 이 모습 때문에 지난날   얼마나 많은 모멸감을 느껴야 했는지 모
릅니다.  모습 때문에 지난날  얼마나 많은  조롱을 감내해야 했는지 모릅
니다. 이 모습이, 정말이지,  증오스러울 정도로 싫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떵떵거릴 만큼 돈이 있습니다.  창고가 곡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금고에 
온갖 패물이 가득합니다. 이젠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치 재산이 있습
니다. 그런데 그 증오스런 마음과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투에서,  행동거지에서, 밖으로  내비추이는 온갖 모습
을 바꿔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합니다. 그
의 이 노력은 그야말로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필시 그는, 할  수만 있었더
라면, 자신의 마음까지도 변화시키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변
화는 커녕, 외양에서라도 양반스러워 보일려고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사
람들에게  비추어지는 그의   모습은 더욱 부자연스럽고  꼴불견으로 드러
날 뿐이었습니다. 그의 '양반 연습'은 번번히 실패하고 맙니다. 모든 사람
이 그를 향해 비웃습니다. 심지어  그 집  마당쇠까지도 번번히 골탕을 먹
입니다. 이런 거듭된 실패  속에서 결국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을 
포기하고 맙니다.
   물론 이  이야기 자체의 줄거리는, 사실보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사실스럽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졸부(猝富)는, 그의 '양반  티내기'가 
아무리 부자연스럽더라도, 그들은 대중의 조소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무리 그가 엇그저께는 동료요 친구였다 할지라도, 이제 
그가 아흔 아홉칸짜리 집의 소유자요 천석꾼 만석꾼인 한, 그 집 마당쇠는 
커녕, 그 누구라도 그를 놀려댈 수 없었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노여움
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필시 그는 졸부답게 세
도가였고, 그럴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또한  무수한 진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
에는 권력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
이 전제되어 있고,  또한 그들 사이의  불균형한 관계는 단순히  재산상태
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불균형은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권력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권력자들을, 그들의 횡포를   두려워하고 증오하지만, 동시에 그
들을 동경합니다. 권력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꿈을 꿉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을 말입니다. 창고에  곡식이 넘쳐나는  날을 말입니다. 색색동
이 비단 바지 저고리를 입고, 팔자  너털걸음으로, 담뱃대 휘저으며, 사람  
들으라고 일부러 헛기침 소리  내며  길거리를 어슬렁거릴 날을 말입니다. 
변화를 향한  꿈입니다. 고달픈 현실에서의 탈출을 향한 꿈입니다. 해방을 
향한 꿈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   꿈은 간혹 실현되기도 됩니다.   새 세상이 도래합니
다. 그러나 새 세상은 이 꿈을 꾸는 모든 사람이 향유하는 그런 세상은 아
닙니다. 갑자기 졸부가 된, 갑자기  권력을 쥐게 된 몇몇 이에게만 주어지
는 그런 세상입니다. 여전히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계속되는 그런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변화를, 이  탈출을, 이 해방을  체험하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몇몇 횡재수를  만난 사람에게서만 나
타납니다. 요컨대 새 세상은   몇몇 사람만의 것이었고, 나머지 모든 사람
들은  어제와 같은 하늘을  올려다 봐야하고, 어제와 같은 땅을 밟고 살아
야 합니다.  그래서 갑작스런 변화에 맞추어  생각하고 처신하려는 졸부의 
노력은 예사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의   생활 면모에 아직  
습성화되지 않았기에, 억지로  내면과  외양을 바꾸려 합니다.  융통성 있
고 자연스러운 전통적인  양반들과는  달리, 경직된  생각과 행동이  그를 
지배합니다. 반면 늘상 살아온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졸부의 
새로와지려는  행동거지는 양반들의  그것보다  특별히 얄미롭고 가증스러
워 보입니다.   가뜩이나 경직된 졸부들은   사람들의 이런 따가운 시선에 
더욱 완고해집니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여느  양반들보다  더욱 포악한 
얼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잘것  없는, 고통스런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꿈
을 꿉니다. 소박한 꿈입니다.  그리고《양반전》의 주인공처럼 이 꿈을 실
현한 몇몇 사람들은  예전에 꿈꾸면  욕망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그 
욕망은,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과거의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그 소
박한  욕망은, 그것이 꿈이   아니라 실행의 차원으로 옮겨지자 마자 기존
의  세도가들보다 더욱 포악하고  더욱 잔인한 얼굴을 한 괴물을 탄생시켰
던 것입니다.  
   여러분,〈사도신조(경)〉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마도  다른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셨던  분들은 세례받기   위해서 이것을 (한 자도  오자 없이)  
외워야 했을 것입니다. 또  많은 교회에서는 예배 때마다〈사도신조(경)〉
를 암송하곤 합니다. 마치〈주기도문〉처럼  말입니다. 아니 실제로는〈사
도신조(경)〉가 교회의 전통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교   교회사를 통해서  이것은  하나의  강력한 교리   
강령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정통이냐 이단이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백은〈사도신조(경)〉를  예배 때는 커녕, 세례예식에서
조차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거, 알려지면 큰 일입니다.  누군가가 이단 시
비를 걸어 올지라면, '감히 사도들의  전통을 무시한다는 게 있을 수나 있
는 것이냐'고 따지고 들지라면,  거짓말로 답하지 않는 한, 걸려넘어질 판
입니다. 게다가 공인된 찬송가를 사용하지도 않고, 예배도 일주일에 딱 한 
번 뿐이며, 설교자가 뜨거운  신앙을 강조하기보다는  연일 전통을 비판만 
해대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단 정죄의 안성마춤의  대상입니다.  다행히 
작은 교회라서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 이렇다할 영향력도 없을  테
니까 공격하려는 이가 있더라도 그럴  만한 의욕이 생기질 않겠지요. 어쨋
든 이단  정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를 교회로 보고 싶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오늘도 정신 못차리고, 감히〈사도신조
(경)〉에 시비를 걸어볼 참입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는  하층민들의 종교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당시의 공식적 견해에 따르면) '사이비 예언
자'였고, 그 제자들은   행색에 있어서 지저분하기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놀라운 학식을 가졌다고 자랑하
는  바울도,  헬레니즘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론 전개가  형편없기 그지없다고 폄하하는  그런 존재일 뿐입니
다.   그나마 성서에서 고급스런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라면 히브리서가   
고작입니다. 주후 2세기 말의   로마의 대철학자인 첼수스(Celsus)는 그리
스도교가  무식쟁이들 사이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위험스런 종교라는 주장
을  폈습니다.  사실 이것은 주후 1-2세기  로마 지식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하층민들의 종교가 로마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던 첼수스같은 이가 
비판을 해야 할만치  급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식으로 볼 때  사
상의 깊이에 있어선 별 것  없는 종교에 불과  했으나, 그럼에도 그리스도
교는 천민 사이에서,  노예  사이에서, 농민  사이에서, 그리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2세기에 이르면  그 파급 속도
는, 당국자들이 심각한 문제로  느낄 만치, 무척 빨랐던  것 같습니다. 이
들 하층민들은 현실의 고통에서부터  벗어나기를 꿈꿨습니다. 변화를 희망
했습니다. 해방을 갈구했습니다. '예수'라는  메시아로부터  시작된 이 신
흥 종교는  이 점에서 기성의  어떤 종교보다도  강력한 변혁에의 꿈을 담
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여러 신흥종교들도  이런 희망을 지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지중해 세계에 어느  민족들보다 
더욱 널리 퍼져 있고 응집력이  강했던 종족인 유다인들을 포자로 해서 퍼
져나갔기에,   그 확산력은 실로  놀라울만 했습니다. (종교  역사상 기층   
대중들의 이런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이만큼 급속도로  광대한  지역으로 
확산된 종교는 아마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층민들의  종교가 어느 순간 로마의  권력 투쟁의 장 한 
가운데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황제로 등극한 이의  후원세력
이 됩니다. 갑작스런  변화입니다. 천대와 모멸의 대상이던  종교가 한 순
간에 권좌에 서 있습니다.  제국의 불순분자요 최고 흉악범의 처벌을 받았
던  이로부터 시작된 종교가 어느새 제국의 황홀을 거머쥔 이의 종교가 되
었습니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그리스도교만의 체험입니다.  다른  종교에게서 
세상은 여전히 어제와 같은 세상이었고, 그들은 똑같은 하늘과  땅 사이에 
여전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커다란 변화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도래한 새 세상에 걸맞는 품격을 갖춰야  
했습니다. 지난날  고귀한  이들의  종교의 얼굴처럼 품위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가꿔야 했던 것입니다. 
   주후 325년 소아시아의 흑해  연변의 도시 니케아에서 교회회의가 소집
됩니다. 제국 각  지역에 있는 유명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곳으로 속속 
모여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많은 속설을 정리하고 하나의  신앙고백
문을 만듭니다. 그것은  품격을 갖추기 위한  다양한 견해들이 하나로  일
치하지 않았기에 서로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함이었고, 또 여전히  옛날처
럼 품위없는 주장을 일삼는 이들의 주장을 사교로 낙인찍기  위함이었습니
다. 오늘날 우리가 암송하는〈사도신조(경)〉는  바로 이 신앙고백문과 거
의  그대로 일치합니다. 〈사도신조(경)〉가  탄생한 것입니다.  수려하고 
심오한  논리로 이루어진 신앙고백문이 탄생한 것입니다. 
   로마 제국과 제국의 주류  교회는 이것만이 사도들의 계보를 잇는 정통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조의 얼굴은  그것
의 아름다운  문구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정통'에서   
이탈한 이들을 징책하고 처벌하는  경직된 근거였고, 이 신조에 입각한 정
통  신앙에 더욱 돈독해질수록   제국 교회의 얼굴은 더욱  잔인한 표정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탱하는  정결신조라는 경직된 종교를 비난
하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출
발한 종교는 어느새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신조를 위해서다'  그
리고 '이 신조는 확고부동한 대리석과  같은  것이니 그 적용은 지극히 엄
정해야 한다'는   정반대의 구호를 부르짖는 험상궂은   졸부의 품위 과시 
종교로 귀결해버렸습니다. 이제 졸부가 된 교회는 지난날의 아펐던 기억을 
애써 잊으려 합니다. 요컨대 이  신조는, 그  문구의 아름다움과 수려함에
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 탈출기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는 마지막 여정  중에 벌어진 일입니
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십자가 처형이라는 대수난이 닥치게 됩니다. 그
러나 제자들은  아무도 그것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메시
아의 예루살렘 행차'라는 사실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 시대의 
도래가 눈 앞에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꿈이 이루어질 것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얼마나 가슴조아리며 기다려   왔던 날인
가? 가족도, 조상의 전통도,  마을 동료들의 따뜻함도, 모두  포기하고 그
분을 따라나선 여정이 아닌가?  그동안 수많은 역경을 헤치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 왔던가? 이 모든 것이  오직 이 꿈 하나를 위해 감내한 것이 아
닌가? 이제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도다.' 
   제자들은 어느새 '미리  졸부 흉내내기'에 몰입돼 있습니다.  '그 나라
'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제일 큰  자는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서로 언쟁을 
벌입니다. 자신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서로 갈등을 벌이고, 
나머지들은 각기 줄서기 경쟁을 벌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그동안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먹이며 자신의 신앙을 자랑코자 
했을 것입니다. 또한  필시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랑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버렸고, 
그럴수록 배타적으로 되어 갔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속에서의 예수는  놀
랍고 대단하지만 다른 이들의 예수 체험은 보잘 것 없음을  밝히고 싶어합
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체험을 공격합니다. 더구나  예수를 따라다니
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그 나라'의 말석에나  앉을  것이요, 심지어는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도 못
하게 합니다. 만일   이것이 '미리  흉내내기'가 아니라 '실제상황'이었다
면, 그들이  자신의 배타성을 실천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
님이 그동안의 당신의 삶을   후회하고 저주할 만큼 비극적인 일이었을 것
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화를  내십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아이들'은 가장   무력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스스
로 판단하고 처신할 수 수  없도록 규정된 존재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힘
이 없는 존재였고, 실제로  판단력도 미숙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보호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그들은 힘의 논리에 
덜  익숙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 이로운지 판
단할 줄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해타산에만 집착하
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런  아이들의 것이다. 진정으로  말한다.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말의  외양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입으
로 들먹이는 언술  내용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변화와 꿈을 얘기하고  
해방을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하더라도, 
대리석같이 경직된   '신조'에 매여  있다면,  그것은  '그날'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처럼  행세한다 하더라도,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의 논리를 펼씔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모습입니다. 아니  그것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상상  속에서 가상의 폭력을 
휘둘러대는 자의 모습이고, 권력이 그의 손에 들어오는 날, 졸부의 품성을 
한껏 발휘하고 말 잔인한 폭군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가  아무
리 예수님에 관한 신앙을  이야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졸부의 '예수(로부
터의) 탈출기'일 뿐인 것입니다. ▣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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