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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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
날 짜 (Date): 1996년04월01일(월) 16시06분30초 KST
제 목(Title): [한백설교] 질주하는 시간, 동요하는 신앙


96년 3월 7일 설교

                    질주하는 시간, 동요하는 신앙

                               김진호 
                      준목/한백교회담임교역자

 요한복음 6장
  12그들이 배불리 먹고 나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일이 없
도록 남은 조각들을 모아들이시오" 하고  이르셨다. 13그래서 그들이 모아
들였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그 조각들로 열두 광주
리를 채우게 되었다. 14그러자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
을 아시고 당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

   이 이야기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이 배불리 
먹게 되었다는,  이른바 '오천명  급식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요한복음서
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파하던 사람들은  아
마도 이 급식  기적 이야기를 다른  무엇보다도  특별히 인상 깊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이것처럼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또 많은  변형체(變形體)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
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 각각에서, 그리고 그 변형체가 들어 있
는 본문 각각에서 조금씩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위치한 문맥마다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본문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문맥과도 별 상
관이 없는 듯이 나오는  매우 이색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
늘의 본문을 해석하는 데  많이 어려워합니다. 그만큼 해석의 내용도 가지
각색입니다. 여하튼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일치하는 관점이 있는데, 그것
은 이 이야기가 실제의  예수님와는 무관한, 후대의 창작에 기인한 것이라
는 점입니다. 그런데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의 예수
님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
맥과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굳이 본문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요. 게다가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서 모두에
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분위기가  이 본문에서도 암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좀 더 본문을 깊이 물어 봅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시달
리던 사람들이   얼마 안되는 음식으로  모두  배불리  먹게 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것은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물고기 몇 마리와  빵 
몇 개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배
고픔에 걸신들린, 식욕이 왕성한  사람들이 대다수일 텐데 말입니다. 그래
서 학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
도, 이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물리적인 변화만을 염두에 두면서 기적을  생
각하려고 합니다. 요컨대 그들이  생각하는  기적은 일종의 '마술'같은 것
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은 기적이야!'라고   말할 때, 그 속에는  
단지 산술적인 계산이나  물리적인 변화만이 시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
다. 가령, '라인강의 기적'같은 말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마술적인 현
상을 시사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말   속에서, 독일의 발전상, 
그들의 GNP의  놀라운 성장을 일종의 '역사의 마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놀라운 단결력을  칭
송하려는 함의가 더욱 깊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야!'라는 말은  
이렇게 단순히 마술같은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마찬가지로 '오병이어의   사건'을  사람들은 충분히 '이것은   기적이
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 이야기의 핵심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조각'이 늘어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부족한  가운
데서 굶주린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
음서는 그런 시각에서 보려는 경향이  더욱 농후합니다. 다른 복음서는 빵
과 생선을  소유한 이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파이다리온'이
라고 말합니다.  번역하면, '천민의 자식'이 가진  음식입니다. 모인 무리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
가 내 놓은 빵은 '보리빵'입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보
잘것 없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이 음식은 이  아이가 어디서 
훔쳐온 것인지도 모르고 혹은  구걸하다가 누군가가 베푼 횡재같은 것인지
도 모릅니다.  어쨌든, 보잘것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굶주림을 밥먹듯이 
해야하는 천민의  자식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무리는  종일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
다. 모두가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아같은 분,  갑자기 나타났다 갑
자기 사라지는 이 신출귀몰한 양반을 여기서 놓친다면 필경 '구원' 사건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함부로  떠날 수 없었을 겝니다. 간혹은  품
속에 넣어둔 음식거리가 있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그것을 꺼내서 혼자  
먹어치운다면 주변의  눈총을 한 눈에  받고, '못된 욕심장이'라는 비난을  
받을 게 분명합니다. 어쩌면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옆 사람의 테러를  당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구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욕
심장이로 드러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눠 먹기에는 턱 없
이  부족했고,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너무 적을 것이어서 차라리 좀 
더 '개겨보자'는 생각으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런 와중에서 가장 보잘것 없는  녀석이 자신의 가장 귀중한 먹거리를 내놓
습니다.  그것은 그에게는 전재산과도   같은 것이고, 나아가 생명과도 같
은 것인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의  상상을 해봅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급전됩니다. 한 사람씩  '꼬부쳐 둔' 먹거리를 내놓습니다. 개중
에는 아마도 사께오같은 부자의   회심사건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사께오가 이  대목에서 자신의  재산을  내놓겠다고 했다면, 그래서  마을
로 하인을 보내서  곡간을 열고 음식을 내 놓는다면, "오늘 이  집에 구원
이 이르렀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안성마춤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아무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기적'같
은 사건입니다. 그것은 '예수'라는, 메시아일지도 모르는 분이 나타나셨기
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비천한 아이의  자기비움의 '
맞장구'가 필요했습니다. 여하튼 이로  인해 정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
니다. 굶주린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예수 주변의 사람들로는 무엇보
다도  엄청난 기적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보다, 소경이 눈뜨게 된 일보다, 손  굽은 자가 손 펴진 것보다 더욱 엄
청난 것이고, 더욱 실감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접한 사람들은 흥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메시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가장 절박한 욕망을  충족
시켜 준 이가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  누가 메시아이겠습니까? 누군가가  
소리칩니다. '저 분은 메시아다!' 다른 곳에서 맞장구 소리가 들립니다. '
저분은 우리의 왕이시다!' 여기저기서  '우와'하는 환호성이 울립니다. 대
중은  일시에 마치 봉기라도 일으킬듯 흥분합니다. 열광에 휩싸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소리친다면,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분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갈듯한 기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중을 피
해서  홀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한 뒤 독일 대중은  그야말로  고난을 겪습니다. 
국토는 황폐해질대로 황페해져   있습니다.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됐고, 가
옥들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엄청난 전쟁배상금이 목을 조릅니다. 생필품의 
값은 오를대로 올라서, 인플레이션이 수천 페센트가 됩니다.  고난의 현실
입니다. 그때 히틀러라는 '메시아(?)'가  등장합니다. 그는 강력한 통치력
으로,  아니 그보다는 너무나도 매혹적인 호소력으로  절망에 떨어진 독일 
대중에게 외칩니다. 일시에 독일인은  하나로 똘똘 뭉칩니다. 세계적인 철
학자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기적'을  봅니다.  희망을 발견합니다. 메시아
를 확인한 것입니다. 온 독일인이 그를 받들어서 '통치자'로 삼습니다. 그
는 어느 왕 못지 않은 절대권력자로 부상합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통해  모든 것을 상실한 한민족은   남과 북에서 
각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궁핍을 체험했고, 절망에 휩싸여  버렸
습니다. 남과 북의 고난받는 대중은 메시아를 기대합니다. 이 궁핍을 채워
줄 이를 말입니다.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이를 말입니다. 모두가 이기
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람들  각자에게 자기 자신보다 민족을  
생각하게끔 이끌어줄   지도자를 갈망합니다. 메시아가   등장하는 시간은 
서로  조금 달랐지만, 양쪽의  대중은 그런 메시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왕  못지 않은 절대권력자를 따라   한 목소리로 희망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이 세 경우에서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대중의 절망적인 
고난의 현실이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
실은 좀처럼 희망이  올  것같지 않습니다.  절망의 벽은 너무나 견고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기적을 열망합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
뀌는 기적 말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베풀 메시아의 도래를 말입니다. '역
사의 해방을 향한 진보'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메시
아 기대를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그들을 민중이라 부르든, 프롤레타리아
트라 부르든 말입니다.  역사의  고난은 이들을 역사 변혁의 주체로  바꾸
는 동력이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이들에게  인식론적 특
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고난당하는 대
중의 '자기초월 사건'이라고 부르면서,  민중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를 
열렬히 찬양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민중의, 프롤페타리아트의 봉기는 많
은 역사의 해방적 진보를 이룩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든 세 가지 예에서 우리는 그와는 정반대의 현실도 봅니
다. 사실 이런  예는 이것들  외에도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일면 해방적 
가치를 가졌던 사건들 조차도 한편에서는   또 다른 비극의 불씨를 가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파괴적인 불꽃이 괴성을 지르며 폭발했습니다.  여기서 
고난당하는 자들의 일어섬은   결코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파시즘의 도래를 의미했습니다. 고문과   착취와 파괴와 전쟁 등, 모든 무
시무시한 용어들이 집약된   '카인의 후예들의 만행의 역사'가,  자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중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열광과 아울러져서 자행된  것입니다. 결국 역사적으로 그것은  거짓 기적
이었고, 거짓 희망이었으며, 거짓 메시아였음이 판명됐지만, 그것은 이 쓰
디쓴 악몽의 잔을 다 마셔버린 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의 체험만으로,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대증이   메시아니즘만으로 해방은, 메시아의 나라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더욱 불행한 오욕의  역사를 우리에게 
안겨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거짓 메시아들은 고난당하는 사람들  
개개인이 겪는 고난을 공동체 모두의 고난으로 인식하게 하는 비상한 능력
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대중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그  
속에 '우리'라는  공동체를 채워 넣을  수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여기까
지는 이 거짓 메시아들의  역할이 긍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거짓 메시아들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비우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다른 자신, 집단
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자신을 채워 넣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메시아로  
추켜세우는 이들로 묶인 집단을 말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욕망을  버린 것
이 아니라  더욱 욕망의 화신으로 돌변합니다.  해방이라는 표상적 가치는  
허울좋은 구호가 돼버렸고, 실상은  집단 속에 자기 자신의 욕망을 불어넣
은 것입니다. 고난의 시대는  '무수한  정신질환자'들을 양산합니다. 이들
의 광기는  소외된 광기입니다. 이들의 광기는 배척받는 광기입니다. 이들
의 광기는 분산되고 개인화된 광기일  뿐입니다. 거짓 메시아의 시대도  '
정신질환자'를 양산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광기는 소외된,  배척받는 
개별화된 광인들의 광기가 아니라, 집단화된  광기요,  집단 밖에 있는 자
들을 소외시키고 배척하는 광기입니다.  집단의 욕망을 위해서  집단 밖의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대는 광기입니다.  '나'의 자리는 비
워졌지만, 그곳에 '우리'라는 공동체가  들어섰고, 여기에  '타인'이 들어
설 자리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짓 메시아는  이런 사이비 해방을 
부르짓은  자들이었습니다. '나'든  '우리'든 자아에  대한 비판을 상실한 
열망,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해방의 열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비뚤어진 거짓  메시아에  현혹된 열망이요, 사이비 하느님나라에 대한 열
망일 뿐입니다. 
   최근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보컬그룹의  해체로 말미암은 우리 청소
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또 하나의 사이비 메시아니즘이라
는 씁슬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라 함은 우리  시대
에 대한 인식과 관련됩니다. 저는 최근 사태의 배후에는  '욕망 분출시대'
의 새로운 소외 현상 내지는 고난 현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의 세계를 특징짓자면,  저는 '시간 질주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봅
니다. 오늘날 시간   흐름의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빠르게 흐릅니
다. 물론 역사의 발전, 문명의  발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점차 가속화되
었습니다. 가령 교통과  통신  시설의 발달로 서울-부산간의 거리는  지속
적으로 축소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이 가속화의 그래프는  너
무나 급속해졌습니다. 지금까지의   시간과 관련된 가치규범을 뒤엎어놓을  
만치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현상을 수반합니
다. 하나는 시간의  질주와 맞물려  달릴 수  있는 새로운 특권층의 등장,  
혹은 특권층이 되기 위한 새로운 문법의 등장으로 특징지울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은 고도의  기술이나 자본을 갖춘 사람들에게  어느 때보다 유리한 
상황을 부여해 줍니다. 한편 또   다른 현상으로, 우리는 기존의 가치규범
의 와해를 들 수  있습니다. TV같은 너무나도 대중화된  온갖 매체를 통해
서  기존의  가치로는 얽어맬  수 없는 욕망이  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현상이 결합해서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그
것은  욕망분출로 인한 '무한경쟁 시대'의  도래라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의  사람들은 경쟁으로 인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게 되며, 특권층의 기
회를 어느  정도 박탈당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소외층이 형성되
며, 새로운  메시아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사랑타령에 몰입된 대중가요에  '비판', '문명비판
'이라는 요소를 개입시켰습니다. 이것은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입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만화같은   '낭만적인 사랑' 타령으로 일관된 
대중가요 속에서, 이런   대중가요의 주 고객인 욕망분출 시대에 소외층인  
청소년은 개별화됩니다. 개별화된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꿈만 꾸는  아이
들이되었습니다. 여기서 무한경쟁 시대의 문법에 멍들은 아이들은, 기성세
대의 눈에는 일종의 정신질환자들의  광기로만 비추어졌을 뿐입니다. 그런
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도입한  비판의 요소는 이런 개별화된 아이들의 파
헤쳐진 좌절감을 한데 모아들입니다.  아이들은 이들의 노래에서 기적처럼  
하나가 됩니다. 더 이상  개별화된, 분산된 '발렌타인 데이'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비판의  주체로 서려  합니다.  기성세대를 불신하고. 기성세대를 
비판합니다.  나아가 기성세대의 가치를 거스릅니다. 

   아이들은 사랑타령의  노예였던   자기를 부분적으로 버리고,  그 속에   
역사의 비판자인 '자신들'을 채워넣습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의
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이들은  하나의 노래꾼에 불과한 이들을  일종의 
신흥종교의 메시아로 추대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신흥종교의 비판의 시야에는 '우리들'이라는  눈
밖에는 없습니다. 타인의 눈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견고하게  나를  붙잡기 위해 우리를 추구합니다. 과거  어른
들의 전유물이었던 파시즘의 아류가 욕망분출 시대를 맞이해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 것입니다. 타자의  눈에서 본 자기 비판, 자기 성찰
을 상실한 비판의 논리만이 남고, 그것은 단순한 일탈과 파괴를 낳습니다.

   한 천민의 자식이  내 놓은 보리떡, 그 속에는  자기 욕망의 비움이 있
고, 배고픈 다른  이들을, 타인의  고통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
람들이 거짓 메시아니즘에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했습니
다. 사람들의  메시아 열기에  흥분해서 이에 맞장구치며,  메시아 장난을   
펼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비움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에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기를 비울  것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다른 
이를, 다른 이의 아픔을, 다른 이의 고통을 채울  것을 권고합니다. 그 속
에서야 비로소 메시아의  나라는 '가까이 왔다'는 외침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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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