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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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
날 짜 (Date): 1996년04월01일(월) 16시05분18초 KST
제 목(Title): [한백설교] '존재의 가벼움'과 감정이입


96년 2월 4일 설교

                   '존재의 가벼움'과 감정이입

                             김진호 
                       한백교회담임전도사

 고린도후서 4장
  10우리가 언제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
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11실상 살
아 있는 우리가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성서 읽기와 전도를  하도 많이 강조하는 모임이어서  우리의 사귐은 처음
부터,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한정된다기보다, 같은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동지'와도 같은 관계로 맺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동지/동역자'라
는 차원에서는 별로   적합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전도를 하기엔 그는  
너무나 자신에 대해  신중했고, 그의 이러한 자신에  대한 숙고의  결과는 
대체로 비관적이었습니다. 그가 수없이 던지는 질문의 요지는  '나는 누구
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는 커녕, 자기를 지탱하기도   벅차 했습니다. 그래서 동지로서 의
논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거의 언제나 뭔가 권고하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생
각을 자아내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는 경영학과엘 다니고 있었는데, 과 
친구들도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그는 폐쇄적인 생활을 했고, 성적도  형
편없었습니다. 2학년을  마칠 무렵  그의  인내력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세번이나 수강했던 회계학이라는  과목에서  또 다시 낙제의  위기에 몰리
자 그는  학교를 그만 두고자   했습니다. 여러번 설득한  끝에 그는 겨우  
기말시험을 치뤘고, 학기를 마치자 곧 바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저는 계속 
그 친구에게 편지와 책을 보내  주었는데, 그는 끝내 답장 한번 보내질 않
았습니다.
   얼마전, 졸업한 뒤   전혀 소식조차 몰랐던 그를   다시 만나게 됐습니
다. 그런데 그는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만사에  적
극적이고, 생각보다는 주장이 앞서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모 은행 
대리였는데, 지난해 고객 확보  성적이 자기 지점에서 최고였다고  자랑할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변하게 된 계기가 군에 있을 때 내가 보내준 책 때
문이었다고 합니다. 존 번연이라는  사람이  저술한《천로역정》이라는 책
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돌어가기까지   겪게되는 온갖 역정을   상징적으로 그린 소설입니
다.  제 친구는 십여년 전에  읽었던  이 책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거듭 삶의 방향을 되찾는다고 합니다. 

   이 친구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과거에   읽었던 어떤 책
이, 혹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 연극 따위가 두고두고 삶에  영향을 미쳤던 
경험이 있습니까?  이 친구와  같이 삶의  중대한 계기는 아니었을지라도,  
필시 이런 류의 경험을 꽤  많이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이런 깊은 감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
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제 친구는《천로역정》의 주인공 '
크리스찬'에게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가는 여정은 자신의 여정처럼 
느껴졌고, 그의 시행착오, 그의 욕망,  그의 불신은 곧  자신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그의  시련은  이 친구가 
힘겹게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뇌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가슴이 꽉  
막히는 듯 합니다.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숨도  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쾌락이었습니다. 그것은 감동이었습니다. 
그것은 희열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삶의 좌표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이릅
니다.
   이런 식의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을 우리는 '감정이입'이라고  말합니
다. '내'가 책 속의 주인공에 투사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는 책을 읽
는 사람이었고 책은  '나'에게 읽혀지는 대상이었는데,  어느덧 '나'와 책
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닙니다.  '나'는 책  속에 들어가 있고, 책은 
'나'의 삶을 이끌어 가는 세계가   됩니다. '나'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
라   책이라는 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이입된 '나'는   
책의 메시지로부터  인생의 이정표를  얻습니다. 갈등 속의  존재인 '나',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나', 그러나 이제 
'나'는 이런 '나'가  아닙니다. '나'는 혼돈에 빠진  존재가 아니라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주체로서 확고히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본질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얻는 
가장 일반적인 과정은 '나  아닌 다른 이/것'와의 '차이'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른  이/것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 '나'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름짓기'는 기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느님이 지어주
신  온갖 피조물을 보면서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바로 아담
의 '자아발견'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입
니다. '신은 누구인가/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
음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서 차이
를 느낄  수 있는 모든 대상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나'라는 주체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충분히 얻을 수 없음을 느낍니다. 그렇게 인식된 내가 불만스
럽습니다. 더 나아지고 싶고, 그런 자신을 확인하고 싶으며, 그렇게  인정
받고 싶습니다. 욕망이 자리잡은 것입니다.  아담은 다른 피조물보다 우위
에 있는 자신이   되고 싶었고,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신과 
같아지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인간의  근원적인 죄라고 말합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서 죄가 우리에게 들어왔"다고 말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제물이 동생 아벨의 제물보다  못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힙
니다. 필시  이것은 착각이었을  겝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제살해라는 극
단적이고 절망적인   폭력행위를 낳습니다.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인식, 
내가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갖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인
간은 계속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
에 대해서 가장 효과적인  답을 얻는 방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감정이
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나'를  투사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는 이런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무수한  기재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가는 과
정이기도 합니다. 특히  예술은 이  점에서  탁월한 인간의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소설을 읽으면서, 연극이나 영
화를  보면서 나를 발견합니다. 그림이 응시하는 것은 화가의 눈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의 눈이 되었고,  슬픈  음악의 분위기는 나의 실재 상황
과는 관계   없이 '나'를 슬픈 존재로 만듭니다.  연극이나  영화, 소설의 
주인공은 더 이상  연출가나 감독, 작가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읽는  '나'의 삶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자기 물음의 역사는  감
정이입의 역사라고, 다소  과장스레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둠(DOOM)이라는 이름의 게임이 
있습니다. '파멸, 신의  심판'  등, 무시무시한 뜻을 이름으로  하는 게임
입니다. 제목만 으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내용은 한술 더  뜹니다. 모
니터에는 몸은 보이질 않고 양손에 총을 든 그림이  그래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키보드의 방향키를 옮기면 총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화면이 방향키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요컨대  총을 든  존재는  게임을 하는 사람 자신이 
되고, 모니터에 보이는  저편의  장면은 게임을  하는 사람의 시야가 됩니
다.  저편에서 적이 나타나면  그를 향해 총을 쏘아댑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부상당하거나 죽습니다. 어떤 적은 한 방에 죽지 않고 여러번 쏴야
만 죽습니다. 총알을 맞을 때마다   피가 튀어나오고 괴성이 들립니다. 사
실은 총에  맞을 때만이 아니라   적이 저편에 있을 때도  어떤 소리가 들
립니다. 그   소리를 통해 적이 있음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동물 소리같기도 하고 괴물  소리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혐오스럽고 살기
를 느끼게 하는 그런  소립니다. 그런 적을 많이  죽일면 보너스가 생깁니
다. 권총이 기관총이 되기도 하고, 나아가 고성능  다연발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물론 많이 죽일수록 점수도  높아집니다.  신기록을 쫓기 위해 적
을 죽이는 살인마처럼  행동하고 있음에도, 게임자는 적이 죽는 것은 혐오
스런 대상이 죽는 것이요, 그러므로 그를 죽이는 '나'는 정의의 사도요 영
웅이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콤퓨터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거의 안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게임의   하나입니다. 게임은 게임자로 
하여금 그 상황에  감정이입되도록 합니다.  현실에서 죽고 죽이는 상황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전쟁은 죽은  사람들만 아니라 산 사람에게도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어떤 경우엔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데 게임이 설정한 상황은  현실가는 달리 매우 단순합니다. '나'가 있고 '
타자'가 있습니다. '타자'는 언제나 '적'입니다. 그는 괴물같은  존재입니
다. 그를 죽여야  정의로와질 것같은 그런 혐오스런  대상입니다.  죽이는 
것은 양심에 아무런 손상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많이  죽일수록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요컨대 콤퓨터 게임이 설정하는 상황은 현실을 단순
화합니다. 그 단순함은  선악으로  양분됩니다. '나'는  정의의 사도요, '
적'은  악의 화신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한 상황 속에 게임을  하는 '
나'는 콤퓨터 게임의 '나'와   동일시됩니다. 잠시도 한눈 팔면 내가 당하
는 그런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손해고, 게임이 요구하는 
단순한  논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는 그런 상황 속으로 내가 감
정이입되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입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우리의 문명은 '존재의 가벼움/단순함'과 '감정이입'을 더욱 파괴적
인 모습으로 결합해 가고  있습니다. 단순해질 것을 강요하는 속도감 때문
에  나의 '감정이입'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지 어떨지도 생각치  못한 
채, 행동하게 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몇 사람만이  폭력의 주체
요 권력의 주체인 그런 세상은  이젠 하나의 전설이요 낭만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우리 모두가 폭력의  주체요 권력의 추구자가 되어버렸고, 나  아
닌 모두를  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폭력으로, 
권력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는 전설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 바울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았습
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를  넘어서는 진리였음을 저는 오늘 다시금  확
신하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바울의 놀라운  예지력을  칭송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메시지가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하면서 바울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
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죽이고  있다고.' 그의 이 말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치열한 물음을   부단없이 던진 결과였습니다. 그는 
누구에 못지않게 율법에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
칠  각오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비추인 세계는  '의와 불의
'의 세계였습니다. 세계 만물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 각각을 그 이름으
로  부르는 다정스런, 어떻게  보면  목가정인 분위기를 풍기는 에덴과 같
은 세계는  분명 바울의  눈에 비추인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옳았
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어린이같은 이를  가르치는 '몽학선생'과 
같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세계를, 인간을  그 기반에서 파악하게 하는 기
초적인 인식을  율법은 주었던   것입니다. 세계나 인간을  턱없이 아름답
게만 말하고  싶어하는 서정시인들의 어투와는 전혀 다른 인식을  그는 율
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더 나아가  율법에서 '의와 불의'의 세계에서 불의와 싸우
는 의의 수호신인  자기  자신과 타자를  구분합니다. 이런 그에게 불의의  
화신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는 무슨 일이든 할 준
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죄명으로 무수한 여성을 학살했던  중세
교회처럼 말입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이념
의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갖가지   이유로 무수한 살상과 겁탈과 강도짓을 
서슴치  않았던 카인의 후예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는 과정에서, '죄인
'인 타자를 발견한 것뿐 아니라,  죄인인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의의 수호신이 아니라, 영웅이  아니라, 질그릇같이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른 이와  아무런 의라는 차원에서 별차이 없는 인간임
을  그는 발견한 것입니다. 그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가벼
움으로 특징지워지는, 앞만 향해  달려가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들과는 달
리, 부단한 무겁기 짝이없는 질문의 여정은 '자신에 대한 성찰'에  도달하
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자기도살'은 수동적 인간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
도 할 수 없는 인간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신과 결합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신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분은  자기 거룩성을 주장하면서, 죄인을  심판하
려 했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의   존재입니다. 그 신은 자신의 거룩성을 포
기한  신입니다. 자신을 경멸한 신입니다. 자신을 죽인 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늘  죽임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신인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육신 속에서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
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부단한 물음에  대한 바로  이런 대답 속에
서, 이런 성찰  속에서 바울은  수동적 인간이  아니라 죽기까지  '평화의 
사도'로서 살아가는 신앙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짻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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