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201.tnt4.se> 날 짜 (Date): 2000년 10월 9일 월요일 오전 10시 54분 50초 제 목(Title): 진중권/ 철학으로 본 동성애 철학으로 본 동성애 "그로써 내 자신을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하고 인류를 능멸하게 된 다." (임마누엘 칸트 <도덕철학강의>) 작년 가을 동국대학 경주캠퍼스 철학과에서 개최한 학술제에 초청받아 경주에 내려간 적이 있다. 학술제가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 곳에서 마침 술자리 앞에 앉은 순진하고 우직해 보이는 한 학생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학생은 박정희가 없었으면 한국의 경제발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요즘 범람하는 속류 민족주의 계열의 소설들이 민족자존심을 세워주는 정통 민족문학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좀 단순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솔직한 이 학생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화제가 '동성애' 문제에까지 미쳤다. '동성애가 부도덕하다'는 주장은 윤리학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다고 했더니, 저윽이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런 얘기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색을 하며 반박을 한다. 하긴 2백년 전에는 위대한 철학자라도 보수적인 영남 땅에서 자란 이 젊은 철학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철학자 칸트는 계몽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 유명한 <3비판서>와 그 밖의 저술활동으로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려 했던 이 탁월한 철학자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 눈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고 과격하다. "여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성욕을 충족시킨다면, 이는 인류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욕에 관련하여 인류의 목적은 종의 보존에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나는 종을 보존할 수 없다 (...) 따라서 나는 그로써 나 자신을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하고 인류를 능멸하게 된다. 칸트의 이 논증과 이 과격한 단죄는 2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볼 기회가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 철학도가 내 앞에서 동성애의 부도덕성을 입증하기 위해 들었던 논거도 바로 이것이었다. 즉 성은 원래 종의 보존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종의 보존에 기여하지 않는 성애는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이 논증의 바탕에는 동성애란 자연의 질서에 벗어난 것, 그리하여 종의 보존에 역행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따른다. 종의 보존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성행위를 부도덕하다고 단죄할 경우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지에 도덕적 파렴치한이 되기 때문이 다. 가령 종의 보존이라는 성스런 사명을 져버리고 혼자 살기를 거부하는 독신주의자들, 결혼을 해서도 아기를 갖지 않는 사람들, 예비군 훈련 면제받기 위해 훈련장에서 엠뷸런스를 타고 정관수술 받으러 간 어제의 용사들, 루프를 한 기혼여성들, 무정자증인 주제에 감히 성교를 하는 분들, 애인과 여관에 가서 자면서 기껏 콘돔을 끼는 죄없는 젊은이들이 졸지에 부도덕한 사람이 되어버리게 된다. 왜? 이런 성교는 종의 보존에 기여하지 못하는 성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콘돔의 사용을 금하고, 주기법을 이용한 피임을 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죄를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좀스럽게 날짜나 따져가며 성행위를 하는 것도 의식적으로 종의 보존이라는 사명을 져버리는 부도덕한 행위이 기 때문이다. 아니, 문제는 더 심각하다. 왜? 카톨릭 교회에 복무하는 신부님, 수녀님, 수사님들 역시 종의 보존의 사명을 거부한 부도덕한 분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이 는 불합리한 생각이다. 그 반면 정확하게 발정기 때에만 교미를 하는 동물들의 행위는 졸지에 도덕적인 것이 되어버려야 하는데, 이 역시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현저히 위배되는 것이 다. * "그것은 어쨌든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성애의 형이상학>) 한때 동성애는 순수한 도덕적 문제, 즉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도덕적 일탈로 여겨졌다.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을 우리는 함부로 죄인이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의 경험은 그게 의지로써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 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오면 동성애는 더 이상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병리현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언젠가 베를린 예술아카데미에서 열린 <동성애 운동 100년전> 에 갔다가 1960년대에 미국의 의사들이 개발해낸 '동성애 치료기'를 본 적이 있다. 네모난 바테리 상자에 음극과 양극으로 연결된 집게가 달린 물건으로, 그 작동의 원리는 간단했다. 전기충격으로 동성애병(?)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이 치료기구이지 사실상 전기고문기구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미련한 생각 때문에 억울하 게 이 도구로 고문을 받았을까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도덕적 담론에서 임상의학적 담론으로. 한 마디로 동성애자를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감시하고 관리하는 권력한 신학에서 임상의학으로, 성직자에서 의사로 교체된 것이다. 동성애를 파 악하는 이 담론의 변화에서 미셸 푸꼬라면 동성애자들을 둘러싼 지식권력의 변천을 보았을 것이다. 어쨌든 동성애가 도덕적 일탈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자연적 성향의 문제라는 것은 이미 쇼펜하우어가 살던 시절에도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그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이 죄악이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공공연히, 빈번하게 저질러졌음을 본다. 그것이 모든 곳에 두루 퍼져 있다는 것과 근절하기 매우 힘들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자연(=본성)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그는 동성애라는 것이 "자연"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그것을 "죄악"이라 부르며 거기에 "역겨움"을 표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종의 보존을 위한 자연적 인 성행위에 왜 동성애라는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일탈(?)이 존재한다는 것은 "파라독스"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이것이 상당히 "풀기에 어려운 문제"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 비밀을 발 견했다고 말한다. 그가 비밀이란 이런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의 정자는 힘이 약해 성행위를 하더라도 허약한 후손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자연이 이런 자를 도태시키기 위해 "54세 이상"의 남자에게서는 가끔 이성과의 성교를 금하게 하고, 이것이 자연스레 동성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냐하면 동성애는 "54세" 이상만이 아 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난점을 그는 이렇게 피해간다. 즉 젊은이들 중에도 종종 "힘이 약한 정자"를 가진 자들이 있어,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자연은 이들이 이성과 성교하는 것을 금하고, 이로써 이들도 동성애라는 일탈 행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왜 자연에서 자연적인 방식으로 동성애가 발생하는지는 설명했을지는 모르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즉 동성애가 자연적인 현상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도덕적 책임을 물 을 수 있단 말인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에 수재 유발의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처럼 윤리학적으로 자연현상에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한 마디로 넌센스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동성애를 "죄악"이라 부르며 거기에 커다란 "역겨움"을 표한다. 무슨 근거로? 동성애가 자유의지의 문제가 아닌 자연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고 또 자연에서 자연적 일탈이 발생하는 파라독스를 해결했다는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성애를 단죄하는 논거는 칸트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동성애는 종의 보존이라는 "자연의 목적"에 복 무하지 않으므로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앞에서 본 것처럼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게다가 만약 그의 말대로 동성애가 튼튼한 종자를 퍼뜨리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 을 한다면, 그것은 곧 자연의 목적의 부합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에는 아무런 윤리학적 근거도 없다. 동성 간의 성교는,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에 기초한 것 인 한, 이성 간의 성교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도덕적 하자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며 "사랑" 없는 섹스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리버럴한 분이 있다면, 그 를 위해 나는 위의 말을 기꺼이 수정해 줄 용의가 있다. '동성 간의 성교는,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면, 이성 간의 성교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도덕적 하자도 없다.' *** 글을 쓰다 말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거실로 나가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장에서 태어나 목사와 결혼하여 사별한 후 이제는 권사님이신 우리 어머니는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 어머니도 보통 보수적인 사람들처럼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근데 예상 밖으로 cool한 대답이 나온다. "어머니는 여자가 여자와 자고, 남자가 남자와 자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동성연애 말야?" "예. 근데 '동성연애'가 아니라 '동성애'라 불러야 한대요." "남자끼리 자고, 여자끼리 자는 게 뭐가 문제야? 자기들끼리 좋아하겠다는데..." 내 추측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미디어의 덕일까? 요즘 나이 드신 분들,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세련돼졌다. 동성애라고 무조건 배척하시지 않는다. 이렇게 경탄을 하다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약성서에서 분명히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어머니는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서 "일점 일획 도 틀리지 않는다"고 믿으시지 않는가. 그래서 재차 묻는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같이 잠을 자는 데 아무 문제 없어요?" "그게 뭐가 문제야? 둘이서 잠만 자겠다는데...." "잠만 자는 게 아니라 성행위를 하잖아요." "뭐? 그 짓을 해?" "예. 어떻게 생각해요?" "미친 놈들이지. 그 짓을 하게. 그게 인간이 할 짓이냐? 하나님이 남녀 짝 지어 주셨는데...." 여기까지가 어머니의 진보성의 한계다. 즉 동성의 남녀가 자기들끼리 만나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하고, 심지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자는 '동성연애'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이불 속에서 성행위까지 하는 '동성애'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시다. 슬쩍 장난기가 돌아 짖궂은 질문을 한다. "그런데 요즘 그런 '미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럼 사회가 망하지." "그런데 사회가 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어떡하죠?" "잡아넣으면 되지." "아, 그래요. 근데 정말로 동성애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이 있어요. 누군지 아세요?" "몰라." "히틀러라고.... 유태인들 가슴에 노란 별을, 동성애자들 가슴에 장미빛 딱지를 붙여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딴 건 몰라도 그건 잘했네. 성경말씀엔 돌로 쳐죽이라고 했어." "그래서 정말로 가스실에 집어넣어 다 죽여버렸대요. 잘한 짓이죠? 다른 건 몰라도 그 짓만큼은 하나님께 상을 받겠죠. 그쵸?""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인권의 사각지대가 바로 우리 집 안에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 무오류상을 굳게 믿으시는 성경에는 실제로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아마 동성애는 당시에도 행해졌던 모양이다. 구약성서 <레위기>는 모세(=하나님?)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과한 율법서로 성에 관해서도 상당히 자세한 금지규정을 담고 있다. 아득한 고대의 율법이라 금지 에 따르는 처벌의 강도 역시 매우 강해서 간통, 근친상간, 수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월경 중의 성교까지도 사형으로 다스리고 있다. 동성애에 관련된 부분은 두 군데인데, 그 중 첫 번 째는 19장에, 두 번째는 20장에 나온다.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서양의 기독교 문명에서 바로 이 구절이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으로 차별을 신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득한 과거만의 일이 아니다. 바로 최근에 미 국의 카톨릭 대회 대표자 회의에서도 동성애를 "본질적이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적설정(=출산)이 결여된 행위"로 규정하며 "동성애의 행위는 내재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결코 허용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의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의 카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이 논증이 윤리학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이 논리를 계속 주장하는 데에는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전의 권위, 즉 교회측으로서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경의 무오류를 수호해야 하 니까. 나는 동성애를 단죄하는 신학자들이 이것 외에 어떤 다른 논증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내 주장에 이견을 가진 분들은 반론을 해주시기 바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옳다고 믿는 그들의 신념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다른 방식으로 문제제를 하고 싶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성경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해 석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교회의 권력은 곧 성경을 해석할 독점적 권한이었다. 만약 신학자들이 레위기가 씌여진 시대와 이 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상황의 차이와 해석학적 지 평의 차이를 무시하고, 글자그대로의 축어적 해석을 고집한다면, 이 세상은 정말 끔찍한 곳으로 될 것이다. 레위기를 그대로 인용한다.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누구든지 경도 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레위기 20: 9-18) 만약 이 말씀을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준행한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다. 하지만 교회측에서 이런 사태를 원할 리는 없을 게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의 기독교회에서 내세우는 교리는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아무 근거 없이 동성애를 단죄하기보다는 차라리 성경을 이 시대에 맞게 다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물론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든, 시대에 맞게 해석해서 믿든,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니, 그 믿음에 간섭하는 것은 타인의 신념의 자유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가 있다. 하지만 기독교도라는 일군의 집단이 과연 다른 인간 집단을 도적적으로 단죄하여 차별해도 되는 것일까? 동성애를 바라보는 교회의 이 경직된 시각이 가끔 불행한 사태를 낳기도 한다. 말하자면 가정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청소년들 중에서 교회의 가르침과 자신의 성적 취향의 괴리를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 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이 아이들의 죽음은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본인의 책임일까? 아니면 성경에 대한 축어적 해석을 고집하는 아둔한 신학자들의 책임일까? 이제 대부분의 나라에서, 적어도 시민사회의 공론의 영역에서 더 이상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악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신구교를 막론하고 아직도 교회에서는 동 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아득한 고대 부족국가 시절에 씌여진 법률의 효력을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고집하는 데에서 오는 편견이다. 하지만 과연 이 견 해를 동성애가 악이라 믿는 종교인들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이는 종교인들의 자유일 수가 있다. 즉 동성애에 대해 어떤 공식적 견해를 표명하든, 신념의 자유는 보 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누가 감히 이 종교의 자유(?)에 시비를 걸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한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신념은 동료인간 중 특정한 집단을 아무 이유 없이 차별하는 반인륜적인 생각이다. 종교가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교회가 동성애자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는 그들을 비판할 수 있고, 그들에게 그 생각을 버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 종교인들은 '동성애'를 단죄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 굳게 믿고 있고, 신앙이란 논리적 설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녀가 잉태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고 사람이 물위를 걷고 심지어 산채로 하늘로 올라갈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도대체 무슨 논리로 설득할 수 있단 말 인가. 종교는 어차피 논리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이는 몇몇 광신도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유구한 전통과 역사,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교회라는 초거대 조직의 공식적 입장이 아닌가. 그러니 이를 간단히 '광신'으로 매도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 집단의 인간들이 다른 집단의 인간을 차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더욱이 이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성애를 차별하는 법률이나 제도는 위헌으로 간 주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동성애자를 사탄의 자식으로 규정하여 차별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한 위헌적 발상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국가와 교회는 정면 으로 충돌하게 된다. 실제로 1993년 독일의 헌법재판소는 "(교회의) 성에 관한 교리는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에 위배되며, 그로써 기본권보장의 핵심적 인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동성애자는 사탄의 자식인가? 신은 동성애자는 사랑하지 않는가? 최근 기독교의 일각에서는 기독교인이며서 동시에 동성애의 성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의 품에 끌어안으려 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작년 독일에 있을 때 어느 교회에서 열린 어느 북구 사진작가의 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신성한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예배당 안에 건물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전통적인 성화의 모티브에 따라 연출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가령 결혼생활을 하는 동성애자가 양자를 얻어 기뻐하는 장면에는 전통적인 성화의 예수탄생의 모티브, 에이즈로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피에타의 모 티브가 교차되고 있었다. 전시회 한쪽 켠에는 이 전시회를 개최한 담임목사의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읽어보니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 개최한 전시회라 는 한다. 하긴 누가 신에게 다가가려는 사람들을 내칠 권리가 있단 말인가. 전시된 사진 아래에는 각각 그에 적합한 성경구절이 붙어 있었다. 거기엔 아이들이 예수에게 몰려오는 것 을 막던 제자들을 만류하면서 예수가 했던 말도 끼어 있었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