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0년 9월 15일 금요일 오전 01시 04분 10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태양의 제국 2000년 9월 10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태양의 제국 김 진 호 때 : 통일염원 56년 칠백 여든번째 예배에서(2000.9.10) 본문 : 창세기 1장 26절~28절/ 곳 : 한백교회당 창세기 1장 26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 하시고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2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공동번역 성서] 정호진 목사님이 들려주는 농부 이야기는 항상 감동적입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는 소식은 그 이야기가 대개 성공담이라기보다는 실패담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 속에서 전해지는 삶의 성찰들은 더욱 깊은 경외감을 줍니다. 과거 도회지에서 변두리를 배회하던 '얼치기 지식인'이었던 것처럼, 10년간의 농사꾼 살이로도 부족해서 아직도 '얼치기 농부'의 티를 벗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두 세계 사이의 가느다란 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어릿광대를 연상케 합니다. 그만큼 그의 시간들은 치열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그 치열함 속에서 얻은 성찰들은 전율스러운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창세기의 오늘 본문을 소재로 하여 쓴 한 글([땅은 우리네 생명의 터전])도 나의 기대를 어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목사님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태어난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하느님의 위탁명령에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농부로서 자신의 심고 가꾼 나무와 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기쁨이 차 오르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 속에는 그의 노동이 들어 있고, 그 노동 속에는 숱한 실패담이, 실패를 넘어서기 위한 그의 치열한 삶이 새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마음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마다 '너무나 기뻤다'는 성서 표현을 실감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것처럼, 그에게도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그 남녀가 하느님을 닮은 것처럼 이 아이들도 자신을 닮은 것에 그는 신기해하면서 또 한 없는 기쁨에 사로잡힙니다. 너무 소중한 아이들, 너무 사랑스런 아이들, 이들은 그의 분신이요 삶의 의미요 존재 자체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의 소중한 땀방울이 자라고 있는 밭에 나가길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생명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 땅은 소유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성서 본문을 향해 도전장을 내밉니다. 그의 탐구 방식은 히브리 성서가 표현하는 말이 우리가 읽는 것과 과연 일치하는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이 히브리 어휘들은 '정복하다, 지배하다' 등의 의미와 함께, '봉사하다, 돌봐주다' 등의 의미도 갖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을 내립니다. 문제는 성서 번역자들에게 있었다고.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문명사적 관심에 따라 이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 자연을 '정복/지배하라는 하느님의 위탁명령을 우리는 성서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식의 탐구는, 형식상으로만 보면, 지나치게 문제를 단순화시킨 결과입니다. 만약 도회지의 지식인이, 단지 구약학 박사이자 목사로서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해석했더라면, 그 도를 넘어선 아마추어적 단순성에 많은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식과 체험의 칼날 같은 접경을 달리는 치열한 삶의 성찰을 엿본 자라면, 그의 단순한 성서 읽기는 오히려 지식 체계라는 복잡한 외모의 유령에 휘둘려 있는 '먹물'의 가슴을 요동하게 합니다. 저는 마치 효능 있는 술사의 주문에 걸려든 사람처럼, 그의 글을 읽으면서 지식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을 곧추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 언어의 모체인 도회지로 상징되는 근대적 문명, 그 자본제적 이성주의의 복잡성의 미학에 대한 근원적 문제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농사꾼인 정 목사님과는 달리, 주로 대도시에 위치한 대교회의 몇몇 목사들은 자신을 닮은 소중한 '아들'에게 교회를 정복하고 지배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른바 '목사직 세습'이라는 군주제적 상상력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화요일엔, 그것을 문제삼던 단체들이 주도한 포럼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군주-목사를 신봉하던 열혈 십자군이 단상을 점거해 버린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 군주제적 상상력은 일부 목사들만의 소망만은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백성 없는 군주가 없듯이, 군주-목사는 자신들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무수한 백성-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세습'이라는 황당한 의제만 아니라면, 목사직이라는 '성역'에 기꺼이 경의를 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 반대의 소리가 나오는 게 이상한 형국이라고 하는 게 적절한 지적일 겁니다. 사실 교회를 매개로 하는 이러한 공모는 신앙의 이상한 형태와 맞물려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신앙이란 이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과민한 자폐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전도는 타인을 교회적 인간으로 복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성서 읽기는 이질적인 것을 배타시하고 심지어는 그 대상을 정복하거나 아니면 몰살시켜야 한다는 공격성을 내면화시키는 의례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패를 모르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지지 않는 '태양의 제국'이라는 신화의 역사입니다. 끝없는 생성만을 추구하는 역사,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는 역사, 이른바 끝없는 진보만의 역사라는 신화 말입니다. 한데, 이것은 교회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특히 서양이 추동해 온 근대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정복의 역사요 지배의 역사였습니다. 실패를 모르는 전진만을 욕망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바로 '복제'라는 문명적 능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복제란 닮은 것에 대한 추구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복제로 말미암아 닮은 것을 향한 욕망이 한결 부추겨집니다. 그리하여 대량복제의 시대를 맞이한 근대는 닮은 것, 획일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절정에 이른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국가니 민족이니 인종이니 계층의식이니 하는 것들은 닮음에 대한 욕망의 결과들이고, 이것은 이질적인 것들을 향한 대대적인 제거의 전쟁을 야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승자에 의해 항상 짜여졌고, 그것은 승자를 정당화하는 역사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실패를 모르는 역사가 기술될 수밖에 없으며, 진보를 향한 욕망만이 되새김질 되는 문명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원리에 의해 전개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수많은 동서양의 사상가들이 그려냈던 것처럼, 순환의 원환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지를 향한 끝없는 여정 같은 게 아닙니다. '순환/반복'이라는 말은 자연의 역사가 진보를 향해 달음질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천막시대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건축물로 상징되는 대교회를 구축하기까지 그 진보의 역사를 추동해 온, 승리를 향해 매진을 거듭한 군주-목사는 아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상속하고, 그것을 다스릴 것을 전수시키고자 합니다. 그는, 창세기의 위탁명령이 바로 자신들을 위한 것처럼, 그 의미를 장악합니다. 지지 않는 태양의 제국을 건설하고 지배하라는 식으로... 반면, 자연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한 농부 목사는 경험 속에서 자녀들에게 말해야 하는 아비의 말이, 말할 수밖에 없는 아비의 진실이라는 게, 자연 세계를 돌보아주고 삶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의 위탁명령에 대한 상투적인 이해를 되짚어 보아야 했습니다. 농부 목사가 실패를 거듭하면서 얻은 작은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이 농부 목사가 발견한 지혜는 달의 여신이 선포하는 담론이기도 합니다. 초승달로 태어났다가 반달이 되고 기어이는 만월이 되는,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다시 반달로 쇠하고 그믐달이 되어 마침내 사라져버리는 과정, 그러나 바로 그 망(亡)은 환생을 부릅니다. 달은 사라짐이 없는 한, 새로 시작하지 않습니다.'지지 않는 태양'과 같은 신화는 달에게선 나올 수 없습니다. 달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환생이라는 끝없는 순환의 담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이 대표하는 창조성, 그 생명성이란 지배와 정복의 담론과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목적론적인 진보주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순환하는 것이며, 죽음과 탄생을 거듭하는,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담론인 것입니다. 만월은 태어남과 성장의 절정입니다. 동시에 만월은 죽음을 준비하는 출발점입니다. 만월을 기리는, 그 다산적 생명성을 기리는 절기인 추석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관한, 그에 대한 교회적 해석에 관한 근원적인 되물음을 성찰하게 합니다. 한 농부 목사의 깨달음에 도회지의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인 것입니다. ♣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