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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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0년 9월 15일 금요일 오전 01시 05분 35초
제 목(Title): [윗 글의 참고글] 땅은 우리네 생명의 터전


땅은 우리네 생명의 터전
         
정호진
농부목사, 경남합천 생명누리공동체 대표
※ 이 글은 {시대와 민중신학} 제6호(2000;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엮음)에 
수록된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1,11~12(개역 성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 창세1,26~28(공동번역 성서)


농부가 되고 나서 다시 보는 성서

농부가 되고 난 이후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본문이 창세기 1장이다. 농사를 짓기 
전에는 어찌 그리 별 관심도 없이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밤낮도 없이 광명한 
세상처럼 보여졌던 도시에 살던 시절에는 짙게 드리워진 어둠이 주는 포근함이나 
어둠 속에서 더욱 잘 느껴지는 하느님의 기운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밝게 빛나는 
광명의 아름다움도 별로 느껴보지 못했고 땅 위에 돋아나는 것들이 무엇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농부가 되고부터는 땅에서 돋아나는 작은 잡초 하나가 
예사롭지 않았고 계절이나 자연의 변화에도 민감할 뿐 아니라 벌을 키우면서부터는 
이른봄부터 늦가을까지 피어나는 이름 모를 들꽃에도 모두 관심이 가는 
삶이되었다. 그러면서 성서를 새롭게 읽어가다 보니 창세기 1장은 정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농부의 눈으로 본문을 읽어가다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제일 먼저 걸리는 부분이 
바로 11절이다. 하느님이 땅을 만드시고 그 땅 위에 돋아나게 하신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들을 번역하는 이들이 전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로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번역이란 그 삶이나 정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해야지 단순히 문자에 얽매이면 이렇게되고 만다는 전형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개역'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맺는 과목'으로 
번역을 하고, '공동번역'은 '푸른 움과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로 번역했고, '새번역'은 '푸른 움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 
맺는 나무'로 번역을 했다. 대체로 문자에만 얽매여 어렵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각기 다른 번역을 참고해가며 번역을 달리 해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나 농부의 눈으로 다시 보면 농부가 돌보고 관리해야 할 일반적인 작목 세 
가지는 대체로 '푸른 채소(푸른 움)와 곡식(낟알을 내는 곡식)과 과일나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많은 풀과 나무들도 
있지만 사람에게 돌보고 관리하기를 요청하는 부분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위의 세 가지 작물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거름의 중요성

농사의 경험이 10년째로 접어드는 동안 생명력이 있는 살아 있는 땅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거름이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경험이 많았다. 농사를 갓 
시작했던 92년 늦봄에 잡초가 잔뜩 돋아나 있는 밭을 괭이로 일구어 이랑을 만들고 
시장에서 사온 여름무우와 배추, 그리고 알타리무우 씨를 넣었다. 모두해서 한 
스무 평 정도 되는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물론이요 몇몇 
이웃들에게도 무공해 무우 배추를 나눠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땀을 
흘렸다. 씨를 넣은 지 며칠이 지나자 파아란 싹이 돋고 잎이 나오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며칠이 멀다하고 자주 가서 풀도 뽑아 주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이놈들이 싱싱하고 힘있게 자라주질 않는 것이었다. 어떤 
이랑의 것들은 올라온 지 한 열흘쯤 지난 뒤에는 아예 말라 죽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유난히 몇 군데의 것들만이 정말 검은 빛을 띠며 활기차게 자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한결같이 이른봄에 과수 묘목들을 심으며 거름을 
잔뜩 주었던 주변에서 그 거름기를 빨아먹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크기를 
비교해보니 자그마치 5~10배 정도는 차이가 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늦었지만 
부랴부랴 이랑마다에 웃거름을 넣어주고 흙을 덮어주었더니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합천으로 이사하여 새로 땅을 일구었던 98년에는 한 쪽 밭에는 거름을 풍족히 주고 
작물을 심었고 다른 밭에는 손이 돌아가지 못해 거의 맨 땅에 참깨와 콩을 심은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 비슷하게 돌보아주었지만 자랄 때부터도 달랐고 수확 후의 
결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참깨를 비교해보니 거름이 잔뜩 든 밭의 가장 잘된 
것은 굵은 나무가 되어 170꼬투리가 달렸고 거름이 거의 안든 밭의 가장 적게 달린 
것은 단지 한 꼬투리에 불과하였다. 두 밭의 평균 수확을 비교해도 20배 정도 
차이가 났던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농사에 대한 또 한 가지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땅은 
그것 자체만으로서는 생명이 싱싱하고 활기 있게 자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그리고 참으로 생명이 생명답게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물론 사람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잡초 
씨가 날아와 살다 가고 그 죽은 더미가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작물이 자라다 가고 
다시 그들을 자양분으로 하여 나무들이 뿌리내리는 자연의 이치를 부정하는 바는 
아니나 그것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한다).

땅과 하느님의 관계

본문으로 선택한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이 
본문이 전해지고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라는 
사실은 성서학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다. 강대국 바빌론은 세계 곳곳을 정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가서 노예로 부렸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인데 그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진 사회에서 노예로 
살아가면서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책임을 맡기셨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눈을 들어 살펴보시니 참으로 보시기에 좋았다. 그렇게 좋으셨다는 
내용이 자그만치 일곱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좋았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나도 내가 심고 가꾼 채소와 곡식들이 차가운 흙덩이를 뚫고 
솟구쳐 나와 싱싱하게 자라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가슴 하나 가득 기쁨이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쁨을 어찌 돈이라는 가치로 잴 수 있으랴!
그렇게도 보시기에 좋은 하늘 땅 바다와 그 속의 모든 것들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이제는 그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더욱 기뻐하시며 '아이쿠 정말 
좋구나' 하셨다. 나에게도 나를 닮은 녀석 둘이 있다(너무 나 자신의 경험이야기가 
많이 나와 독자 여러분에게 죄송한 마음이지만 좀더 설득력을 갖추려다 보니 
그렇게 된 점 이해바라며... ). 하나는 아들 다른 하나는 딸이어서 생김새는 각기 
다르지만 그래도 두 놈 다 기가 막히게도 엄마 아빠를 빼어 닮은 것을 보며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닮은 녀석이 처음 태어나던 때의 그 감동이 열세 
살과 열 살이 된 아이들을 보는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아마 예수님은 이런 
기쁨 잘 모르실 거다(약간 농담). 나를 닮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는 
좋음은 내가 심고 가꾼 나무나 채소를 보는 좋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찌 
천하를 준다한들 이 아이들의 생명과 바꿀 수 있으랴!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남녀로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창조의 현장으로 
데리고 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뭐라고 말씀하셨나? 이야기가 더 전개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이라면 어떤 말을 하겠는가를 꼭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나는 밭에 
갈 때마다 나를 닮은 아들녀석과 딸아이를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심심하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데리고 가 이것저것 식물과 동물이 자라는 것을 보며 생명에 
대한 사랑을 익혔으면 하는 바램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케도 아이들은 아빠를 
좋아하기도 하고 아빠 엄마랑 같이 일하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어릴 때는 일하러 
가자면 거절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데리고 간 아이들에게 내가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미 우리의 소유로 되어 있는 채소밭과 
각종 곡식이 심겨진 땅,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곳, 거기에다 정성들여 
가꾸고 사랑을 쏟아 부어 보기에 아름다운 그 땅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살펴서 거름도 주고 벌레도 잡아주고 김도 매 주라고 하지, 어찌 아이들에게 
우리의 채소밭을 마음대로 짓밟고 휘젓고 정복하라고 하겠는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정말 좋다고 찬탄을 하셨던 하느님께서 
자신의 대리자인 사람에게 자신이 정성들여 만드신 땅과 그 위의 것들을 맡기시며 
돌보고 가꾸고 사랑하라 하시지 않고 정복하고 다스리고, 부리라고 한다면 전혀 
논리적인 모순이 아닌가? 이것은 하느님의 오판인가 아니면 성서를 기록했거나 
번역한 이들의 잘못인가?

다른 본문들의 입장

환경과 생태계의 문제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자 많은 
성서학자들은 땅을 정복하고 동물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본문이 지닌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해보고자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같이 
용기가 없어서인지 '정복하고, 부리고, 다스리라'는 번역은 그대로 둔 채 정복의 
의미를 달리 해석(신적인 다스림이나 왕적 통치 등)하려고 무척 땀을 흘리지만 
크게 도움이 못되는 것 같다. 구약을 전공했던 나에게도 이 문제가 혼란스러워 
먼저 성서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개역'은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창세2,15). 에덴동산이나 이 땅이나 모두 하느님의 손수 
지으신 작품인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 땅은 정복의 대상이 되어도 
좋고 에덴동산만 돌보는 곳이 되어서 되겠는가?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25,23). 땅은 분명히 하느님 자신의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황폐하게 하거나 다른 이에게 팔아 넘겨서도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내가 세상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그 누가 세상의 기초를 놓았느냐?"(욥기38,3~6). 
하느님 자신이 정성들여 기초를 놓으신 땅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와 
집니다"(시편104,1~30).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맞춤하듯 하느님께서 땅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땅이 다시 소생하고 생기를 띠게 된다. 
이처럼 성서 어디를 보아도 하느님께서는 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계시지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생각하시는 흔적이 없다. 심지어 홍수에 의해 멸망을 
시키실 때도 사람들의 죄악 때문이었던 것이지 땅이나 그 위의 것들 때문은 
아니었다(창세6,5~7).

성서 오역의 역사

몇 군데의 성서를 통해 살펴본 하느님과 땅의 관계는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서로 적대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참으로 좋은 관계이다. 이런 좋은 관계인 땅을 향해 
정복하라고 하실 하느님이 아니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바로 성서 번역가들의 잘못인 것 
같다. 우리말 '개역성서'나 '공동번역' '새번역' 모두 '정복하라' 일색이다. 영어 
독일어 헬라어 모두 마찬가지다. 어찌 하나같이 이럴 수 있는지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열심히 히브리어 원어를 살피기 시작했다. 히브리어 
원어들(카바쉬, 아바드, 롸다 등)이 공교롭게도 어느 정도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드디어 문제가 풀리는 기분을 좀 느낄 수 
있었다. 그것들은 ㈀ 정복하다, 쳐서 복종시키다, 지배하다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 봉사하다,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다, 돌보아 주다, 땅을 개간하다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이제 문제는 자명하다. 본래 히브리어 기록자의 잘못은 아닌 것 같다. 단지 약간 
혼동이 될 수 있는 소지를 없앴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본래의 성서전통을 따른다면 분명히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고, 
짐승들을 돌보아주라고 번역했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번역하는 것은 번역자의 관점의 문제이다. 아마도 그런 오역의 역사는 자신들의 
정복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던 그리스(헬라어 역본)와 로마(라틴어 역본)를 거쳐 
한결같이 세계의 정복자인 영국(제임스 왕 역본)과 미국(홀리 바이블)이 그 전통을 
이어갔고, 그 아류쯤 되는 한글성서들도 그런 오류를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번역들에는 정복자의 논리가 은밀히 감춰져 있다. 빼앗는 자의 눈으로 
본다면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닌 땅과 짐승을 정복하고 다스리겠지만, 사랑스런 자기 
몫을 돌보는 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얼마나 보기에 좋고 
사랑스러워 기쁨에 넘치는 대상을 향해 더욱이 자기 닮은 아이들에게 정복하라니 
...

새로운 번역

성서는 고정되어 있더라도 보는 자의 삶과 눈에 따라 같은 본문이 달라져 보일 
수도 있다. 올바른 성서이해를 위해서는 성서해석작업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선행되는 것은 성서를 올바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누구나 올바로 성서를 볼 수 있도록 성서가 가진 본래의 눈으로 느끼고 
생각하며 번역에 임하는 것이다. 번역작업에는 은연중에 번역하는 자의 가치관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한 가지 본문을 더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다"(공동번역, 판관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개역). 이 번역을 
서로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번역들에는 왕이 없던 초기 
이스라엘이라는 한 시대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엇갈려 담겨있다. 왕이 있어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잡히고 안정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왕권옹호자들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던 것에 대한 비판을 가하겠지만, 통제와 지배를 
거부하고 민중의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의지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 시대는 
참으로 좋은 시대였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누구나 소신껏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얼마나 좋은 시대일까? 이처럼 번역자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성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제 
본래 히브리 성서기자의 눈으로 다시 한 번 본문을 새로 번역해보자. 아마도 그 
의미는 전혀 새로워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돌보아주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 주어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돌보아 주어라!"

이 번역에 따르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과제는 철저히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고, 그 위에서 자라는 식물과 동물들을 잘 돌보아주는 것이다. 
실제로 땅과 그 위의 사물들은 사랑이 담긴 돌봄을 필요로 한다. 이제야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이야기가 조금 더 완성된 느낌이 든다. 마치 내가 하느님의 본심을 
제대로 알아내기라도 한 듯 기분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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