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tide79.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9월 7일 목요일 오전 07시 07분 58초 제 목(Title): 김영민/ Y,혹은 종교와 관능 1 [김영민] [철학갸--론]1장: Y, 혹은 종교와 관능 늦깎이로 개신교에 입문한 어머니는 "나중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성경말씀에 감동, 늦깎이다운 열성을 부려 남먼저 권사에다가 속장의 직임까지 얻었다. 그러나, 우리네의 문화가 총체적 '잡탕주의' 속에 빠져 허우적대듯이, 어머니도 이 수입한 신앙을 속으로 삼키고 슬며시 어느 '쪽집게 도사'를 찾아 점을 치곤 했던 모양이다. 1994년 쯤이었으리라. 어머니는, 당시 직장도 마누라도 없이 상갓집개(喪家之狗)처럼 비실거리던 외아들의 난경(難境)을 어떻게든 타개해 볼 요량이었겠다. 워낙 우리 사회는 예의 피상적 '잡탕주의' 속에서도 기이한 획일성에 찌든 곳이라, 배우자와 직장이라는 삶의 스테레오타입에 계합(契合)하지 못하면 아다시피 제대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 아무튼, 그 쪽집게 도사는, 내 이름과 사주를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이 사람은 빼도박도 못하는 선비"라면서 평생 글을 쓰고 남을 가르치면서 살 팔자랬단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과연 쪽집게는 쪽집게"라며 혀를 차곤 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쪽하고 집어낼' 수 있을 지경으로 간단무잡한 것이 아니다--그것은 실로 박잡다기(駁雜多岐)하다. 내가 한 때 '일리의 해석학'과 더불어 '복잡성의 철학'(philosophy of complexity)에 매달렸듯이, 이것은 내 철학적 세계의 기저를 이루는 존재-현상론적 전제다. 하지만, 그 철학자의 어머니는 '쪽집개'가 호출해내는 간단무잡의 신화와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나 보다. 그리고 이것은 불행하게도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질적인 몸피를 이루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지닌 신앙적 열정의 본색(本色)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영웅은 다 본색이 있으니, 일찌기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온몸으로 제시한 본색처럼, 무릇 신앙의 어머니들이란 죄다 영웅적이다. 그러나, 죄송한 첨언이지만, 대체로 영웅이 사람잡는 법.) 이 영웅적 어머니들에 의해서 대표되는 이 땅의 신앙인들은, 예수가 시사했듯이 "가이사와 함께, 가이사를 넘어"가는 신학을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기호의 말단 소비자로 남아, 근대화의 기술적 열매만 야금야금 따먹으면서도 근대적 계몽을 견실하게 내면화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계몽과 성숙에 수반되는 지리한 시간의 주름을 알차게 겪어내지 못한다. 가령 불교에 비하면,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이른바 '시간의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시간의 수평선보다는 초시간, 혹은 무시간(uchronia)의 수직선을 욕심낸다. 초월의 뒷문, 신비의 엘리베이터가 열려있다면, 누가 그 지난하고 지루한 시간의 길을 타박타박 걸어다니겠는가? 과연 기독교가 '보행(步行)의 철학'을 참아낼 수 있을까? 이를테면, 열정적, 영웅적 개신교인들은 (선불교의 용어로써 표현하자면) 돈오수동불(頓悟須同佛)에 자족해버린 채 다생업기심(多生業其深)의 여정, 그 시간의 아픔을 쉽게 생략한다. 그들은, 남성적 근대화의 템포처럼 늘 시간에 쫓기는 것이다. 요컨대, 여러 쪽집게식의 노하우를 동원해서 곧장, 삶의 그 지긋지긋한 박잡다기, 혹은 "풍성함"을 건너뛰어 구원의 밀실을 점유하고 싶어한다. 풍우(風雨)를 앞세운 세월의 뒷거래에, 눈이 멀도록 낙엽이 층층이 쟁여지고, 그 낙엽이 소리없이 썩은 물이 고목의 하늘 끝으로 올라가 다시 한 잎의 생명을 잉태케 하는 과정. 그리고 그 시간성. 이 지독한 생리적 사실성이 피워올리는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무엇이라도 배운 바가 있다면 우리 한국의 개신교가 이 모양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불교에서 배울 바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그 요체를 늘 방외(方外)에 두려는 체구연마(體究鍊磨)의 자세, 그리고 그 자세에 따른 시간성! 기실 워낙 한국 개신교의 눈부신 성장에는 우리의 속도주의 근대화 논리를 빼다박은 듯한 구석이 적지 않지만, 그 속내를 살피면 그 성장에 걸맞은 성숙은 온데간데 없고 바로 이 '쪽집게심리'가 어김없이 기승을 부린다. 개신교는 구원의 교리에서부터 영락없는 쪽집게 형국이다. 이같은 기복적 한탕주의 심리 속에서는, "구원이란 단순히 특정한 상태의 지속을 가리키기 보다는 몇몇 의미의 극성 사이를 내왕하는 동적인 개념"*이라는 통찰일랑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란 바로 내면성의 무한한 격정과 객관적 불확실성 사이에 처한 모순"**이라는 키에르케고르 류의 고백도 제도권 종교 속에서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고 만다. 흔히 신의 각별한 은총과 개입으로 설명되는 한국 개신교의 눈부신 성장사에서 이러한 통찰이나 고백은 제자리를 얻지 못한 채 사담(私談)으로 사그러져갔다. 그리고 다수 기독교인들의 심리와 행태는 쪽집게의 구심을 향해서 끝없이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너무 극적으로 개심한 바울을 통해서, 역시 너무 극적으로 우주의 그리스도(Kyrios)로 승격한 예수는 머나먼 이국의 땅 한반도에 이르러 이를테면 '흠없는 쪽집게'의 노릇으로 내몰리고 있다. 어디 '쪽집게' 노릇 뿐이랴. 그 노릇은, 신자 개인의 사감과 원망, 관심과 이익, 한(恨)과 꿈을 좇아 끝없이 변화, 증폭하면서 새끼를 친다: 억눌린 자에게는 부양기(扶養機) 예수, 주린 자에게는 주방장 예수, 막힌 자에게는 병따개 예수, 갇힌 자에게는 열쇠 예수, 자본가에게는 은행장 예수, 노동자에게는 마르크스 예수, 양키에게는 하얀 예수, 흑인에게는 검은 예수, 한국인에게는 갓 쓴 예수, 노처녀에게는 노총각 예수, 과부에게는 홀아비 예수 등, 온갖 예수들이 개인의 이력과 욕심에 따라 이합(離合)과 취산(聚散)을 반복한다. 실존과 영성의 차원에서 자생하는 절망과 희원(希願)의 결절점으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대의 길을 남보다 매끄럽게 편승하기 위해서 임의로 호출되거나 치장되는 예수. 필시 예수 스스로도 경악할 이 자본주의적 자화상은, 계몽과 성숙을 향한 고단한 훈련을 외면한 채, 뒷문을 따고 구원의 밀실을 점거하려는 신앙인들의 가슴 한 켠에 죽은 듯이 좌정해 있는 '왕 쪽집게 도사' 쯤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존재 바로 그 자체의 구성소인이 된다"***는 심오한 교리적 해설도, 결국 교회 안팎의 현장에서는 용한 점술가에게 신탁(神託)을 매입하려는 사이비 종교심리로 귀착되고 만다. ---------- *Roger Hazelton, et. al., Handbook of Christian Theology (New York: Meridian Books Inc., 1958), p. 336. **하인리히 오트, 신학해제: 조직신학입문, 김광식 옮김(한국신학연구소, 1979), 303쪽. ***Peter C. Hodgson & Robert H. King, Christian Theolog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p. 232. 초청칼럼니스트 김영민 jajaym@hanmail.net 한일대학교 철학과 부교수/ 저서:<지식인과 심층근대화>(1999)외 14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