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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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06월30일(월) 13시42분32초 KDT
제 목(Title): Re: Re] 문사수님께 질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고 만물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의문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그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냐고 묻는 물음은 잘 못된 물음이 아닙니다.
"창조"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알고 있는 한에 있어서 당연한 물음입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만들었다. 즉 컴퓨터를 창조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당연하게 나오는 것이 하나님은 누가 창조하냐는 물음입니다.
즉 창조라는 관점을 어떤 물체가 만들어진 그 시점(태초)을 두고서 창조라고
하는 한에 있어서

"태초이전에는 무엇이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냐?"는 물음은 당연한
물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궁색하면 그냥 믿으세요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시간적인 창조관점으로 보는 하나님이 아니고
성경의 창조는 시간과 물질적인 관념속의 창조가 아닐 때에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있었고 진리가 있고 앞으로도 진리가 있다는 진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라는 것은 물질적 창조개념이
아니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명이란 고정된 물질체가 아니라
역동적인 변화체입니다.

진리란 예전에는 진리였지만 지금은 아니라든지 혹은 지금은 진리이지만
예전에는 진리가 아니었다든지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진리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어떤 시간과도 관계없고
그리고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공간적인 구분도 없을 때에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에는 "태초"와 같은 출발선이 인정될 수 없는 말입니다.
태초란 언제나 태초입니다. 어제와 비교한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태초입니다.

생명이 고정된 물질체가 아니라 역동적인 변화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진리로서의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물질적인 고정체로서의 만물과 인간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없었다가 창조되어
있다하면 이는 생명을 변화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체로 인정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유태교의 선민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선민사상을 부정합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로서 위상을 갖게 되고 인류의 종교로
나갈 수 있는 토대는 "유태교의 선민사상"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유태인들의 물질적 신이 아님을 선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떤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격화된 하나님이 특정 시점을 태초로 잡아서 고정체로서의 만물을
창조했다는 신학관으로 신앙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로서의 하나님이 언제나 태초인 역동성인 변화체로서의 생명을
지금 창조하고 있다는 신학관으로 신앙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이 창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임을
과연 기독교도들이 믿고 있을까요?

즉 성경의 창조관은 결론된 창조가 아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진행형으로서의 창조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생이란 말은 우리모두 하나님의 자식이므로 서로 조화와 협동속에
살도록 노력하자는 인간적인 말이 아닙니다.
상생이란 진리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이 되어야 합니다.
즉 상생할 수 밖에 없게 끔 되어 있는 하나님 역사하심의 이치가
"상생"입니다. 생명의 끝없는 변화적인 창조는 "상생"이라는 이치에
의하여 현재 진행되고 미래에도 진행될 것입니다.

그 상생에 대하여 인간적 관점을 낱낱이 거론한 것이
신라의 "원효스님"의 화쟁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적인 특성을 무시한 채로
인격적 하나님에 의한 결론적 창조관을 인정할 때에 어떤 것이 발생하냐하면
에덴동산에서 나오는 결과가 벌어지는데
왜냐하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결과론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정체로서의 영혼을 창조했다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유태교의 관점입니다. 거기에서 만이 선민사상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것이 흰두교의 사성계급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부활과 더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의 사함을 약속받았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은 이 진행형으로서의 하나님과 생명으로서의 창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까지 물질적 영혼관과 육신적인 인간관의 죄인적 물질적 입장에서의
예수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와같은 선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적 예수에서 생명적이고 진리의 역사함의 순간으로의 예수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지, 육신을 유지시킨 채로 육신의
구속을 남겨두고 부활하는 것으로 보는 신학관은 언제나
똑같은 물음을 남기게 됩니다.

"태초이전은 무엇이고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그리고 자신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똑같음을 알았기에
"나를 믿으라고 그렇게 애타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이므로 사실여부의 확인을 따질 필요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신앙은 어떻게 되어야만이 정상적일 수 있냐하면
죄의식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불안에 떠는 사람을
처음부터 안심을 시키는 것이 기독교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하나님 역사의 순간으로서의
사람을 보고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규정부터 하고 기독교로 인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고 원죄의 사함을 받았으니
나를 믿고 원죄의 사슬에서 벗아나라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잘못되어 나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배타적
사랑으로 흐르고, 사랑이 기독교를 믿는 조건을 전제로 하여 진행되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원죄가 사함되었다는 사실을 믿어달라고
한 것이지 기독교라는 도그마에 소속이 되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원죄는 물질적 창조관과 물질적 관념에서만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한 적이 없으므로
원죄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원죄를 사함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반대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함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상생은 생명을 생명으로 계속 창조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즉 나의 현 순간은
상생이란 이치에 의하여 창조되는 진행속에서 나입니다.
물질적 공간적이고 시간적 고정체로서의 나는 원죄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고정된 선, 고정된 악의 선악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변화체 생명으로서의 자신을
믿을 때에, 원죄의 사슬은 있어본적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불교도의 입장에서 말한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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